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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분은 의외로 긴 시간이다.
특히 집중력을 유지한 채로 격렬하게 움직여야 할 때는 정말로 그렇다.
귀신같은 체력을 자랑하는 초일류 격투기 선수들이라고 하더라도 링 위에 올라가서 경기를 치를 때는 5분짜리 라운드 3회를 치르는 것만으로도 파김치가 되지 않던가?
각성자들의 몸도 성능이 좋을 뿐이지 인체의 기본적인 메커니즘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극한의 집중 상태로 15분 동안 전투를 치른다는 것은, 그들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한계까지 몰아넣는 일이라고 봐도 좋다.
“세상에…….”
“믿을 수가 없군.”
캠프에서 관측 장비로 상황을 지켜보는 이들은 다들 할 말을 잃고 있었다.
그들은 한국 헌터 업계 최상위급 부대다.
7등급 몬스터도 몇 번이나 잡아보았고, 초일류 헌터들이 믿을 수 없는 실력을 보여주는 장면도 몇 번이나 보아왔다.
그런데도 지금 전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믿을 수 없었다.
15분.
단 한 명의 헌터가 얼음용을 상대로 전투를 끌어온 시간이었다.
“얼음용의 허공장이 30% 밑으로 깎였습니다!”
“뭐?”
“벌써?”
다들 경악했다.
당초 계획한, 8명의 저격수와 서포트 팀의 화력을 집중하는 작전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공적으로 굴러갔어도 이것보다 3배 이상 오래 걸렸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페이스가 엄청나게 빨랐다.
본래는 저격수로 참전할 예정이 아니었던 용우가 작전을 완벽 그 이상의 것으로 만들었다.
“잡힐 듯 말 듯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용우는 얼음용을 유혹하듯이 500~700미터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저격을 가했고, 얼음용은 계속 미쳐 날뛰고 있었다.
그것으로 얼음용을 일정한 지역 내에서 빙글빙글 돌게 만들었으며, 또한 저격수들이 예정보다 훨씬 빠른 템포로 저격을 가해도 그들을 신경 쓰지 못하게 만들었다.
완벽하게 깔아준 판 위에서 8명의 저격수들은 그저 자리를 잡고 순차적으로 얼음용을 저격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다른 몬스터까지 잡고.”
뿐만 아니라 용우는 중간중간 다른 몬스터들을 덮쳐서 잡고 있었다.
그것은 에너지 드레인으로 마력을 보충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제로의 저격 횟수는?”
“얼음용을 때린 것만 37회입니다.”
“…….”
“중간중간 다른 몬스터와의 전투도 있었고, 저 공간 이동 스펠과 도약 스펠 같은 것들도 계속 쓰고 있지. 그런데 아직도 마력이 안 떨어졌다고?”
“하, 이런…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다 있어?”
이곳에 모인 이들은 한국 헌터 업계의 날고 긴다 하는 전문가들이다.
하지만 지금 전장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고스트…….”
문득 누군가 중얼거렸다.
“고스트를 봤을 때의 그 기분이군.”
물론 고스트는 훨씬 더 압도적이었다. 7등급 몬스터를 정면에서 힘으로 때려 부쉈으니까.
하지만 이해 불가능 한 수준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시간만 주어지면 용우는 혼자서 얼음용을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21분이 지난 시점에서, 용우가 무전에다 대고 말했다.
[서포트 팀, 벙커 버스터를 쓰겠다.]
서포트 팀이 술렁였다.
그것은 작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합의된 사항이었다.
작년, 대전 게이트에서 용우가 보여주었던 벙커 버스터 운용을 여기서도 도입해 보기로 한 것이다.
“진짜로 하는 건가.”
서포트 팀이 침을 꿀꺽 삼켰다.
예정보다 빠른 템포로 방아쇠를 당긴 저격수들은 슬슬 지쳐 있었다. 상대적으로 마력이 낮은 2명은 마력 고갈로 이탈한 상황이다.
아직 저격수들의 공격이 이어질 때 승부를 걸어야 한다.
작전은 종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 *
죽 전투를 지켜본 차준혁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여기까지 이렇게 쉽게 올 줄이야.’
처음부터 그가 움직이는 것은 작전의 종반이라고 결정되어 있었다.
아무리 그가 체외 허공장을 지녔고, 한국 최고 수준의 마력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얼음용의 허공장과 마력을 충분히 깎아내지 않으면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만큼 얼음용의 힘을 깎아내도, 최고 수준의 헌터가 아니면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죽을 수 있다.
인류에게 있어서 7등급 몬스터란 그런 존재였다.
‘내가 없었어도 넉넉하게 시간 내로 잡을 수 있었겠군. 어쩌면 저격만으로도…….’
팀 이그나이트 1부대의 전력을 최고조로 발휘해도 7등급 몬스터 사냥은 아슬아슬할 때가 있었다.
일단 게이트 브레이크까지는 제한 시간이 있었고, 또한 헌터들의 마력에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판을 짜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팬다 하더라도, 7등급 몬스터가 쓰러지기 전에 저격 가능 한 모든 인원의 마력이 바닥나 버릴 가능성도 있다.
만약 그런 상황이 일어나면 작전은 파탄 나고 만다.
7등급 몬스터는 그 강력함만큼 회복력도 강하다. 쉬지 않고 두들겨 대지 않으면 엄청난 속도로 회복해 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쉬지 않고 두들겨서 전력을 깎아내고 나면 돌입해서 결정타를 먹일 수 있는 스트라이커가 필요했고, 차준혁은 몇 번이나 그 역할을 수행해 왔다.
하지만 오늘은 과연 이 전투에 자신이 필요한지 의문이었다.
콰과광……!
먼 곳에서 폭음이 울려 퍼지면서, 차준혁이 있는 곳까지 공기가 뒤흔들렸다.
블링크로 하늘로 올라간 용우가 낙하하면서 날린 벙커 버스터가 작렬하는 소리였다.
곧 무전으로 경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음용의 허공장이… 뚫렸습니다.]
잠시 동안 무전은 누가 뭐라고 말하는 건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난리가 났다.
콰과아아아앙!
그리고 그러거나 말거나 재차 블링크로 고도를 올린 용우가 또 한 발의 벙커 버스터를 날렸다.
[제2격 명중!]
[얼음용의 코어 에너지 반응 27%까지 다운!]
[허공장에 구멍이 뚫렸습니다. 고속 복원 중!]
[현재 허공장 16%!]
서포터들이 바쁘게 보고하는 가운데, 용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트라이커, 진입합시다. 구멍을 복원하기 전에 끝을 내야 하니까.]
그 직후 용우가 차준혁의 옆에 나타났다.
차준혁은 전율을 느끼며 말했다.
“준비 완료입니다.”
“그럼 갑시다.”
M링크 시스템을 구동시킨 두 헌터가 전신에서 푸른빛을 발하며 얼음용에게로 쇄도했다.
쾅!
그리고 텔레포트하자마자 용우가 방아쇠를 당겼다.
허공장 복원 작업에 열중하던 얼음용의 머리통이 바닥으로 꺾였다.
파지지직!
약해진 얼음용의 허공장과 차준혁의 허공장이 마찰하면서 스파크가 튀었다.
그러나 아까 전, 일격을 먹이고 이탈했을 때에 비하면 웃음이 나올 정도로 압박이 약해졌다.
콰하하핫!
차준혁이 내려친 양손 대검에서 에너지 칼날이 뿜어져 나오면서 얼음용의 목을 베었다.
그러나 얼음용은 일반적인 생명체와는 다르다.
목을 벤다고 해서 죽지 않는다.
생명체를 시뮬레이션하는 같은 감각을 가졌기에 일순간 감각에 이상이 발생할 뿐.
그, 아, 아아아아아……!
잘린 얼음용의 목구멍에서 괴성이 울려 퍼졌다.
화아아아아악!
그리고 일순간 주변을 빙결시키는 한기 파동이 퍼져 나갔다
전 방향으로 발사된 한기 파동이 소리보다도 빠르게 주변을 휩쓸고 지나갔지만…….
“…이젠 버틸 만하군.”
차준혁은 허공장과 방어막 스펠을 중첩해서 그것을 막아내었다.
몸 위로 살얼음이 달라붙었지만 큰 타격은 아니다. 차준혁은 굳은 몸을 채찍질하듯이 외쳤다.
“하아아아아아!”
그리고 M-링크 시스템으로 증폭된 마력 파동이 뻗어나갔다.
양손 대검이 방금 전보다 더욱 강한 기세로 에너지 칼날을 분사, 그대로 얼음용의 몸통을 갈랐다.
콰아아아아아!
몸을 내던지는 듯한 일격으로 양손 대검이 부러져 날아갔다.
하지만 위력은 확실했다. 얼음용의 거대한 몸통이 갈라져서 그 안쪽의 에너지가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자.”
잠시 경직되어 있는 차준혁에게 용우가 태연하게 새 양손 대검을 건네주며 말했다.
“한 번 빠졌다가 들어오시죠. 3번 안으로 끝냅시다.”
그러는 용우 자신은 거대한 랜스 형태의 무기, 돌격창을 들고 있었다.
용우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차준혁은 지체 없이 몸을 돌려서 전력 질주하기 시작했다.
도약 스펠로 한 번에 십수 미터를 도약하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는 그의 뒤편에서 폭음이 울려 퍼졌다.
꽈아아아앙!
텔레포트로 하늘로 올라간 용우가 투척한 돌격창이 꽂히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들리는 순간, 차준혁은 곧바로 몸을 돌려서 다시금 뛰어들었다.
충격파와 파편을 뚫고 뛰어드는 그의 눈이 빛났다.
‘드러났다.’
마침내 얼음용의 거대한 몸에 감춰져 있던 코어가 드러났다.
두꺼운 암석과 얼음의 외피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코어의 빛을 본 차준혁은 주저 없이 모든 마력을 집중했다.
콰아아아아아!
폭음이 울리며 차준혁의 일격이 코어를 뚫고 들어갔다.
코어가 일격이 쪼개지면서 그 반동으로 차준혁의 몸이 반대편으로 튕겨 나왔다.
‘크윽……!’
반동이 너무 심하다. 이대로 가면 땅이나 암벽에 처박혀서 중상을 입는다.
-에어 브레이크!
튕겨 나가던 그를 격렬한 기류가 감싸서 감속시켰다.
그리고 그 스펠을 쓴 용우가 나타나서 그를 붙잡았다.
“3번이라고 말했을 텐데, 죽으려고 환장했습니까?”
용우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이유는 그가 대책 없이 전력으로 때리고 튕겨 나가서만은 아니었다.
화아아아아악!
얼음용 코어가 파괴된 직후, 갑자기 터져 나온 극저온의 한기 파동이 주변의 모든 것을 얼려 버렸기 때문이다.
투둑…….
허공장 바깥을 얼린 얼음이 깨져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차준혁이 말했다.
“당신이 막아줄 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몸에 부담이 누적되어서 변수가 생기기 전에 거기서 끝내는 게 최선이었습니다.”
“…….”
욱해서 반박하는 게 아니라 확신에 찬 차준혁의 말에 용우는 잠시 동안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당신… 순간예지능력이 있군요?”
“…….”
차준혁은 부정하지 않았다.
용우가 피식 웃으며 그를 놔주었다.
“어쩐지 쓸 만하다 했더니만.”
용우는 그와 호흡을 맞추면서 꽤 놀랐다.
차준혁이 치고 들어가는 타이밍은 마치 용우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는 것처럼 완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간예지능력이 있어서 그랬다면 납득이 간다.
각성자 중에는 아주 드물게 스펠이나 특성에 속하지 않는, 하지만 초능력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자들이 있다.
용우가 지닌, 자신을 향한 악의를 통찰하는 능력도 마찬가지다.
순간예지능력자는 어비스에도 희귀했다.
몇 초 앞을 본다.
그런 류의 능력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닥칠 일을 알게 되는 능력이다.
통찰이 극대화되었을 때 인간이 자신의 행동에 확신을 갖듯, 순간예지능력을 가진 자는 매 순간 위기와 기회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전투적으로는 엄청난 효율을 자랑하는 능력이다.
“그런 능력을 갖고도 용케 정신이 멀쩡하군요.”
하지만 이 능력이 쓸모 있는 것은 전투 상황 혹은 즉각적으로 덮쳐오는 위기 상황에 한정된다.
일상생활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못해 현재와 미래를 헷갈리게 만들어서 미치게 만들기에 딱 좋은 것이다.
“…당신, 정말로 내 능력에 대해서 아는군요.”
차준혁이 놀라면서 말했다.
용우는 더 말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수고했습니다. 돌아가죠.”
잠시 용우를 보던 차준혁은 결국 대화를 이어가길 포기하고 그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50미터급 게이트 제압 작전이 마무리되었다.
* * *
팀 이그나이트 본사 빌딩의 CEO실은 조용한 장소였다.
방음 설비가 과중할 정도로 잘되어 있어서 안에서 밖의 소리를 잘 들을 수 없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차준혁은 지친 기색으로 그 방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작전도 끝나서 피곤한데 굳이 저를 보셔야겠습니까, 선생님?”
차준혁은 사석에서는 다니엘 윤을 사장님이 아니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오래전부터 불러온 호칭이었다. 차준혁이 부모를 잃고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었던 시절, 다니엘 윤이 그를 거두어주었을 때부터.
“기억이 분명할 때 감상을 들어두고 싶어서 그랬다. 너는 기억력이 나쁘니까.”
“0세대 각성자는 대체 뭡니까?”
차준혁이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인간 개개인의 재능보다도 세대를 거듭할수록 높아지는 잠재력의 폭이 더 크다……. 이건 이미 검증된 사실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실제로 7세대부터는 아티팩트 같은 부러운 물건도 등장했고.”
“부러운가?”
“그럼 안 부럽겠습니까?”
차준혁이 정색하고 되묻자 다니엘 윤이 쿡쿡 웃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너는 부러워할 이유가 없잖아?”
“언젠가 선생님의 계약을 계승하게 되겠지만, 그건 지금은 아니니까요. 지금 당장 그런 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차준혁은 단순한 헌터가 아니었다. 인류를 수호해 온 비밀을 물려받을 자격을 가진 후계자였다.
다니엘 윤이 죽으면 구세록의 계약은 차준혁에게로 계승된다.
그것은 오래전부터 결정되어 있던 일이었다.
이런 조치는 다니엘 윤만의 것은 아니었다. 모두는 아니었지만 다른 구세록의 계약자 중에도 같은 조치를 취해둔 자들이 있었다.
다니엘 윤이 말했다.
“우리도 그에 대해서 아는 게 많진 않다. 일단 어비스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데이터가 없는 상태지.”
그들이 아는 것은 대실종으로 사라진 24만 명이 일종의 선행 부대 개념이었다는 것.
왜인지는 몰라도 그곳에서 죽을 운명이었다는 것.
그리고…….
“어비스에 소환된 24만 명의 희생이 성좌의 힘과 각성자 튜토리얼을 여는 기반이 되었다는 것.”
그것은 다니엘 윤이 용우에게 말하지 않은 사실이다.
그 희생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어떻게 성좌의 힘과 각성자 튜토리얼을 여는 기반이 된 것인지까지는 구세록의 계약자들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어비스에 소환된 24만 명은 모두 죽을 운명이었다는 점이다.
구세록은 생존자가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죽는 순간, 퍼스트 카타스트로피가 시작되었다.
인류의 상식은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구세록의 계약자들은 그 순간부터 성좌의 힘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차준혁이 말했다.
“…그러나 그는 돌아왔죠.”
“그래. 그는 구세록에 기록되지 않은 존재, 우리에게 있어서는 이레귤러다. 적어도 어비스에 대해서는 우리보다 그가 알고 있는 게 훨씬 많겠지.”
“혹시 꺼림칙하신 겁니까?”
사실 차준혁은 구세록의 계약자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지 않다.
다니엘 윤은 그에게 구세록의 계약자들의 실체를 알려주지 않았다.
자신의 정체와 의무를 알려주고 후계자로 삼았을 뿐.
차준혁은 다니엘 윤을 존경하는 스승이며 은인으로 여기고 있기에 그 사실에 대해 의문이나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언젠가 알게 될 것이라는 다니엘 윤의 말에 따라 기다릴 뿐.
“그보다는 난감한 상대라고 할 수 있겠지. 그는 많은 비밀을 감추고 있고, 그 비밀 중에는 탐나는 것들이 너무 많아. 예를 들면 그는 각성자에게 추가적으로 스펠을 터득하게 할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요? 그건 선생님도 못 하시는 거잖습니까?”
“그래. 성좌의 힘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지.”
스펠 스톤의 존재를 아는 것은 서용우의 여동생 서우희와 팀 크로노스의 사장 백원태뿐이다.
하지만 서용우가 돌아온 후 그의 여동생이 힐러로서 그 전까지 없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는 점만으로도 그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인류가 게이트 재해를 대하는 태도 그 자체를 바꿔 버릴 잠재력이 있는 인물이다. 그러니까 준혁아, 너는 결코 그와 적대하는 일이 없도록 해라.”
“결국 그 말씀을 하시려고 부른 거군요.”
“그렇지.”
다니엘 윤은 묘한 미소를 지은 채 차준혁을 보냈다.
* * *
차준혁이 가고 나서 잠시 후, 다니엘 윤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웬일이지, 카르타?”
상대는 구세록의 계약자 중 한 명이었다.
[윤, 왜 제로를 차준혁과 만나게 한 거지?]
그렇게 물은 것은 허스키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정보가 빠르군. 역시 미국의 실세다워.”
구세록의 계약자들은 정보 공간을 통해 상대가 세상 어디에 있든 서로 만나는 것처럼 통신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방식에는 큰 단점이 하나 있었으니, 그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을 구세록의 계약자 전원이 알게 된다는 점이다.
즉, 카르타가 굳이 전화라는 수단을 쓴 것은 다른 동지들에게는 알리지 않는 비밀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반대야.”
[무슨 뜻이지?]
“준혁이를 제로와 만나게 한 거다.”
[…….]
카르타는 그 말뜻을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더니 말했다.
[예상했겠지만 미국 정보부도 0세대 각성자의 존재를 알아차렸어.]
“당신이 귀띔해 준 건가?”
[아니. 그쪽에서 내게 와서 묻더군.]
그 말에 다니엘 윤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유통기한이 그리 길 수가 없는 비밀이었다.
제로가 작년 9월에 구 DMZ 전투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후로 8개월이 지났다.
그 비상식적인 활약은 업계에 파다하게 소문이 퍼진 상황이었고, 그 소문만 종합해도 제로의 정체를 추측해 볼 수 있었으리라.
제로의 정체가 용우임을 알아내는 것도, 한국을 예의 주시 하고 있고 여기저기에 끈을 만들어둔 미 정보부 입장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무엇보다 비밀이 유지되기에는 용우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너무 많다.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당시 헌터 관리부에 있던 인원들만 해도 수십 명.
거기에 백원태와 오성준, 다니엘 윤 등의 업계 주요 인물들은 모두 알고 있었고 백원태가 용우의 일을 처리해 줄 때 거기에 관여한 이들도 있지 않은가?
이쯤 되면 아무리 입단속을 해도 한계가 명확하다.
[조만간 접촉할 거야.]
“나는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간섭도 안 할 거다.”
[미국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군.]
“너도 똑같이 하길 추천하지.”
그렇게 말한 다니엘 윤이 화제를 돌렸다.
“카르타, 조만간 큰 게 하나 올 거야.”
[예지인가?]
차준혁에게 순간예지능력이 있는 것처럼, 다니엘 윤은 자신에게 찾아올 미래의 위험을 막연하게 예감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 능력은 위기 감지 측면에서는 대단히 정확하다. 예지라는 말이 어울린다.
하지만 다니엘 윤은 그 능력을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
현실에 눈치챌 수 있는 조짐이 드러나기 전에는 명확한 실체를 파악할 수도 없고, 벌어지기 전에 피할 수도 없다.
이미 정해진 운명을 경고받는다.
그렇게 설명해야 할 것 같은 능력이다.
“언제 어디에 올지는 나도 모르겠군. 하지만 상당히 두려운 것이 온다.”
[그렇게 표현할 정도라면, 8등급이 아니라 9등급일지도 모르겠군. 올해 안에 나온다면 2년 만인가.]
“가능성은 있지. 8등급으로 끝나길 바라지만…….”
현 시점에서 9등급 몬스터에 대한 인류의 답은 간단했다.
대적 불가.
영국, 아프리카, 그린란드, 중국…….
9등급 몬스터가 나타난 곳은, 인류가 잃어버린 땅이었다.
8등급조차도 어쩌지 못하는 상황에서 9등급 출현에 대비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9등급이 출현하는 순간 그 지역은 재해 지역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번에 9등급이 나온다면, 몇 명이나 싸우려고 할까?]
“그러는 카르타, 당신은 싸울 수 있나?”
[…….]
“브리짓에게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우리가 싸워야 한다.”
구세록의 계약자들에게조차 9등급 몬스터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적이었다.
인류의 역사는 지구상에 9등급 몬스터가 나타난 횟수를 4번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9번이었다.
구세록의 계약자들은 그중 7번을 맞섰다.
그들이 외면한 것은 2번이었다.
중국과 그린란드에서 출현했을 때.
그때는 전투를 포기하고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나도록 방치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출현한 것들과는 최선을 다해 싸웠다.
결코 쉬운 싸움이 아니었다. 4번은 승리했지만 3번은 패배하고 말았다.
그리고 3번의 패배는 그들에게 심각한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다.
아무리 그들이 강하고, 남들에게는 없는 권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 정신은 인간의 것이다.
그들은 게이트 안에서 죽은 인간의 시신에 ‘빙의’한다는 수단을 통해서 죽음의 리스크를 피한다.
그러나 생생하게 경험하는 전투 스트레스는 그들도 피할 수 없었다.
또한 타인의 시신에 빙의할 때마다 그들은 그 몸의 주인이 가졌던 강렬한 사념, 그리고 죽음의 이미지에 시달려 정체성을 위협받아야 했다.
무엇보다 빙의를 통해 구현된 성좌의 아바타가 파괴되면 그들 또한 죽음을 유사 체험 하게 된다. 그것을 몇 번이나 경험한 결과, 그들에게는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가 각인되었다.
인류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그들 역시 심각한 PTSD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적들은 우리보다 훨씬 위에 있다. 게임 감각으로 전투에 임할 수 있다니 부러운 놈들이야.’
용우가 한국 게이트 재해 연구소에 전달한 정보는 각 헌터 팀 수뇌부에도 전달되었다.
지휘관 개체와 군주 개체는 고통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로지 특정한 스펠만이 그들의 정신에 직접 상처를 입힐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를 마모시켜 가면서 싸우고 있는 구세록의 계약자들 입장에서는 정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카르타의 경우는 구세록의 계약자 중에서도 PTSD 증세가 가장 심한 인물이다.
정신이 더 이상 전투 스트레스를 버틸 수 없게 되었기에, 그녀는 이미 후계자에게 힘을 계승해 주고 전투를 맡기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다니엘 윤은 말끝을 흐렸다.
한참 동안이나 그가 말이 없자 카르타가 물었다.
[지금 하지 않은 말, 차준혁을 제로와 만나게 한 것과 관련이 있겠지?]
“글쎄.”
다니엘 윤은 애매하게 말하며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었다.
그리고 의자에 몸을 묻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눈치빠른 여자 같으니.”
카르타는 예전부터 그랬다. 짜증날 정도로 감이 좋았다.
“어쩌면 그때쯤… 혹은 그 전에 내가 죽을지도 모르지.”
그는 곧 닥쳐올 위협보다도 강렬하게 스스로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예감의 원흉은…….
‘제로.’
바로 용우라는 사실을, 이번에 만남으로써 확인했다.
“그와 나, 인류에게 필요한 쪽은 어느 쪽인가…….”
다니엘 윤은 자신이 그에게 죽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것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인생을 살아왔다. 그 사실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으면서도 다니엘 윤의 마음은 신기할 정도로 고요했다.
Chapter17 악마의 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