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새벽의 아파트에 묵직한 침묵이 감돌았다.
한참 동안 멍청하니 용우를 바라보던 백원태가 물었다.
“팬텀의 실험체란 말입니까? 이 여자애가?”
“예.”
고개를 끄덕인 용우가 사정을 설명했다.
“오늘 놈들의 아지트를 덮쳤을 때, 상당히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용우는 차분하게 그곳에서 자신이 본 것들을 설명해 주었다.
팬텀의 조직원들은 딱히 말기 중독자처럼은 보이지 않았는데도 다들 마력을 쓰고 있었다는 것.
그들이 고위 공간 간섭계 스펠인 오버 커넥트로 중요한 것들을 빼돌리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워프 게이트 너머에서 나타난 팬텀 조직원이 마치 ‘고스트’의 마이너 카피처럼 보이는 존재로 변신해서 자신과 싸웠다는 것…….
“놈들이 마지막까지 빼돌리지 못한, 인간이 들어 있는 캡슐이 2개 있었습니다.”
하얀 갑옷이 자폭했던 것은 그 캡슐들을 파괴하고 그 안에 있던 실험체들을 없애 버리기 위해서였다.
용우는 하얀 갑옷이 자폭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곧바로 블링크로 캡슐에 접근했다. 그리고 캡슐을 깨고 안에 있던 소녀와 함께 블링크해서 폭발을 피했던 것이다.
“…용우 씨, 블링크나 텔레포트라는 스펠은 사용자에게만 적용되는 거 아니었습니까?”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용우는 백원태를 한번 흘겨보고는 설명해 주었다.
“사용자의 마력이 커지면 접촉한 사람 하나 정도는 같이 옮길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이동 거리가 짧아지지만.”
“그렇군요. 든든한데요?”
“뭐가 든든합니까?”
“어느 날 우리가 같이 있다가 재난 상황에 휩쓸려도 용우 씨가 날 버리고 혼자 튀어버리진 않을 거 아닙니까?”
“…….”
용우가 정말 싫다는 표정을 짓자 백원태가 킬킬거렸다.
곧 그가 표정을 진지하게 고치며 말했다.
“그런데 왜 경찰에 알리지 않고 집으로 데려온 겁니까?”
“경찰을 믿을 수가 없어서입니다.”
“설마 경찰 내부에 팬텀의 스파이가 있다고 의심하는 겁니까?”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경찰이 너무 약해서 못 믿겠습니다. 만약 팬텀 쪽에서 그 고스트의 짝퉁 같은 놈까지 동원해서 작정하고 강탈하거나 없애 버리겠다고 덤비면 절대 못 지킬 겁니다.”
“…….”
신랄하다.
너무 신랄해서 경찰에 대한 동정심이 왈칵 솟구칠 지경이다.
‘근데 이거 뭐, 반박할 말이 없군.’
헌터와 경찰의 무력 차이는 군대와 경찰의 무력 차이와도 비슷하다.
헌터는 사회가 유지될 수 있는 세계의 기반 그 자체를 지키는 자들이고 경찰은 헌터가 지켜낸 기반 위에서만 성립하는 사회의 치안을 지키는 자들이다.
당연히 양쪽에 주어진 무력은 현격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백원태가 물었다.
“그럼 용우 씨는 이 아이를 어떻게 하고 싶은 겁니까?”
“2가지 방안을 생각해 봤습니다. 첫 번째는 그녀를 확보한 경위를 속이고 한국 게이트 재해 연구소로 보내는 것.”
그녀에게는 의료적 진단과 보살핌이 필요하다. 한국 게이트 재해 연구소라면 그녀를 연구 대상으로 보긴 하겠지만 팬텀처럼 비인륜적인 실험을 하진 않을 것이다.
“두 번째는?”
“아예 그녀의 신분을 위장하고 비밀리에 살아갈 수 있도록 후원하는 겁니다. 물론 어느 쪽이든 팬텀에 대한 정보는 제공받아야겠죠.”
“국가의 신세를 지냐 안 지냐로 선택지를 나눠놓았군요.”
백원태가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두 번째로 진행합시다.”
“그럼 그렇게 해주시죠.”
“음? 괜찮겠습니까?”
“어차피 제가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사장님의 손을 빌려야 하는 일이니 사장님이 좋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하세요.”
“신뢰하는 건지 아니면 귀찮아서 떠넘기는 건지 헷갈립니다만?”
“편하신 대로 생각하시죠. 제 의견을 물으신다면… 나중에라도 이 아이가 국가기관에 몸을 의탁하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해달라는 정도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차로 옮겨야겠는데 좀 도와주겠습니까?”
“그러죠. 옮길 때 흔적을 남기면 안 될 테니까 내려가서 라이트로 신호해 주시면 제가 데리고 내려가겠습니다.”
그 말에 백원태의 표정이 묘해졌다.
용우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용우 씨, 그럼 데려올 때는 어떻게 데려온 겁니까?”
“텔레포트로 왔습니다. 집은 좌표 지정을 해놔서요. 데리고 나갈 때는 블링크로 갈 겁니다. 사장님 차 뒷좌석에 저와 이 아이가 탔다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을 테니 염려 마시죠.”
“…….”
백원태가 할 말을 잃었다.
곧 그가 폰을 들며 말했다.
“그럼 우리 쪽 병원으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병원요? 별장 같은 데가 아니라?”
“누군가를 숨겨놔야 하면 별장은 전혀 좋은 선택지가 아닙니다. 사람 없던 집에 들락날락거리면 눈에 띄잖습니까.”
“아…….”
“병원 VIP실을 쓸 겁니다. 거기면 밖으로 나올 필요도 없고, 그쪽에는 입이 무거운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백원태는 비서실장에게 전화해서 일 처리를 지시하고는 용우의 집을 나섰다.
그가 운전석에 앉아서 라이트를 깜빡거리고 나서 잠시 후.
“가시죠.”
뒷좌석에서 용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용우와 팬텀의 실험체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은신 스펠로 철저하게 모습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일처리가 확실해서 든든하긴 한데… 좀 오싹하군요, 용우 씨.”
“은신 믿고 설치다가 CCTV에 걸린 적이 있어서요. 게다가 사고 터지면 온갖 감지 방식으로 은신도 파악하잖습니까? 요즘은 어디에나 누군가의 눈이 있는 시대니까 조심해서 나쁠 것 없죠.”
“동감입니다.”
백원태는 마포구에 있는 크로노스 그룹 산하의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가는 도중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재워둔 겁니까, 아니면 깨어나지 못한 겁니까?”
“깨어나지 못한 겁니다. 구해냈을 때 잠깐 눈을 떴었는데 몇 마디 나누지도 못하고 다시 혼절하더군요.”
치료 스펠을 써봤지만 그걸로 회복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충분한 휴식과 영양 공급이 필요하다. 그것은 용우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팬텀을 만든 것이 고스트라면… 그들의 목적은 무엇일 거 같습니까?”
백원태는 용우가 겪은 일들을 듣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각성자의 시체에 빙의해서 출현하는 정체불명의 초인들, 고스트.
그들의 존재는 불길하고 꺼림칙하지만 동시에 믿음직하기도 했다. 그들이 없었다면 인류 문명은 이미 파멸했을 테니까.
그런데 인류를 지켜왔다고 믿어온 그들이 마약을 퍼뜨리고 인체 실험을 하는 악랄한 짓을 하고 있었다니…….
“놈들은 아마도 인공적으로 각성자를 만들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용우는 촉진으로 팬텀의 실험체 소녀를 조사해 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마력 기관을 갖고 있었다.
팬텀의 아지트에서 싸웠던 흑인 청년과는 달리 온전한 마력 기관을 말이다.
“고스트 짝퉁… 너무 없어 보이니까 고스트 레플리카라고 하죠. 어쨌든 그걸로 변한 그 흑인과의 공통점은 뇌와 심장에 마력이 응축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 소녀는 마력 기관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뇌와 심장에 마력이 응축되어 있기까지 했다.
백원태의 표정이 굳었다.
“그건… 놀라운 일이군요.”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용우의 말대로라면 팬텀은 이미 인공적으로 각성자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것 아닌가?
“인공적으로 각성자를 만든다라…….”
아마도 팬텀만이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아니리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소문은 많죠. 용우 씨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저에 대해서요?”
“예. 제로의 정체에 대해서 온갖 추측이 난무하고 있고 그중에는 당신이 러시아나 중국 7국 쪽에서 비밀리에 진행해 온 슈퍼 솔저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용우는 어처구니없어하며 물었다.
“실제로 그런 실험이 이뤄지고 있습니까?”
“팬텀만이 아니라 범죄 조직들 중에서는 기업이나 국가의 협조를 받아서 그런 실험을 하는 놈들이 꽤 있습니다. 그리고 국가에서 그런 실험을 하는 것도… 솔직히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라고 봅니다.”
과거의 인류 역사만 뒤져봐도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비록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온 적은 없어서 픽션의 소재로만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픽션이 현실이 된 시대다.
세계는 20년 전하고만 비교해도 훨씬 더 막장이었고, 인권의 사각지대는 당시보다 압도적으로 커져 있었다.
무엇보다 초인이 실존하며, 그들에 의해 세계가 지켜지고 있는 시대다. 권력자들이 실존하는 초인의 힘을 갈구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이 소녀는 역시 나라 쪽에는 안 알리는 게 좋을 수도 있습니다. 용우 씨에 버금가는 폭탄이 될 겁니다.”
“본인과 이야기를 해봐야겠죠. 조사도 해봐야겠고…….”
그러는 동안 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다 왔군요.”
백원태가 병원 주차장에 차를 대는 동안 용우가 말했다.
“여기 혹시 은신을 간파할 수 있는 센서가 있습니까?”
“VIP 구역에는 있습니다.”
은신은 어디까지나 광학적으로 모습을 감출 뿐이다. 은신을 이용한 범죄 사례가 나타나게 되자 인류는 편집증적으로 은신을 포착할 수 있는 시큐리티 시스템을 발전시켰다.
“사장님, 잠시 손을 잡아주시겠습니까?”
백원태는 곧 보이지 않는 용우의 손이 자기 손에 포개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뭔가 따끈따끈한 감각이 손바닥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대로 병실로 가주세요.”
“혹시 나를 표적으로 공간 이동 할 수 있는 겁니까?”
“예.”
“정말 무섭군요. 용우 씨의 능력이 다 알려지면 아마 각성자에 대한 대응 체계가 전부 수정될 겁니다.”
“지금부터 수정하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고스트들과 적대한다면…….”
용우의 말에 백원태는 오싹해졌다.
‘고스트와 적대한다?’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백원태는 고스트의 힘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전장에 홀연히 출연해서 재앙을 막아온 그들은, 7세대 헌터들이 합류한 지금도 범접할 수 없는 힘을 갖고 있었다.
‘단순히 전력으로만 비교하면… 승산이 없다. 지구상의 그 누구라 해도.’
백원태가 한국 최고라고 자부하는 팀 크로노스의 1부대의 헌터들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0세대 각성자인 용우라고 해도…….
‘하.’
문득 백원태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용우 씨라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용우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는, 아니, 믿고 싶어지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승산이 희박한 배팅이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래도 백원태는 기꺼이 용우를 믿고 올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용우 씨.”
“예.”
“조심하십시오.”
“…….”
“당신은 분명 우리의 상식으로 잴 수 없는 잠재력을 가졌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군요.”
초창기부터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용우의 변화를 지켜봐 온 백원태이기에 할 수 있는 조언이었다.
“그래도 지금의 용우 씨는 아직 고스트를 능가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용우가 입을 열었다.
“만약 제가 고스트의 정체를 알아낸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알아낼 방법이 있습니까?”
백원태가 놀라서 묻자 용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부디 그때는 혼자 처리하지 말고 내게도 상의해 주세요. 부탁입니다.”
용우는 가만히 백원태를 바라보았다.
밤이라서 선글라스를 쓰지 않은 그의 눈에서 용우는 뜨거운 신뢰를 느낄 수 있었다. 어비스에서는, 아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신뢰의 눈빛이었다.
그 사실에 왠지 가슴이 뜨거워져서, 용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 * *
다음 날, 용우는 권희수 박사의 호출로 한국 게이트 재해 연구소로 향했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권희수 박사가 용우를 보자마자 활짝 웃었다.
“오라 가라 해서 미안해요. 연구소 아니면 이야기하기가 애매해서.”
“괜찮습니다. 일이니까요.”
용우가 이곳에 오는 것은 공짜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매번 어비스 과금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아니었다.
김은혜는 이 문제에 대해서 헌터 관리부에서 전권을 위임받고 용우와 새로운 옵션을 협상했던 것이다.
‘유능한 여자야.’
첫 만남은 최악이었지만 용우는 김은혜의 수완이 마음에 들었다. 중개인으로 삼은 보람이 있는 인재다.
협상 결과 용우는 어비스 과금보다는 훨씬 저렴하지만 일반적인 자문역보다는 월등히 비싼 수당을 받게 되었다.
권희수 박사가 물었다.
“팬텀 검거 작전에 대해서, 현장에서의 경험담과 견해를 듣고 싶어요.”
인천항에서 이루어진 팬텀 검거 작전에 대해서는 용우는 보고서를 작성하지 않았다.
경찰 측에서는 현장에서의 작전 데이터에 기반해서 보고서를 작성했고, 그 과정에서 용우에게는 몇 가지 질문을 하고 답변을 받았을 뿐이다.
막강한 권력을 배경으로 둔 권희수 박사는 경찰 측의 보고서도 당일에 입수해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 입장에서는 너무 빠진 것이 많아서 용우에게 와달라고 한 것이다.
용우가 물었다.
“조직원들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됐습니까?”
“한창 진행 중이에요. 이미 몇 가지 특이한 데이터가 나와 있고요.”
현장에서 죽은 자들의 시체를 부검하고, 검거한 이들을 의학적으로 정밀 진단 하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 그 작업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부검 결과는 좀 더 기다려 봐야 나오겠지만, 지금 검거된 조직원들의 진단 결과는 일반적인 아니마 중독자들과는 좀 다르게 나오고 있어요.”
개인별 격차가 크긴 하지만 뇌와 심장에 마력이 응축된 것이 발견되고 있었다.
“중독자들도 비슷한 증상이 발견되지만, 이자들은 심한 중독 증상에 시달리는 것 같지도 않고 체내의 마력 분포가 훨씬 안정적이에요.”
“특이체질이라는 겁니까?”
용우의 질문에 권희수가 고개를 젓더니 오른손을 들어서 V 자를 그렸다.
용우가 대체 뭔가 싶어서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가 헤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뇨. 아니마가 2종류 이상이었어요.”
“…….”
2종류라는 뜻으로 V 자를 그린 건가? 여전히 행동이 좀 엉뚱한 사람이었다.
“시중에 유통시키는 아니마와 팬텀 조직원들이 쓰는 아니마가 다른 것이다?”
“네. 이건 전부터 나온 이야기이긴 하지만요.”
한국에서 팬텀 조직원이 검거된 것은 이번이 최초다.
하지만 국제적으로는 몇 건의 사례가 있고, 한국 쪽에도 정보가 약간은 공유되었던 것이다.
“둘 다 마약이라는 점은 똑같지만 중독성이나 효과 면에서는 큰 차이가 있을 가능성이 커요. 이번에 조직원들을 검거하면서 그들이 품에 갖고 있던 샘플도 입수됐으니 며칠 안에 분석 결과가 나올 거고요.”
권희수는 그 사실이 기쁜지 히죽 웃고 있었다.
“제로, 당신이 봤을 땐 어떤가요?”
“아니마가 2종류라는 건 몰랐지만… 놈들은 별로 중독자처럼 보이지 않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몇몇 놈들은 뇌와 심장이 거의 마력 기관화되어 있었죠.”
용우는 자신이 확보한 팬텀의 실험체 소녀에 대한 것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권희수 박사가 물었다.
“그 하얀 갑옷은요? 당신 혼자서 교전했다고 들었어요.”
“…….”
용우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망설이거나 고민한 것은 아니었다. 권희수를 보는 용우의 눈빛은 그녀에게 먼저 알고 있는 것을 말해보라고 하고 있었다.
결국 권희수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가지 보여줄 게 있어요.”
권희수는 연구실의 디스플레이를 켜고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이건?”
“재해 지역을 정찰하는 드론이 포착한 영상이에요.”
몬스터들에게 점령당한 재해 지역의 정찰은 꾸준히, 다각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인류의 손이 안 닿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출현한 게이트가 게이트 브레이크를 일으켜도 손쓸 방법이 없으니 계속해서 몬스터가 늘어난다.
계속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가 적당한 시점에 무차별 폭격을 가하거나, 위험을 감수하고 외곽 지대에 헌터들을 투입해서 몬스터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재해 지역의 확장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맞이하게 될 수도 있었다.
“당신이 싸운 하얀 갑옷은 세계 곳곳의 재해 지역에서 출현하고 있었어요.”
하얀 갑옷이 재해 지역에서 몬스터와 싸우는 영상이 여럿 있었다.
“가장 처음에 포착된 영상은 1년 반 전. 퍼스트 카타스트로피 때부터 활동한 고스트보다는 역사가 훨씬 짧죠. 지금까지 파악된 바로는 그 어떤 각성자보다도 다양한 스펠을 쓰고, 들고 있는 무기에 따라서 특화된 영역이 다른데…….”
고스트들의 무기, 그리고 아티팩트와 무기의 종류와 특화 영역이 동일했다.
“다만 마력은 고스트와 비교할 바는 아닌 것 같아요. 고스트는 단독으로 7등급 몬스터를 때려잡고, 그 무기로 인해 증폭된 순간 출력은 8등급 몬스터와 비견할 만한 수준이라…….”
그에 비해 하얀 갑옷은 기본적으로 페이즈12~13 정도에 무기의 힘으로 순간 출력이 크게 증폭되는 것에 그친다.
“페이즈13이라…….”
“공식 데이터상으로는 인류 최고치를 넘는 거지만… 그래봤자 4등급 몬스터 수준이라는 건 똑같죠.”
권희수 박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팬텀과 연결되어 있다는 건 이번에 처음 밝혀진 정보예요.”
권희수 박사는 영상을 끄고 말을 이었다.
“각성자를 인공적으로 만들기 위한 시도는 꽤 많이 이뤄지고 있어요. 팬텀은 가장 그 목적에 가까이 다가간 조직이고, 그럴 수 있었던 것이 배후에 고스트가 있었기 때문이라면 그건 납득이 가는 부분이죠.”
고스트는 어떤 식으로든 이 모든 일의 원인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권희수 박사만이 아니라 고스트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마가 2종류인 건 좀 이상해요.”
“어째서입니까?”
“중독성 없이 안정적으로 각성자… 까지는 아니더라도 마력 보유자를 만들어낼 수 있는 약을 만들어냈는데 왜 굳이 마약을 뿌리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되지 않아요?”
“자금 조달 문제일 가능성은?”
“전문가들이 그러는데 팬텀은 별로 수익성을 신경 쓰는 조직이 아니래요. 마약 팔아서 조직을 운영하는 게 아니라 스폰서가 따로 있는 것 같다네요. 그리고 이 경우 스폰서를 딱 어디라고 특정 지을 수 없을 정도로 후보가 많다고 하고.”
“흠…….”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제 가설인데… 2가지 아니마는 각기 다른 목적성을 가진 별개의 약이라고 봐요.”
조직원들에게 주어지는 아니마는 일종의 각성제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물론 그 또한 마약 성분이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용도가 다르게 제조된 것이다.
“시중에 퍼뜨리는 아니마는 불특정 다수에 퍼뜨려서 데이터를 얻고자 하는 목적이라고 생각해요.”
“데이터를?”
“그들의 연구가 완전하지 않다는 건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사실이죠. 어디까지나 진행형이에요. 그리고 아마도 비밀 실험실에서, 제한된 규모로 인체 실험을 하는 것만으로는 그만한 성과를 얻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해 본 용우가 이견을 제시했다.
“하지만 마약을 퍼뜨린다 한들 중독자들의 데이터를 다 수집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맞아요. 그러니까 일종의 특이체질을 찾는 게 아닐까요?”
“특이체질이라면…….”
“그들에게는 일반적인 중독자와 특이체질 중독자를 골라내는 방법이 있는 거죠. 우리가 알 수 없는 기술로.”
애당초 고스트는 인류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그들은 명백히 인류가 구축한 과학기술을 웃도는 영역에 자리 잡고 있다.
“실험용으로 유의미한, 연구 표본이 될 수 있는 특이체질의 소유자를 찾아내는 것이 목적이라면 어떨까요?”
“…상당히 그럴듯하게 들리는군요.”
용우는 그녀의 가설에서 상당한 설득력을 느꼈다.
인공적으로 각성자를 만들어내는 일은 제한된 소수의 인간들만을 대상으로 실험해서 성공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이미 성공 사례가 나왔을 테니까.
“박사님의 가설이 맞는다고 가정하면, 그들이 찾는 특이체질도 한 종류가 아닐 겁니다.”
“인공적으로 각성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인간과 당신이 싸운 하얀 갑옷이 될 수 있는 인간?”
“일단은. 그 외에도 뭔가 더 있을 수도 있겠죠.”
용우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놈들을 조사한 결과와 약에 대한 분석 데이터가 나오면 남김없이 알려주십시오.”
“거래겠죠?”
“예.”
“좋아요. 딜!”
권희수 박사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용우가 멀뚱멀뚱 보고 있자 시무룩해져서 손을 내린다.
그제야 용우는 그녀가 하이파이브를 원했음을 깨달았다.
‘아니, 대체 왜?’
알면 알수록 엉뚱한 사람이었다.
어쨌든 용우는 하얀 갑옷에 대한 정보를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 하얀 갑옷은 아티팩트 레플리카를 갖고 있었습니다.”
아티팩트 빙설의 창의 마이너 카피 버전처럼 보이는 창을 썼다는 사실을 알려주자 권희수 박사가 흥분했다.
“굉장해! 혹시 샘플 구했어요?”
“그놈이 자폭해 버려서요. 다시 들어가 보니 갑옷 파편 하나 안 남기고 깨끗하게 사라졌더군요.”
“아아아…….”
권희수가 실망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곧 그녀가 눈을 부릅뜨고 용우에게 말했다.
“혹시라도 샘플을 확보하면 꼭 가져와 주세요. 그리고 그 아티팩트의 마이너 카피를 통째로 확보한다면, 그건 제가 살게요. 엄청 비싸게 살 거니까 꼭 저한테 가져와요.”
“…….”
“저 돈 많아요, 엄청. 그리고 제 개인 자산으로 못 사면 국가 예산을 땡겨서라도 살 거니까!”
“…아, 네. 그러죠.”
그녀의 활활 타오르는 시선을 받은 용우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