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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김은혜가 용우를 찾아왔다.
그녀는 용우를 보자마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아, 아니… 너무 달라지셔서요.”
그저께까지만 해도 노숙자보다도 심각한 몰골이었던 용우가 지금은 말끔한 모습으로 둔갑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 말이 사실이었다는 걸 이제야 믿겠네요.”
“무슨 말?”
“3년밖에 안 지난 줄 알았다는 말.”
그 말에 용우가 피식 웃었다. 이미 여동생을 통해서 실감한 사실이었으니까.
“어제는 잘 쉬셨어요? 하루 정도는 그냥 쉬시라고 연락 안 했는데.”
“시말서 쓰느라 바빴던 건 아니고?”
“아, 그거… 정말 바빴죠. 저어어엉말로!”
김은혜가 용우를 째려봤지만, 물론 용우는 눈썹도 까딱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볼일이지?”
“세상 공부는 좀 했어요?”
“대충은. 이제는 북한이 없어졌고 중국이 7개국으로 쪼개졌다는 것 정도는 알지.”
“그럼 각성자는 정부에 등록하지 않으면 불법이라는 것도 아시겠군요.”
“그러고 보니 나보고 미등록 각성자라 그랬지. 등록 절차 밟으라 이거군.”
“네. 귀찮은 서류 과정은 다 제 쪽에서 처리해 뒀지만 마력 패턴 등록하고 등록증을 수령하는 건 본인이 직접 해야 하거든요.”
“마력 패턴 등록?”
“지문을 등록하는 것 같은 거예요. 각성자들은 개인마다 고유한 마력 패턴을 가졌거든요.”
“스펠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를 대비하는 건가?”
“그것도 있고, 헌터의 경우는 전투 시에 개개인을 구분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니까요.”
“그렇군.”
용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생각했다.
‘지구의 각성자들은 마력 패턴을 바꿀 수 없다는 뜻이군. 하긴 우리도 후기에나 터득한 능력이니.’
이제는 용우도 ‘각성자’라는 호칭을 자연스럽게 쓰게 되었다.
그가 ‘우리’라고 칭한 것은 어비스로 납치되어 각성자가 되었던 24만 명이었다.
“그리고 당분간 정보 관리에 신경을 써줬으면 해요.”
“정보 관리라면 어떤?”
“사람들이 당신이 0세대 각성자라고 특정 지을 만한 단서를 흘리고 다니지 말아달라는 거죠.”
“일부러 내가 0세대 각성자라고 떠들고 다니지야 않겠지만… 이미 늦지 않았나?”
용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행정 복지 센터에 가서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은 시점에서, 그 일을 처리해 준 직원은 충분히 짐작할 것 아닌가?
“걱정 마세요. 그쪽은 우리 쪽에서 비밀 엄수 서약을 받은 직원이 당신을 담당하게 했었으니까요.”
“일 처리가 철두철미한데?”
“그리고 여동생분에게는 첫날에 당부해 뒀어요. 직장에도 이야기하지 않았을 거고, 다른 데서도 딱히 당신에 대해서 사실대로 말하지는 않았을걸요.”
생각해 보니 그랬다. 단골 미용실에서도 우희는 용우가 15년 만에 돌아온 오빠라고 말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랬었군. 그 외에는?”
“각성자 연구원에서 당신에게 연구 협력을 부탁해 왔어요.”
“뭘 협력해 달라는 거지?”
“여러 가지죠. 그 어비스라는 세계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가를 듣는 것부터 시작해서 당신의 각성자로서의 특성이나 스펠에 대한 것을 연구실에서…….”
“거절하지.”
“…칼 같군요?”
“난 연구용 모르모트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어.”
“인류를 위하는 일이 될 텐데요.”
“설마 지금 그 말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나? 만날 때마다 당신이 더 멍청해 보이는군.”
시큰둥한 용우의 말에 김은혜는 울컥했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애국심이 넘쳐서 자신이 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녀는 그런 성품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러가고, 용우가 말했다.
“다만 전자는 고려해 보지.”
“전자라면… 어비스라는 세계의 이야기요?”
“그래. 내가 지정한 장소에서 그에 대한 질답을 나누는 것을 받아들이지.”
“그럼 그런 걸로 전달을…….”
“대가는 1시간에 1억 원.”
“뭐라고요?”
김은혜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을 벌렸다.
용우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아, 역시 너무 저렴한가? 시간당 2억 원으로 하지. 혹시 향후에 기업 쪽이랑 연결해 줄 생각이라면 그쪽은 5억 원부터 시작하는 걸로 정해두고.”
“아니,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농담하는 거죠?”
“왜 농담이라고 생각하지?”
기가 막혀서 뭐라고 하려던 김은혜는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용우의 표정에서 그가 진심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진짜로 그만한 돈을 받겠다고요?”
“인류를 위한 일이라면서?”
“광범위하게 보면 그렇게 되겠죠.”
“내가 범인류적인 공헌을 하는데, 그 시간의 가치가 그 정도도 안 된다면 웃기는 일 아닌가? 스포츠 스타들도 경기 한 번 뛰면 그거보다 많이 받을 텐데?”
“…….”
“그리고 정치인들이 대기업 고문역을 하거나 낙하산으로 취직해서 얼마나 받아 처먹는지 생각하면 너무 저렴한 대가가 아닌가 싶은데.”
“아무리 그래도 그건 무리일걸요.”
“무리라고 생각하면 돈을 안 낼 거고, 그러면 나는 일을 안 해줄 뿐이지. 참고로 협상으로 대가를 깎아주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
용우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김은혜가 물었다.
“돈이 아쉽진 않아요?”
“아쉽지.”
힐러로 일하는 우희가 돈을 잘 번다고는 하지만 계속 그녀에게 빌붙어서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지만 돈은 헌터가 되어서 벌면 될 것 같더군. 각성자가 헌터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헌터는 꽤 돈을 잘 버는 직업이던데.”
용우가 헌터에 대해서 조사해 보고 가장 놀란 점은 그들의 수익 구조였다.
북한이 멸망한 지금, 대한민국 군대는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로 전환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2027년 현재 한국군이 모병제로 유지되고 있으며, 그 인원 규모가 징병제였던 당시의 10% 미만으로 축소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미 징병제로 대규모 군대를 유지해야 했던 가장 큰 이유인 북한은 사라졌다.
또한 퍼스트 카타스트로피 이후 도시집약적인 체제가 구축되면서, 인적 없는 곳에 숨듯이 위치해 있던 군부대는 모두 사라졌다.
더 이상 한국군이 상대해야 할 적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몬스터를 상대로 한 전투는 거의 대부분 헌터 기업들이 수행한다.
군부대에도 각성자로 이루어진 대(對)몬스터 부대가 존재하긴 하지만 그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
현재 군대의 역할은 거의 재해지역의 감시 및 확장방어, 그리고 헌터 기업과의 협력에 집중되어 있었다.
정부의 인가를 받고 운영되는 헌터 기업들은, 정부의 요청에 따라서 게이트를 제압함으로써 수익을 얻는다.
정부는 헌터 기업들에게 전투 의뢰 비용을 지불하며, 헌터 기업들은 게이트에서 몬스터를 처치하면서 얻은 부산물들을 이용해서 추가 수익을 얻는다.
이 중에서 가장 돈이 되는 것은 역시 마력석이었다.
마력석이야말로 현재 인류 문명을 지탱하는 주요 자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년 전, 각성자 연구 과정에서 마력석을 촉매로 써서 손쉽고 안정적으로 상온 핵융합을 일으킬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었다.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공상의 산물로 치부되던 꿈의 에너지 기술이 갑자기 실현되어 버린 것이다.
기존 원자력 발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위험성이 적고, 오염 물질 걱정도 없는 친환경적 에너지이며, 그러면서도 막대한 전력 생산량을 자랑한다.
이 기술은 궁지에 몰렸던 인류 문명의 구원자나 다름없었다.
퍼스트 카타스트로피 이후 세상 곳곳을 점거한 몬스터들 때문에 에너지 자원의 채굴량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대체 에너지 개발이 인류의 사활을 건 문제였다. 마력석을 이용한 상온 핵융합 기술이 개발되지 않았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피폐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런 마력석 발전소가 세계 곳곳에 건설되면서 인류의 에너지 문제는 큰 전환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물가가 전체적으로 많이 올랐음에도 전기 요금은 용우가 실종되었던 2012년 대비 10% 미만이라 서민 가정에서도 여름철에 에어컨을 펑펑 틀어대는 것을 부담스럽지 않게 여기는 시대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헌터들이 몬스터로부터 마력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성립한다.
“오늘자 시세로 마력석이 그램당 84만 원이더군.”
용우의 기억으로는 2012년 당시 플루토늄의 추정가가 그램당 40만 원 정도였을 것이다. 마력석의 거래가는 그 2배를 넘는 것이다.
참고로 용우가 게이트 브레이크 때 사냥으로 먹은 마력석이 10그램 정도는 되었을 것 같았다.
‘영양 보충 하겠다고 840만 원 어치를 처먹었다니.’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오한이 몰려왔을 정도였다.
‘하지만 앞으로는 더 많이 처먹어야지.’
마력기관을 완전히 회복하기 위해서는 장기간에 걸쳐서 최소한 수십억 단위를 처먹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용우는 그런 투자를 마다할 생각이 없었다.
김은혜가 말했다.
“대신 목숨을 거는 일이죠. 본질적으로는 목숨 걸고 전투에 뛰어들어서 돈을 버는 용병이나 다름없어요.”
“그 점은 잘 알지. 하지만 목숨 걸고 싸우는 것이 의미와 이익 양쪽을 창출한다니 너무나 부러운 일이지 않나?”
“네?”
김은혜가 무슨 소리냐는 듯 물었지만 용우는 쓴웃음을 지을 뿐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말이었다.
왜냐하면 어비스에서 강요당한 싸움에는 그런 인간적인 의미가 없었으니까.
그곳에서 용우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강요당한 싸움을 했을 뿐이다.
싸워 이기면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것조차도 살아남기 위한 자원일 뿐 다른 가치를 창출해 내지 못했다.
‘그렇게 보면 이 엿 같은 세상도 멋져 보이는군.’
하지만 본질적으로 쓰레기통 같은 세상이다.
만약 그가 그리워하던 지구 그 자체였다면, 용우는 굳이 약해진 각성자로서의 힘을 회복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세상은 바로 그가 꿈꾸던 평화롭고 인간적인 삶을 보장했을 테니까.
하지만 돌아온 세상은 전장이었다.
그가 그리워하던 것은 모두 파괴되었고, 그가 지옥을 전전하며 쌓아올린 힘은 이 세상에서도 의미를 가진다.
그렇다면 기꺼이 그 힘으로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해소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