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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등급 몬스터, 암흑거인.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피는 없다. 살도 없다. DNA도 없다.
있는 것은 그저 물리적 질감을 갖도록 변형된 에너지 덩어리일 뿐.
생물학뿐만 아니라 퍼스트 카타스트로피 이전의 과학 이론으로는 이 존재를 설명하는 게 불가능했다.
아아아아아……!
그 괴물의 얼굴에 마치 어린아이가 낙서한 것 같은 눈코 입이 나타난다. 벌려진 입에서 노랫소리처럼 들리는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콰아아아아아!
그 몸을 감싸고 있던 어둠의 부피가 수천 배로 폭증했다.
마치 물이 일순간에 기화되는 수증기 폭발과도 비슷하다. 일순간의 폭발력만으로도 주변을 휩쓸어 버릴 수 있다.
이 어둠 폭풍이 수증기 폭발과 다른 점은 불가사의한 오염을 일으킨다는 데 있었다.
폭발에 휘말린 것들이 부서지면서 어둠 그 자체로 변해 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어둠이 다시 암흑거인에게로 흡수되어서 손실된 에너지를 보충한다.
그런데 그 어둠을 뚫고 나아가는 존재가 있었다.
환하게 불타오르는 빛이 어둠을 갈가리 찢는 가운데 순백의 갑옷을 입은 존재가 위풍당당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슬슬 지겹군. 이 전투가 지겨운 반복 작업에 불과하다는 걸 이해해 주지 않겠나, 몬스터?>
목소리 대신 정신파로 말하는 그 존재는 과장되고 화려한, 마치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 같은 디자인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순백의 표면 위로 황금과 백은으로 복잡한 패턴의 무늬를 양각(陽刻)해 넣은 데다가 머리에는 날개 모양의 장식이 조각되어 있다.
우우우우우!
그리고 그 손에는 눈부신 빛을 발하는 검이 들려 있었다.
-용참격(龍斬擊)!
검날을 휘감고 타오르는 섬광이 순식간에 거대해져 간다. 길이만도 20미터가 넘는 빛의 검이 암흑거인을 가르고 지나갔다.
흐아아아아아!
그 일격은 암흑거인의 허공장을 뚫고 암흑거인의 본체까지 갈라 버렸다. 어둠 그 자체로 이루어진 거인의 실루엣에 눈부신 빛의 궤적이 그어져 있는 광경은 몽환적이기까지 했다.
가아아아아아!
그러나 암흑거인은 죽지 않는다.
순식간에 그 덩치가 수축되면서, 다른 곳을 이루고 있던 어둠이 상처 부위를 메꿔 버렸다. 갈라졌던 허공장 역시 복구되었다.
이미 몇 번이나 반복된 패턴이다. 그 결과 30미터를 넘었던 암흑거인의 키가 18미터까지 줄어들었다.
콰과과광!
순백의 고스트가 연달아 공격을 가한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거대한 빛의 칼날이 쏘아져 나가고, 원거리 공격 스펠이 연속적으로 폭발한다.
도저히 단 한 명이 가하는 공격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압도적인 폭력이다.
인류가 사냥할 수 있는 한계점이라고 불리는 7등급 몬스터를 일방적으로 두들겨서 침몰시켜 가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아!
그 전투 과정을 지켜보면 암흑거인이 내지르는 소리는 더 이상 공포스러운 포효가 아니다. 애처로운 비명이 불과했다.
덩치가 17미터까지 줄어든 암흑거인이 재차 어둠 폭풍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염동염마탄(念動炎魔彈)!
고열을 응축한 붉은 에너지탄이 날아와 암흑거인의 머리를 때렸다.
콰아아아앙!
폭음이 울리며 암흑거인이 옆으로 기우뚱했다.
그리고 한 발로 그치지 않는다.
꽝! 꽈광! 꽈아아앙!
연속적으로 날아든 에너지탄이 암흑거인의 머리통을 부수고 어둠으로 이루어진 거체를 옆으로 주저앉혔다.
순백의 고스트가 고개를 돌렸다.
<그래. 허공장도 너덜너덜하게 만들어놓은 타이밍이면 그 정도 위력으로도 정타로 꽂히는군.>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소총을 든 용우가 서 있었다.
용우가 순백의 고스트를 노려보며 말했다.
“광휘의 검.”
꿈에도 잊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어비스에서 인간의 목숨을 대가로 삼아 전장에 강림했던 성좌의 아바타.
그중에서 순백의 고스트는 광휘의 검이라 불리는 성좌에서 내려온 자였다.
<0세대 각성자.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반갑군.>
“나를 아나?”
<물론 알고 있다. 대실종의 유일한 생존자. 어비스의 귀환자.>
“…….”
용우가 탐색하듯 순백의 고스트를 바라볼 때였다.
구과과과과과!
그새 머리를 복원하고 일어난 암흑거인이 공격을 가해왔다.
광풍이 주변을 휩쓸면서 어둠이 안개처럼 퍼져 나간다.
그리고 그 속에서 무수한 괴물의 실루엣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암흑거인의 또 다른 능력, 그림자 군단이었다.
“짜증 나는군.”
용우가 노골적으로 투덜거리면서 소총을 갈겼다.
그러나 그의 총구가 향한 곳은 그림자 군단이 아니다.
퍼엉! 퍼어어어엉!
그림자 군단을 싹 무시하고 암흑거인 본체를 때리고 있었다.
그림자 군단이 그런 용우를 향해 쇄도하지만 무의미했다.
용우는 그들을 놀리듯이 블링크로 위치를 바꿔가면서 계속 암흑거인 본체를 때렸다.
위력적인 원거리 무기와 공간 이동이라는 최고의 회피 수단을 가졌는데 굳이 눈앞의 적들에게 집착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0세대 각성자, 멀리 떨어지도록. 끝을 내겠다.>
거듭 타격을 입은 암흑거인의 덩치가 10미터까지 줄어들자 순백의 고스트가 말했다.
그가 광휘의 검을 들어 올리자 사방을 찍어 누르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마력 파동이 퍼져 나갔다.
‘이 출력은……!’
용우는 전율했다.
순백의 고스트가 발하는 마력 파동은 이미 인류의 한계라고 일컬어지는 페이즈12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6등급… 아니, 어쩌면 7등급 몬스터 이상일지도 모른다!
‘이 정도면 막바지의 우리들에게도 필적하는 수준이다. 하지만…….’
용우는 어비스의 기억을 되새기며 눈살을 찌푸렸다.
-선다운 버스트!
용우가 위험을 감지하고 연속 블링크로 물러날 때, 하늘에서 한 줄기 가느다란 섬광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섬광이 암흑거인에게 닿는 순간…….
콰아아아아아아!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섬광이 대폭발을 일으켰다.
* * *
잠시 동안 모든 무전이 침묵했다.
20초가 지난 후에야 잔뜩 노이즈가 낀 무전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직……. 부유 중계기 3, 4번 침묵. 추락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지직…….]
[암흑거인… 지지직… 코어 에너지 반응 소멸… 지지지지직!]
[바, 방금 전… 지지직… 대체 뭐… 지지지직!]
물리적으로만 봐도 벙커 버스터의 위력을 훨씬 능가하는 대폭발이었다.
그런데 그게 스펠을 발동한 결과물이라 암흑거인을 끝장 내버렸으니 기가 막힌다.
쿠구구구…….
용우는 움푹 파인 지형으로 들어가서 충격파와 후폭풍을 피했다.
그리고 다시 지상으로 올라와 고스트를 찾았다.
‘데이터 네트워크도 회복되려면 좀 시간이 걸리겠군.’
무전만이 아니라 전술 데이터를 전송하는 네트워크 자체가 회복까지 시간이 걸릴 모양이다.
용우는 어쩔 수 없이 마력 소모가 큰 광역 탐지 능력을 발해서 순백의 고스트의 위치를 찾았다.
‘찾았다.’
순백의 고스트는 폭심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용우가 텔레포트로 나타났을 때, 그는 암흑거인의 코어를 아공간에 집어넣고 있었다.
‘시공의 보물고도 갖고 있군.’
용우가 그 사실을 확인했을 때 그가 말했다.
<여긴 아직 위험한데.>
확실히 폭심지에서 가까운 지점이라 열기가 끓어오르고 폭연이 자욱했다. 일반인이라면 여기로 텔레포트해 온 시점에서 피부가 익어버리고, 호흡기가 불타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용우는 헌터용 배틀 슈트로 전신을 감싸고 있는 데다 허공장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었다.
여러 차원에 걸쳐 있는 허공장의 효과는 일종의 현실 왜곡에 가깝다. 허공장만 펼치고 있으면 어떤 환경에서도 생존이 가능한 것이다.
8등급 이상의 몬스터들이 핵폭탄 혹은 레이저 수소폭탄을 맞고도 끄떡없는 것도 그래서였다.
“너희들은 누구지? 성좌의 아바타와 어떤 관계냐?”
<나야말로 물어보고 싶군. 0세대 각성자, 너는 누구지? 어떻게 어비스에서 돌아왔나?>
“…….”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받은 용우의 전신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순백의 고스트가 한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나는 너와 적대하고 싶지 않군. 우리의 목적은 몬스터로부터 인류를 지키는 것이고, 너는 그 목적에 큰 도움이 될 인물이니까.>
“인류를 지킨다라… 거창한 이유를 대는군.”
용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전신에서 일어났던 살기는 거짓말처럼 날카롭게 갈무리되고, 냉정을 되찾은 눈이 순백의 고스트를 관찰한다.
참으로 겉이 번드르르한 이야기다.
그러나 용우는 순백의 고스트가 저런 말을 할 자격은 있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들이 지난 13년간 역사의 이면에서 인류의 파멸을 막아왔다는 것만은 사실이니까.
순백의 고스트가 검지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좋아. 적의를 갖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는 의미에서, 한 가지 질문에는 답해주겠다.>
“어비스에 대해서 뭘 알고 있지?”
<이 모든 전쟁의 시작이다.>
“전쟁의 시작?”
예상치 못한 대답에 용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자세하게 알지는 못한다. 아마 네가 더 잘 알겠지.>
“…….”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그곳이 전장이었다는 것. 그리고 너희들이 어비스에서 싸운 것들은, 지구가 맞닥뜨리게 될 재앙들이었다는 것이다.>
“뭐?”
용우가 깜짝 놀랐다.
<대실종의 실종자들은 몬스터들이 게이트라는 현상을 통해 지구에 도달하기 전에 요격하기 위해 투입된 선행 부대였던 셈이다. 당신들이 어비스에서 해치운 만큼 지구에 도달한 몬스터의 수가 줄어들었다.>
“…….”
용우는 충격으로 할 말을 잃었다.
어비스에서의 싸움에 그런 의미가 있었단 말인가?
‘그래서 철저하게 전투 자원으로 소모된 건가?’
지구로 향하는 몬스터 군단을 하나라도 더 처치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건 누가 결정한 거지?”
<우리도 모른다.>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믿든 안 믿든 그건 너의 자유다. 하지만 나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계로부터 전해진 성좌의 힘에 선택받아 구세록의 예언을 행하고 있을 뿐.>
“구세록?”
순백의 고스트는 거기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각성자 튜토리얼에 소환되는 이들이 특정한 인간의 의지가 선택한 자들이 아니듯, 대실종으로 어비스로 사라진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들이 소환되는 인간의 선별과는 관계가 없음을 강조했다.
<구세록의 예언에는 아무도 돌아오지 못할 싸움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는데 네가 돌아왔지. 우리는 그 사실에 놀라고 있다.>
“…….”
<우리는 너를 지켜볼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순백의 고스트가 사라졌다.
용우는 그가 텔레포트로 사라졌음을 알고 주변을 탐지해 보았다.
‘저긴가.’
이렇게 쉽게 보내줄 수는 없다.
용우는 그런 생각으로 곧바로 텔레포트를 써서 따라갔지만…….
“이런 식으로 출현하고 사라지는 거였나.”
순백의 고스트가 입고 있던 갑옷이 조각조각 부서져서 허공으로 흩어져 가고, 대신 거기에 피투성이가 된 남자의 시체가 무너져 내리듯 쓰러졌다.
7등급 몬스터인 암흑거인을 처치한 시점에서 자신의 일을 다 했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굳이 텔레포트로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이동한 것은 용우를 피하기 위한 목적과, 시신을 더 이상 훼손시키지 않고 온전히 돌려주기 위함이었다고 추측되었다.
‘아무래도 전장에서 꼬리를 잡긴 어렵겠군. 제압해 놓고 접촉해서 조사해 보지 않으면 연결 고리를 추적하는 건 안 될 것 같은데.’
용우는 허공으로 흩어져 소멸하는 고스트의 기척을 보며 생각했다.
“설령 우리의 싸움에 그 어떤 숭고한 의미가 있었다고 해도…….”
순백의 고스트가 말해준 어비스의 의미가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그에게서 하나라도 정보를 캐내기 위해 억누르고 있던 분노가 맹렬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구구구구구……!
용우의 감정에 호응한 주변이 들썩거린다.
“그건 24만 명을 지옥으로 처넣고 어디선가 구경하면서 웃고 있었던 개자식이 멋대로 부여한 의미일 뿐이다. 우리들은 누구도 그런 걸 바라지 않았어……!”
저편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용우의 눈에는 용암처럼 뜨거운 분노가 흐르고 있었다.
그곳은 지옥이었다.
모두가 죽어가야만 하는, 그리고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세계였다.
‘반드시 찾아내서 죽인다.’
설령 그 대가로 세상이 멸망한다 해도, 용우는 그렇게 하고 말 것이다.
[제로, 응답하라.]
분노에 빠져 있던 용우를 일깨운 것은 지휘부에서 날아든 무전이었다.
“여기는 제로. 듣고 있다.”
용우는 지휘부의 요청을 받으면서 문득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그런데 그놈의 기척은 분명히 어디선가…….’
순백의 고스트의 기척은 낯설지가 않았다.
그리고 용우가 낯설지 않다고 느꼈다면 그 이유는 두 가지다.
기척이 닮은 누군가를 만났거나, 혹은…….
Chapter13 1세대 각성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