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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원태가 눈살을 찌푸렸다.
“몬스터 말입니까?”
“우리는 그렇게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저 어비스의 괴물이라고 불렀지요. 하지만 그것들이 몬스터와 동일한 존재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며칠 동안 용우는 인터넷에 존재하는 몬스터에 대한 자료들을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그 결과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어비스의 괴물과 몬스터는, 완벽하게 같은 존재들이다.
“현재 출현한 몬스터들에 대한 자료들을 검색해 봤는데… 전부 다 제가 아는 것들밖에 없더군요. 외형이나 특성은 물론이고 이름까지 똑같이 명명되어 있는 걸 보면 좀 웃겼습니다.”
“그 말은… 어비스와 각성자 튜토리얼의 데이터베이스는 같다는 뜻이군요?”
“예.”
몬스터의 이름은 인간이 붙인 것이 아니다.
각성자들이 각성자 튜토리얼에서 제공받은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던 것이다.
공부해서 아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몬스터가 출현하는 순간 각성자들은 그것의 등급과 이름을 마치 예전에 공부했다가 잊고 있었던 내용처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같은 존재들이 만들었지만 목적이 달랐다…….”
“그럴 겁니다. 어비스에서는 인간을 살려서 지구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의지를 전혀 느낄 수 없었으니까요.”
그러기는커녕 인간을 철저하게 소모품으로 규정하고, 남김없이 소모해 버려야 한다는 강박적인 악의가 느껴졌다.
용우가 생각하기에 어비스의 각성자들이 괴물과 싸우는 것을 강요받는 상황에서도 서로를 죽이게 된 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처음부터 그렇게 되도록 설계된 필연이었다.
또한 마지막 전투에 용우 혼자만이 남은 것도 마찬가지다.
‘마지막 전투.’
용우가 그 사실을 통지받은 것은 전투 직전이었다.
즉, 용우를 제외한 나머지가 몰살당한 바로 전의 전투에서도 다음 전투가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만약 그 전에 알았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최소한 바로 전의 전투에서 몰살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골인 지점이 존재한다는 것으로도 희망을 얻었을 테니까.
그때까지의 원한 관계 따위는 접어둔 채로 협력해서 마지막 전투에 도전할 수 있었을 터.
‘하지만 알려주지 않았다. 마지막 한 사람이 남았을 때에야 다음 전투가 마지막이라고 통지하다니 얼마나 공교로운 일인가? 그게 우연이었다고 믿으라고?’
용우는 확신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결정되어 있었다고.
어비스에서의 여정에 끝이 정해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생존자가 단 한 명만 남으면 그다음 전투가 끝으로 설정되는 것으로.
그리고 절대 이길 수 없는 전투에 마지막 생존자를 내던져서 죽여 버림으로써 ‘모든 전투 자원을 소모하는 것’이 어비스의 목적이었으리라.
“유정이가, 그 아이가 그런 곳으로 끌려가서 죽었다니…….”
백원태가 격해진 감정에 몸을 떨었다.
정말로 사랑스러운 조카였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고, 위험이 닥친다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죽었다.
백원태의 눈이 미치지 않고, 손을 뻗어줄 수도 없는 곳에서 홀로 무서워하며 죽어갔을 것이다.
백원태는 그 사실을 참을 수가 없었다.
드드드드드…….
강한 마력을 지닌 백원태가 감정을 주체 못 하자 주변의 사물들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진정하시죠.”
하지만 용우가 한마디 하자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듯 백원태가 정신을 차렸다.
“…미안합니다. 감정이 격해져서 그만… 자제하지 못했군요.”
“괜찮습니다. 그 심정, 조금이나마 이해합니다.”
용우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정말 증오해 마땅한 것은 괴물이 아니다.’
지구로 돌아와서 15년간 일어난 일들을 안 용우는 한 가지 확신을 품게 되었다.
‘괴물 뒤에 있는 누군가의 의도, 선의를 가장해 인간을 지옥으로 처넣고자 하는 놈이다.’
그리고 어비스에 용우를 처넣었던 자와 세상을 이 모양으로 만든 자는 동일할 것이다.
용우는 반드시 그자를 찾아서 죽여 버릴 것이라고 맹세했다.
“차라리 어비스라는 곳이 각성자 튜토리얼 같은 곳이었다면… 그런 곳에서 죽었다면…….”
각성자 튜토리얼에는 위기에 처한 세상을 구하기 위한 존재를 만들어낸다는 대의명분이 존재한다.
그것을 만든 자들이 누군지도 모르고, 따라서 그들의 진정한 의도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인류는 각성자 튜토리얼에 그런 의미를 부여하고 희생자들의 죽음에 가치를 부여해 왔다.
그에 비해 어비스에서의 죽음에는 그런 의미를 부여할 수가 없다.
그것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비인간적인 악의에 삼켜져 버린 죽음이었다.
“그랬다면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용우는 일그러진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인류를 위한 가치 있는 죽음이니까, 죽은 사람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납치당해서 죽어갔어도 숭고한 희생이었다면서… 당신은 그렇게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아니요.”
백원태가 울분을 씹어서 뱉어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지요. 유정이가 죽었는데 그딴 식으로 납득할 수 있을 리가 없어.”
“나도 그렇습니다.”
용우의 말에 백원태가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비친 용우는 마치 악귀처럼 무섭게 웃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 그런 일을 할 겁니다. 몬스터와 싸워서 인류를 지킨다…….”
지금까지 모든 헌터들이 해온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부차적인 일입니다. 나는 반드시 이 모든 일의 원흉을 찾아내서, 그들이 누리던 모든 것을 빼앗고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죽여 버릴 겁니다.”
“…설마 당신은 그 원흉이 인간이라고 생각합니까?”
“모릅니다. 하지만 인간 비슷한 존재라는 것은 확신합니다. 각성자 튜토리얼만 봐도 명확하지 않습니까?”
백원태는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만이 아니라 모두가 느끼고 있는 문제였으니까.
지극히 인간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존재가 아니고서야 각성자 튜토리얼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
“놈들이 게이트 너머에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세상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놈들이 누구든, 어떤 존재이든, 그리고 어디에 있든… 나는 반드시 놈들을 찾아내서 죽여 버릴 겁니다.”
그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다.
삶을 파괴당한 자, 24만 명의 죽음을 등에 짊어진 자로서 해내야만 하는 숙업이었다.
* * *
백원태는 용우에게 어비스에 대해서 묻기보다는 조카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라도 더 듣다가 일어났다.
용우가 신유정과 만나, 그녀의 죽음까지 함께한 시간은 채 10일도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의 기억만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었다.
“고마웠습니다.”
백원태는 조카의 유품을 전해주고, 그녀의 마지막을 알려준 것에 대해서 용우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다.
“2시간 37분 지났군.”
백원태가 폰에 세팅해 뒀던 타이머를 확인하자 곧바로 대기하고 있던 수행원이 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곧 용우의 폰에 10억 원이 추가로 입금되었다는 메시지가 떴다.
용우는 찍히는 숫자에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며 웃었다.
“이건 받지 않겠습니다. 어비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대가로 돈을 받겠다고 했지만, 혈육을 잃은 분에게 혈육의 소식을 전하는 것을 똑같이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받아주십시오. 고작 돈이지만… 그런 걸로라도 고마움을 표하고 싶은 제 마음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부탁입니다.”
백원태의 태도가 워낙 강경해서 용우는 한숨을 쉬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 용우 씨가 헌터로 일하려면 돈이 필요할 겁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돈을 투자해야 하는 직업이니까요.”
백원태가 그렇게 말하자 수행원이 서류 봉투와 두 장의 카드를 용우 앞에 놓았다.
“헌터 라이센스와 힐러 라이센스입니다. 조회해 보시면 알겠지만 이미 데이터베이스에도 등록되었고, 활동에도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겁니다. 그리고 추후 헌터관리부에서 어제까지의 일을 빌미로 귀찮게 굴지 못하도록 처리해 두었으니 미국에 연락을 넣는 것은 그만둬 주셨으면 합니다. 언젠가 다른 나라에 알려지겠지만 조금이라도 그 시기를 늦추고 싶다는 것이 모두의 마음이니까요.”
“…헌터관리부에 영향력이 상당히 강하신가 보군요.”
용우의 말에는 빈정거림이 섞여 있었다.
자신은 여동생과 함께 이 나라를 떠야 하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대기업의 주인인 백원태는 너무나 쉽게 그 문제를 해결해 버린 것이다. 빈정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별로 좋지 않게 들린다는 걸 압니다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왜 그런가를 제 입으로 말하면 너무 구질구질하고… 당신이 실종되었던 15년간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역사 공부를 하시면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빙긋 웃은 백원태가 말했다.
“난 용우 씨, 당신에게 깊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미움 사고 싶지 않아요.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이어갔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순수한 호의로 받아들이지요.”
“고맙습니다. 일단 계약서부터 처리하고… 그리고 온 김에 비즈니스 이야기를 해도 되겠습니까?”
“비즈니스?”
“헌터로서의 비즈니스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