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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수는 대단한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추었다.
“혹시 ‘고스트’라고 알아요? 기밀 사항인데…….”
“압니다.”
“헌터 일 한 지는 얼마 안 됐는데도 아네요?”
권희수가 놀랐다.
일단 고스트에 대한 정보는 기밀 사항으로 지정되어서 함구령이 내려져 있었다.
하지만 아는 사람이 많다 보니 업계인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 취급을 받는다. 그래도 출현 빈도가 갈수록 줄어들다 보니 업계 경력이 짧은 사람들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어쨌든 설명할 게 줄었네요. 그거랑 비슷한 경우라고 보고 있어요.”
“외계의 무언가의 의식이 휴머노이드 타입 몬스터에 빙의된 것이 지휘관 개체다?”
용우의 말에 권희수가 기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학자가 세운 가설치고는 너무 오컬트스러운 거 아닙니까?”
“12년 전만 해도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픽션 속에서나 벌어질 일이었죠. 지금 말한 것도 충분히 현실성이 넘친다고요?”
“하긴.”
용우는 인정했다. 확실히 지금의 시대는 그가 실종되기 전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픽션 속 세상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당신에게 협력을 요청하고 싶어요.”
“협력?”
“앞으로 게이트 안에서 지휘관 개체와 조우할 경우 최대한 많은 대화를 나눠서 정보를 끌어내 줄 것. 텔레파시 능력자는 희귀하고, 한국의 현역 헌터 중에는 당신을 포함해서 3명뿐이에요. 그중에서 코어 몬스터와 대화가 가능한 상황을 만들 수 있는 것, 즉 근접전을 벌일 수 있는 능력자는 당신뿐이죠.”
“연구자에게 필요한 일이라는 것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전장에서 싸우는 헌터 입장에서 그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요구인지는 알고 있습니까?”
“알아요. 전술적 위험을 감수하고 데이터를 모아달라는 뜻이죠.”
겉모습은 전혀 그래 보이지 않지만, 권희수 박사는 1세대 각성자로서 전투 경험이 있는 인물이었다. 자신의 요구가 헌터들에게 어떤 의미로 들릴지 이해하고 있었다.
“공짜로 해달라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대가를 준비했는데, 한번 보고 생각해 줄래요? 따라와 보세요.”
권희수 박사는 용우를 데리고 다른 연구실로 향했다.
같은 사람이 총괄한다는 느낌이 전혀 안 들 정도로 분위기가 다른 연구실이었다. 기계들이 잔뜩 널려 있고 엔지니어들이 증강 현실 고글로 입체 도면을 보면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 연구실의 한쪽 벽에는 각성자용 무기들이 보였다. 다만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양산품이 아니라 이 연구소에서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프로토타입들이었다.
용우에게 있어서는 흥미롭긴 하지만, 그뿐인 물건들이다.
모든 각성자 장비는 소모품이다.
칼이나 창 같은 근접전용 장비도 마찬가지다. 사용할 때마다 마력에 반응하는 특수 코팅이 열화되어서 금세 교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용우가 딱히 오리지널 장비를 원하지 않는 이유였다.
얼마든지 대체품을 구할 수 있는 규격품을 선호하기에 굳이 공방을 소개해 주겠다는 백원태의 제안도 거절한 것이다.
“이거예요.”
권희수가 가리킨 것은 헌터용 배틀 슈트였다.
덜 완성되어서 약간 러프해 보일 뿐, 특별한 구석은 없어 보이는 물건이다.
“아직 상용화되지 않은, 우리 연구소에서 개발한 신기술 ‘M-링크 시스템’이 적용된 스페셜 배틀 슈트예요. 이미 2,000시간의 테스트가 이루어져서 실전 투입만 남은 1차 완성형 프로토타입이죠. 이걸 제공해 드릴 테니 아까 전의 부탁을 들어주세요.”
의기양양해 보이는 권희수 박사의 제안에, 용우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됐습니다.”
“…네?”
권희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됐다고 했습니다만.”
“왜, 왜요?”
권희수가 당황했다.
설마 거절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는 태도였다.
그럴 만도 하다. 권희수는 마력 연구의 최고 권위자이며, 그녀가 발표하는 성과가 곧 각성자 장비의 최신 트렌드가 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사람이 최신 연구 결과를 투입한, 아직 상용화되지도 않은 비장의 무기를 선물하겠다는데 필요 없다고 하는 헌터가 누가 있겠는가?
“전 대체품 없는 커스터마이즈 장비는 질색입니다. 장비는 성능보다도 얼마든지 교체할 수 있고, 신뢰성이 검증된 양산품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주의라서요.”
“…….”
“하지만 박사님 부탁은 가능한 한 들어드리겠습니다. 앞으로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은 동의하니까요.”
용우는 자기 입장에서는 큰 호의를 보였다. 권희수 박사의 업적이 존경할 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희수는 그 말이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말했다.
“한번 써봐요.”
“네?”
“M-링크 시스템 한번 써보기라도 해봐요. 써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예요.”
“아니, 저는…….”
“진짜로. 절대 보장.”
“그러니까…….”
“써봐요.”
권희수가 용우의 손을 덥석 잡고 말하는데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살짝 멍해 보였던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라 용우도 움찔했다.
‘뭔가 눌러서는 안 되는 스위치를 눌러 버린 것 같은데, 이거…….’
거절했다가는 무슨 반응이 나올지 살짝 무섭다.
용우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한번 써보기는 하죠.”
“장 팀장님, 건틀릿 하나만 가져와 주세요. 가득 채운 걸로요.”
권희수가 기다렸다는 듯 연구원 하나를 돌아보며 외쳤다.
그러자 중년 남자 연구원이 주변에 널브러져 있던 장갑 하나를 가져왔다.
배틀 슈트의 형태로 완성된 것과는 달리 도색이 안 되어서 러프한 느낌이 물씬 드는, 팔꿈치 아래까지를 덮는 특수 소재 장갑이었다.
일반적인 배틀 슈트의 장갑 파트와 다른 점이라면 등 부분에 납작하고 투명한 원형 파트가 붙어 있다는 것?
“껴보세요.”
용우는 떨떠름한 기색으로 그것을 끼우자 권희수가 말했다.
“마력 발현해 보세요.”
용우가 그 말에 따르자 권희수가 팀장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팀장이 원격으로 장갑에 명령어를 입력했고…….
‘뭐야, 이건?’
저출력으로 마력장을 유지하던 용우가 깜짝 놀랐다.
손등에 붙어 있는 원형 파트에 푸른 액상 물질이 흘러들어 오더니 용우의 마력과 반응했다. 그리고 마력장의 기세가 폭증하는 게 아닌가?
그렇다고 용우의 마력 소모도가 높아지거나 마력 기관의 부하가 강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용우는 조금 전처럼 저출력으로 마력장을 유지할 뿐인데 장갑을 중심으로 출력이 2배 가까이 증폭되고 있었다.
“M-링크 시스템이라는 게, 배틀 슈트에 장착해서 개인의 마력을 증폭하는 기술입니까?”
“어때요? 좋죠?”
“…….”
대답 대신 눈을 반짝거리며 묻는 권희수의 물음에 용우가 움찔했다.
“음, 인정합니다. 좋군요.”
“봐요. 써보면 생각이 바뀔 거라고 했잖아요.”
“확실히…….”
용우도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을 정도로 대단한 기술이었다.
스펠의 위력을 단발적으로 증폭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일정 시간 동안 헌터의 마력 자체를 폭발적으로 증폭할 수 있다니?
권희수가 의기양양해하며 말했다.
“효과는 보신 바와 같아요. 운용비 문제가 걸림돌이 되고 있지만 그것도 결국은 해결될 거예요.”
“제작 단가가 아니라 운용비가 문제라고요?”
“물론 제작 단가도 비싸지만 마력 증폭 시에 소모하는 소모재의 가격도 만만치 않거든요. 단가가 같은 용량의 마력 포션보다 30배 이상 높아요. 그걸 전투 때마다 지속적으로 소모해야 하니까…….”
“…그 정도면 확실히 헌터 팀 입장에서는 부담스럽겠군요.”
용우는 납득했다. 그런 비용을 감수할 수 있는 헌터 팀은 극소수일 것이다.
“하지만 그 문제도 해결할 수 있어요. 그 건틀릿처럼 헌터의 포지션에 따라서 부분적으로 적용하는 특화 파츠도 개발 중이고. 어쨌든… 기왕 이렇게 된 거, 풀 세트도 한번 착용하고 시험해 보지 않으실래요?”
생글생글 웃는 권희수 박사의 물음에 용우는 잠시 갈등했다.
자신의 주의에 반하는 장비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거절하기에는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출력 그 자체를 보완하는 부스터라니.’
증폭 탄두나 마력 코팅과는 또 다르다. 사용자의 마력 그 자체를 증폭시키는 것이라 헌터용 장비를 쓰면 2중 증폭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좋습니다.”
거절하기에는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어비스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대단한 기술의 정수.
용우는 그 유혹을 거부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 *
권희수 박사가 작전 지역에 나오는 일은 드물었다.
아니, 그녀는 애당초 연구소에서 나오는 일이 별로 없었다.
연구소 부지에 그녀를 위한 거처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고, 원하는 것은 인터넷 쇼핑이나 전화 한 통만 넣으면 다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거처까지 가는 게 귀찮다고, 혹은 연구로 밤을 지새우느라 연구실에서 자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워커 홀릭에 방구석 폐인을 더해놓은 것 같은 행동 패턴이다.
“아, 바깥공기 오랜만에 맡네요.”
그런 그녀가 연구소 밖으로 나온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곧 한국 기업들을 통해 실전 투입될 M-링크 시스템이 적용된 배틀 슈트의 실전 테스트가 이루어지기 때문이었다.
“운이 좋았어요. 2명이나 실전 테스트를 할 수 있다니.”
M-링크 시스템이 적용된 배틀 슈트, 통칭 M슈트는 이미 2,000시간의 테스트를 마친 물건이다. 테스터로 일해준 4명의 헌터는 모두 국내 최정상급 혹은 슈퍼 루키로 불리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최근 또 한 명이 다른 테스터들과는 달리 실전 테스터로 영입되었다.
“어떻게 제로를 설득했습니까?”
그렇게 물은 것은 팀 블레이드의 사장 오성준이었다.
팀 블레이드 1부대에는 M-링크 시스템 테스트에 참가한 테스터가 있었다. 그리고 이번 작전이 실전 테스트가 될 것이다.
지휘관 개체라는 새로운 위협이 나타난 현재, M슈트는 대단히 매력적인 위기 대응 수단이었다. 하루 빨리 개발을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 오성준의 생각이었다.
“그야 M-링크 시스템을 보고 반하지 않을 헌터가 있을 리가 없잖아요. 내 야심작인데.”
“…….”
오성준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권희수는 그보다 10살은 연하였지만 1세대 각성자라는 점과, 마력 연구의 최고 권위자라는 점 때문에 누구도 그녀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이렇게 나사 빠진 소리를 할 때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참 난감하다.
‘이런 때는 백원태 그놈한테 떠넘기는 게 최고인데…….’
백원태는 사석에서는 장난기가 있는 성격이라 권희수와 죽이 잘 맞았다.
하지만 이곳은 어디까지나 팀 블레이드가 게이트 제압 작전을 맡은 지역이다. 백원태가 와 있을 이유가 없었다.
권희수가 전술 데이터를 살펴보았다. 그녀는 연구자이면서도 최신 전술 데이터도 어렵지 않게 이해하는 군사 지식과 전투 경험의 소유자였다.
“오우거군요.”
문 안쪽과 시간 차를 두고 갱신되는 정찰 데이터에 오우거가 추가되었다.
휴머노이드 타입이 있다는 것은 지휘관이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나온다면 35미터급에서는 2번째네요.”
“한국에서는 처음입니다.”
“일본도 꽤 큰 피해를 내가면서 처리했었죠?”
일본 또한 헌터 선진국이다. 지금은 폐허가 된 도쿄에서 게이트 브레이크로 등장한 7등급 몬스터까지도 처리해 낸 강력한 헌터 팀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조차도 35미터급에서 지휘관이 등장하자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안 될 겁니다.”
오성준은 자신 있게 말했다.
이제 지휘관은 미지의 위협이 아니다.
그리고 이번 작전에 투입되는 팀 블레이드의 1부대는 한국 최강을 논할 때 반드시 후보에 오를 정도의 최정예였다.
지난번에 용우가 도왔던 2부대와는 각성자 전력 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다.
‘굳이 제로를 투입할 필요도 없지.’
부대 구성도 완벽하다. 배틀 힐러는 없지만 대신 서포터 팀과 함께 문 안으로 진입해서 빠른 대응이 가능한 힐러도 2명이나 있으니까.
이런 부대에 제로의 존재는 불필요하다. 굳이 제로가 필요해진다면 그것은 이 부대조차 감당 못 할 변수가 등장했을 때일 것이다.
그렇지 않은데도 제로를 부른 것은 헌터 관리부의 요청, 정확히는 권희수 박사의 요청 때문이다.
지휘관 개체와 한마디라도 대화를 나눠서 정보를 얻어내야 한다. 그런 이유로 제로가 투입된 것이다.
“그런데 불확정 요소가 많은 상황에서 이 작전 목표는 너무 높게 잡으신 거 아닌가요?”
문득 권희수 박사가 물었다.
1부대의 작전 목표는 게이트 제압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필수 달성 목표에 불과했다.
그들의 진짜 목표는…….
“지휘관 개체를 포획해서 게이트 브레이크 때 데리고 나온다니, 성공한다면 정말 환상적이겠지만요.”
게이트 안에서 지휘관 1개체를 포획하고 다른 모든 몬스터를 섬멸하는 것.
그리고 그대로 시간을 보내서 게이트 브레이크를 일으킴으로써 지휘관 개체를 연구소에 제공하는 것이었다.
성공한다면 엄청난 업적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어려운 목표가 아닐까?
“물론 과욕을 부릴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지켜봐 주시지요.”
오성준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한국 최고의 헌터 부대의 실력을.”
이 자리에 백원태가 있었으면 맹렬하게 반박했을 이야기를 하면서.
Chapter14 군주라 칭하는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