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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세계의 귀환자-57화 (57/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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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날 저녁, 용우는 백원태의 연락을 받았다.

[그녀가 깨어났습니다.]

“잘됐군요.”

[문제가 하나 있는데… 눈을 뜨자마자 병원 사람들을 접근조차 못 하게 하고 있습니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사고가 날 것 같은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연락한 겁니다.]

“제가 곧 가겠습니다. 그렇게 전해주세요.”

용우는 전화를 끊자마자 텔레포트를 써서 병원에 도착했다.

곧바로 VIP 구역으로 간 용우는 백원태를 발견하고 물었다.

“상황이 어떻습니까?”

“여전합니다. 아무도 접근 못 하고 있어요.”

용우는 실험체 소녀가 있는 VIP 병실 문을 열었다.

혼자 입원해 있기에는 꽤 넓은 병실이었다. 내부 인테리어도 병원이라기보다는 호텔을 연상시키는 편안하고 고급스러운 공간이다.

그곳에 한 소녀가 있었다.

참으로 안쓰러운 모습을 한 소녀였다.

몸도, 팔다리도 앙상하게 말랐고 얼굴도 가죽만 남은 것 같다. 눈 밑에 자리 잡은 짙은 다크서클이 인상을 더욱 피폐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위태로운 모습 속에서, 오로지 그녀의 눈만이 강렬했다.

마치 타오르는 불꽃처럼 강렬한 빛을 품은 눈동자가 용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용우가 물었다.

“그쪽으로 가도 될까?”

“…….”

소녀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이나 탐색하듯이 용우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용우는 그녀를 자극하지 않도록 천천히 다가가서는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았다.

“믿어줄지 모르겠는데… 내가 팬텀에서 너를 구해서 여기로 데려왔어.”

“믿어요.”

용우가 말하자마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용우는 좀 당혹감을 느꼈다.

소녀가 말했다.

“느낌이 같으니까.”

“느낌?”

용우가 의아해했지만 소녀는 고개만 끄덕일 뿐, 설명해 줄 의지가 없어 보였다.

용우는 포기하고 말을 이었다.

“여기는 내가 신뢰하는 사람이 준비해 준 곳이야. 안심해도 돼.”

“…여긴 어디죠?”

그녀는 말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보였다.

“병원이야.”

“병원…….”

“일단 너를 숨겨야 한다고 판단해서 여기로 데려왔어. 네 몸은 치료가 필요하다고 보기도 했고.”

그 말에 그녀가 반사적으로 자신의 팔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뼈만 남은 앙상한 팔이었다.

용우가 말했다.

“난 서용우라고 해. 프리랜서 헌터로 일하고 있지.”

“전… 리길순이에요.”

“…….”

용우는 갑자기 머나먼 과거로 돌아간 것 같은 이름에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곧 지금 한국 사회에는 의외로 이런 이름이 흔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북한 난민인가?’

그러고 보면 표준어를 쓰고 있기는 하지만 발음에 약간 사투리의 흔적이 보이기는 했다. 그게 북한 사투리일 거라고는 용우가 생각 못 했을 뿐.

북한 난민들이 한국 사회에 편입된 지 이제 고작 13년이 지났을 뿐이다.

남한인과 북한 난민의 사고방식 차이 때문에 한국 사회에는 갈등과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북한 난민들은 대부분 출신과 학력의 한계로 한국 사회에서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들 중에는 정부의 지원금으로 살아가는 빈민층의 비율이 높았고, 고소득층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들은 거의 헌터들이었다.

북한에서 군 경험을 한 자들이나 신체 건강한 이들은 일반인 헌터가 되어서 목숨 걸고 싸우는 것으로 높은 소득을 올렸기에 헌터 업계에는 북한 출신자가 상당히 많았다.

“어쩌다가 팬텀한테 붙잡힌 건지 말해줄 수 있을까?”

“그건… 모, 목소리…….”

“목소리?”

“아.”

말을 더듬던 리길순이 갑자기 비틀거렸다.

드드드드드!

동시에 그녀의 몸에서 강렬한 마력 파동이 쏟아져 나오며 주변이 흔들렸다. 격해진 감정에 반응한 것이다.

“미안하다. 지금은 생각하지 마. 내가 너무 성급했군.”

용우는 그녀를 붙잡고 마력 파동을 진정시켰다.

-평온의 숨결.

그리고 정신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는 스펠을 썼다. 용우에게서 따스한 빛이 흘러 들어가자 리길순의 상태가 빠르게 진정되었다.

‘물어보고 싶은 거야 많지만… 일단은 기다리는 수밖에.’

리길순에게 듣고 싶은 것이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육체적으로 쇠약해진 그녀에게 끔찍한 기억을 되새기라고 하는 것은 학대였다.

“으…….”

심호흡을 하며 안정을 되찾는 리길순의 반응은 좀 특이했다.

그녀는 화가 난 것 같았다. 용우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못한다는 것에.

‘의지가 강한 건가, 아니면 망가져 버린 자의 광기인가.’

용우는 리길순이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둘의 경계는 굉장히 애매해서, 사실은 누구도 구분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한참 동안 심호흡을 하던 리길순이 물었다.

“한 가지만 말해주세요.”

“뭐든지.”

“어떻게 제 머릿속을 조용하게 만드셨나요?”

그녀의 머릿속에는 마치 라디오 채널이 생겨난 듯 끊임없이 속삭이는 목소리들이 있었다.

때로는 함께 떠들었고, 때로는 혼자 떠드는 그 목소리들은 두서없었다.

리길순이 경험한 일과 생각을 마치 다 봤다는 것처럼 떠들어대는가 하면, 전혀 모르는 이야기를 떠들어댈 때도 있었다.

“…전 제가 미쳤다고 생각했어요.”

정신 질환의 일종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증상이 아닌가?

“눈을 뜨고 있을 때면 한순간도 그 목소리로부터 자유로워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매일 잠들 때마다, 혹은 실험 때 마취를 당해서 의식을 잃을 때마다 수도 없이 바랐다.

이대로 잠들어서 다시는 깨어나지 말았으면 하고.

“그런데… 지금은 조용해요. 어떻게 하신 거죠?”

“텔레파시를 끊었어. 아니, 정확히는 ‘껐다’고 해야 할까…….”

“텔레파시요?”

“네 머릿속에 들리는 목소리는 일종의 텔레파시 채널이 연결되어서 들리는 거야. 네가 표현한 대로 머릿속에 라디오 채널이 형성된 셈이지.”

리길순에게는 특정한 텔레파시를 항시 수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아마도 팬텀의 실험으로 깨어난 능력이리라.

“너는 OnOff 스위치가 없어서 강제로 그 목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던 거지. 그래서 내가 임시로 차단 기능이 달린 스위치를 만들어서 넣은 거야.”

그 말에 리길순이 눈을 껌뻑거렸다.

“그렇게 간단한 거였어요?”

“요약하니까 간단해 보일 뿐이고, 사실 간단하진 않아.”

용우는 길순을 촉진해서 체내 상태를 정밀 진단 하고, 텔레파시를 수신하는 포인트를 찾아내서 정신파 차단 스펠을 썼다.

이것은 의사가 첨단 도구를 갖고 수술을 하는 것과도 비슷한 과정이었다. 어비스에서의 경험으로 얻은 지식과 기술, 그리고 무엇보다 거기에 대응하는 스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귀신 들림 현상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면 나도 뭐가 문젠지 몰랐겠지.’

어비스에서 언데드들을 적으로 맞이했을 때, 그들 중에는 텔레파시 그 자체를 무기로 쓰는 놈들이 있었다.

휴식을 하지 못하도록 강제적으로 텔레파시를 연결해서 귀신 들림 현상을 일으키거나, 아예 정신 지배를 노리는 경우도 있었다.

‘여기서도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식일 줄은 몰랐군. 이거 나 말고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용우는 지속성을 지닌 정신파 차단 스펠을 쓸 수 있는 각성자가 자신 말고 또 있을지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너한테 만들어둔 스위치를 갱신하고 싶은데 잠깐 고개를 숙여줄 수 있을까?”

용우는 길순의 목을 잡고 섬세한 마력 컨트롤로 정신파 차단 스펠을 갱신했다.

‘처음 설치 시의 시각부터 지금까지 대략… 37시간 정도? 그런데 소모도가 이 정도면 80시간 이상은 유지된다고 봐도 되겠군.’

즉, 최소한 80시간에 한 번씩은 용우가 그녀와 접촉해서 갱신해 줘야 된다는 뜻이다.

‘골치 아픈데.’

80시간이 길어 보이지만 그래봤자 사흘 좀 넘는 시간이다.

만약 용우에게 급한 용건이 생겨서 장시간 자리를 비우게 된다면?

‘이 아이에게 대응 스펠을 준다고 하더라도 요령을 터득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지. 스스로 할 수 있게 된다 해도 철저하게 잘 하는지 검사해 줄 사람이 필요하고. 그리고 나 말고 이 역할을 대행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용우는 잠시 리길순에게 양해를 구하고 백원태에게 상담했다.

“혹시 텔레파시를 막을 수 있는 수단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현존하는 기술로는 불가능해요.”

“혹시 공표되지 않은 기술 중에 그런 게 없나 했는데… 없나 보군요.”

용우는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저 애, 우리 집에서 돌보겠습니다. 일단 본인 의사를 물어보긴 해야겠습니다만…….”

“음? 숨겨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물리적으로 감추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용우가 리길순을 곁에 둬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자 백원태도 납득했다.

“그럼 위장 신분이 필요하겠군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최대한 빠르게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도 하나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말 나온 김에 우리 그룹에서 텔레파시 차단 기술을 만드는 데 협력해 주십시오.”

백원태는 용우에게 언데드에 대해서 들은 바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텔레파시를 공격 수단으로 삼는다는 것은 방금 전의 설명으로 처음 알았다.

언데드는 아직까지 지구에 나타나지 않은 몬스터들이다. 그러나 앞으로도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들이 지구에 등장할 경우를 생각하면 최대한 빨리 대책을 마련해 둬야 한다.

“다른 텔레파시 스펠 보유자도 섭외해 보겠지만, 용우 씨만큼 연구에 도움이 되는 협력자가 되긴 어렵겠죠. 물론 공짜로 부려먹지는…….”

탁!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용우가 아공간에 손을 쑥 집어넣더니 뭔가를 꺼내서 백원태에게 던져주었다.

주먹만 한 유리구슬처럼 보이는 물건이었다.

그 안쪽으로부터 녹색의 기운이 안개처럼 꿈틀거리면서 안과 밖을 넘나든다.

“텔레파시 스펠 스톤입니다. 쓰세요.”

“…….”

“사장님이 써도 되고, 믿을 만한 사람에게 줘도 됩니다.”

“용우 씨, 참…….”

백원태는 기가 질린 얼굴로 말했다.

“아주 자연스럽게 폭탄 같은 선물을 주는군요.”

“나중에 그만큼 뜯어낼 겁니다.”

용우가 씩 웃었다.

천문학적인 연구 비용이 들어갈 일을 크로노스 그룹이 해준다고 하면 용우로서는 환영할 일이었다.

* * *

리길순은 당분간은 병원 VIP실에 있기로 했다. 영양실조가 심각한 데다 다른 이상은 없는지 정밀진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용우는 리길순에게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를 물어보았다.

그녀는 용우가 말하는 지침들을 반발 없이 수긍했다.

당분간 숨어 있어야 한다는 것도, 리길순이 아닌 다른 신분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도.

“만약 이름을 제가 정할 수 있다면… 성은 그대로였으면 좋겠어요. 이름은 리사로 하고 싶어요.”

성은 ‘리’에 이름은 ‘사’라니, 한국인 이름치고는 참 특이하지만 발음만 보면 그렇지도 않았다.

용우가 실종되기 전부터 이미 그런 면이 있었지만 2028년의 한국에는 한국적인 성씨와 서구적인 이름의 조합이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으니까.

“리사? 알겠어. 그렇게 해줄 수 있는지 물어볼게. 하지만 위조 신분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나도 몰라서 장담은 못 해.”

그러자 리길순이 멀뚱멀뚱 그를 바라보았다. 용우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이유, 안 물어보시나요?”

“말하고 싶다면 들어줄게. 하지만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자칫 건성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길순은 상처받지 않았다. 용우의 표정이 진지했기 때문이다.

길순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외국인 같은 이름을 갖고 싶었어요.”

“외국인?”

“어렸을 적에 남한으로 와서… 이름 때문에 놀림을 많이 받았거든요.”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싫어했다. 소중하게 생각한 적도 없었고, 좋은 추억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렇군. 최대한 힘써볼게.”

용우는 거기에 대해서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리길순에게 묘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제 가족을 찾거나 하실 필요는 없어요.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해도 괜찮아요.”

“…….”

용우는 잠시 말없이 리길순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의 삶을 버리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누군가가 되는 길이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길순은 오히려 그 선택지를 반기는 것처럼 보였다. 팬텀에게서 도망쳐야 한다는 두려움과는 다른 동기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용우는 결국 그녀의 사연을 캐묻지 않았다.

타인의 사정에 무관심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어비스에서의 경험이 그가 호기심으로 행동하는 것을 막았다.

어비스에서는 서로의 사정을 캐묻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다.

문명사회인 한국과 달리 그 룰을 어기면 서로 칼부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용우는 그런 곳에서 3년을 보냈다. 그곳의 룰은 용우에게 있어서는 작은 사회의 규칙을 넘어서 삶의 방식이 되어 있었다.

“당분간은 아무 걱정 말고 푹 쉬어.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면 어지간한 건 다 들어줄 거야. 나도 사흘에 한 번은 찾아올 거고.”

그리고 용우가 떠나고 나자 길순은 링거를 맞으면서 죽은 듯이 잠들었다.

팬텀에 납치당한 후로는 처음으로, 약 없이도 잠들 수 있었던 날이었다.

Chapter19 성좌의 대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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