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격변하는 왕국(8)
-----------------------------------
7장 격변하는 왕국(8)
"아이고, 허리야."
"아직도 그 난리 때의 통증이 사라지지 않은 건가?"
"그래. 그때 날아가서 떨어진 후에 허리가 아작나서 아직도 끙끙 된다고."
"허리가 아플 때는 따끈한 국에 술 한잔이 최고지. 일 끝나고 한잔 어떤가?"
"크크크. 그럴까? 어이, 거기 당신도 어떤가?"
"난 됐네."
"생각 없는 사람을 왜 권하나? 내가 지금 술을 약간 가져왔으니까 슬쩍 마시겠나?"
"사양할 리가 있겠나?"
'아주 잘 돌아가는구만.'
경비병 중 한 명인 릭은 자신과 같이 일하는 이들의 대화를 듣고 기가 막혔다. 릭은 자신이 무뚝뚝하고 융통성이 없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할 때는 일을 하고 놀 때는 노는 것처럼 기본적인 것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대부분의 경비병들은 기본적인 것도 지키지 않고 불량배들도 저것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해이해져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릭은 다른 이들과 똑같이 해이해지지 않고 자신이라도 정신 차려서 제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같은 경비병들을 좋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는 없었기에 릭은 그들에게 정찰을 하고 온다고 하며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후...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모르겠군."
릭은 주변을 정찰하며 심란한 자신의 기분을 달래려고 했다. 라이언 왕국의 성이 타왕국에 비해서 작다고 하지만 그래도 평민인 릭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크기라고 볼 수 있었다. 릭은 자신이 있든 없든 똑같이 돌아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자신이 경비병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 생각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심란했다.
"과연 내가 맞게 하고 있는 걸까...응?"
릭은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2명의 인물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릭은 행동 방침에 따라서 무기를 들고 상대방을 겨누며 얘기했다.
"당신들은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처음으로 들었군. 반갑다고 해야 하나?"
"그러게 말이야."
"...무슨 헛소리지?"
릭은 자신의 말에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이는 2명의 인물에 당황했다. 하지만 그들은 당황해하는 릭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얘기하기 시작했다.
"이 녀석은 어때?"
"모르지. 하지만 지금까지 만난 경비병들은 모두 무시하거나 모르는 척을 하는 경우가 태반이였어. 이건 아예 싹 다 자른 다음에 새로 뽑는게 좋겠어."
"그렇겠지?"
"당신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릭은 자신을 무시하며 대화하는 두 명에게 화가 나서 자신의 무기인 창을 휘둘렀다. 지금까지 훈련을 통해 수만 번 휘두른 것을 보여주듯이 상당히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하지만 공격한 릭이 얼이 빠질 정도로 릭의 찌르기는 너무나 가볍게 무산되었다.
쩡!
깔끔한 타격음이 들리고 릭은 엄청난 반발력이 손으로 전해져와 창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릭은 상대가 자신의 공격을 건틀릿으로 가볍게 친 것을 보았고 그 결과, 창이 산산조각이 나면서 자신의 손에서 날아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크윽."
릭은 손바닥의 가죽이 찢어져서 피가 나고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품에서 여분의 단검을 꺼내 들어서 싸울 자세를 취했다.
"좋아! 덤벼라!"
릭은 엄청난 덩치의 남자를 보고 이길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여기서 뒤로 후퇴할 상황도 아니였다. 아니 자신이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지금 이렇게 싸우면서 좀 전까지 심란했던 마음은 어느새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야아악!"
릭은 약한 자들이 보통 그렇듯이 소리를 지르며 단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단검은 덩치의 남자가 들고 있는 현란해 보이는 검에 막혀 들어가지 않았다.
"젠장!"
릭은 자신의 공격이 하나도 통하지 않는 것을 보고 욕설을 지껄였다. 하지만 덩치의 남자는 그런 릭에게 손을 내밀며 얘기했다.
"이만 하자고 친구. 지금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는 것 같으니까."
"뭐,뭐?"
"르. 느꼈지?"
"그래.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야. 저쪽에 무슨 일이 벌어진 모양인데 그게 아니었으면 눈치채지 못했을 것 같군."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릭은 자신을 제외하고 심각하게 얘기하는 둘을 향해 소리를 질렀고 둘은 릭의 말에 서로를 쳐다본 후에 얘기했다.
"저쪽에 누군지 몰라도 침입자가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그것도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이 훈련된 녀석들이야."
"저,저쪽은 내가 왔던 곳인데..."
"당신은 원래 어디에 있었지?"
"나,나는 동료 경비병들과 함께 있다가..."
릭은 말하다가 이내 상황을 파악하면서 동시에 가리킨 쪽을 향해 달려갔고 나머지 둘 또한 황급하게 달려간 릭을 뒤따라가기로 결정했다.
스윽.
쉐이드는 손짓으로 암살자들에게 지시를 내렸고 손짓의 의미를 알아차린 암살자들은 이동하기 시작했다. 어둠이 깔린 상황 속에서 암살자 C급과 B급은 검은 천을 착용하고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고 A급 이상은 투명화 마법이 부여된 마법천을 입어서 완벽히 몸을 숨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마법천은 레드 후작에게 받은 50만 골드의 일부로 구매하여 얻은 것으로 장기적으로 봤을 때 적절한 지출이였다고 쉐이드는 생각했다.
탁, 탁, 탁, 탁
쉐이드가 먼저 성벽을 올라갔고 그 뒤를 S급과 A급이 따라 올라갔다. 십수 미터는 되는 성벽을 그들은 단 몇 번의 발걸음과 도약으로 올라갔고 성벽 위에 도착하자마자 주위를 살피었다. 그렇게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암살자들은 줄을 성벽에 고정시켜 밑으로 내렸다.
그 줄을 타고 C급 여러 명이 올라가서 줄의 중간중간에 멈췄고 나머지 B급과 C급이 그들의 어깨를 밟고 계단을 올라가는 것처럼 도약해 올라갔다. 그렇게 모든 이들이 올라온 것을 확인한 쉐이드는 다시 손짓을 하여 지시를 내렸다. 쉐이드가 선두로 앞장섰고 그 뒤를 S급, A급이 그리고 나머지 B급과 C급이 뒤를 이어서 움직였다. 그들은 성벽에서 내려와 신속하면서도 조용하게 이동했고 쉐이드의 손짓에 맞혀서 방향을 잡고 움직였다.
누구보다 민감한 오감을 가지고 있는 쉐이드는 느껴지는 기척에 의존하여 경비병들과 만나지 않도록 방향을 조정하였고 그렇게 암살자들은 전투 한번 없이 목표된 지점을 향해 순차적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약 몇 분 동안 이동하자 쉐이드는 멀리서 얘기하는 대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크으...역시 경비를 서며 마시는 술은 맛이 다르구만."
"내 말이 그 말이네. 자자, 더 마시자고."
"술맛이 꿀맛이군."
대화 소리를 들은 쉐이드는 주변을 살폈다. 이제 경비병과 부딪히지 않고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쉐이드는 암살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스윽.
쉐이드는 검지 손가락으로 방향을 집어주고 엄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목을 휙 그었다. 그의 지시에 암살자 3명이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순식간에 돌진하였다.
"으읍!"
"윽..."
"크르륵.."
3명의 암살자들은 경비병들이 소리를 내지 못하게 입을 막고 심장과 목에 정확하게 단검을 꽂아넣었다. 3명의 암살자가 처리를 하는 사이에 나머지 암살자는 신경 쓰지 않고 곧바로 목표를 향해 이동했다. 남은 3명의 암살자는 경비병이 죽은 것을 확실히 확인한 후에 그 뒤를 따라갔다.
주변의 기척을 통해서 쉐이드는 목표에 거의 접근했다는 것과 점점 사람이 많아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방에 3명 접근. 상당한 실력자 2명, 일반 경비병 1명으로 파악. S급 2명, A급 1명이 처리해라."
쉐이드의 지시에 암살자 3명이 진영에서 이탈했고 쉐이드와 나머지 암살자들은 계속해서 이동했다.
"우측에 일반 경비병 5명. C급 5명이 처리해라. 좌측에 일반 경비병 4명, 마법사 1명. B급 6명이 처리해라. 전방에 기사로 추측되는 2명. 내가 처리하겠다."
누가 가라고 얘기하지 않았는데도 정확하게 암살자들이 우측으로 5명, 좌측으로 6명이 이동했고 쉐이드는 전방으로 돌진했다. 기사 2명이 정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쉐이드의 움직임에 반응하지 못하고 그저 서 있었다.
"쉐도우 워크."
쉐도우 워크는 암살자 길드장에게만 전수되는 기술로 발걸음과 기척을 완벽하게 지워서 접근하는 기술이다. 이 기술은 심장 박동까지 느리게 하여 마치 자신의 주변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끼게 하고 육체를 가속화 시켜준다.
쉐이드는 가속화된 육체로 순식간에 기사 2명의 뒤로 이동해서 단검으로 2명의 목을 베었다.
서걱.
"크륵..."
기사 2명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고 그와 동시에 암살자들이 정문에 접근하였다. 쉐이드는 정문을 조용히 열어서 안을 살펴보았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왔다.
스윽.
쉐이드는 검지를 위로 올려 손짓했고 암살자들은 그에 맞혀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걸리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최대한 늦게 걸리기 위해서 암살자들은 신속하고도 조용하게 움직였다.
"꺄아아악!!"
"강행 돌파한다!"
생각보다 빠르게 기사들의 시체가 발견되어서 비명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에 주변이 술렁이는 것을 쉐이드는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일이 처리하면서 갈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신속하게 목표지점을 향해 강행 돌파하기로 했다.
"전방에 8명, 후방에 6명! B급들이 처리해라!"
쉐이드는 느껴지는 기척과 기운으로 숫자와 무력을 파악하여 효율 있게 암살자들을 분배하였고 그의 지시에 따라서 암살자들이 움직였다.
"뭐,뭐야?!"
"어,어?!"
비명소리를 듣고 온 경비병들은 100명이 넘는 집단이 자신들을 향해 순식간에 접근해오는 것을 보고 당황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용기를 내거나 혹은 발버둥을 치려고 무기를 휘둘렀지만 암살자들의 속도를 한순간도 늦추지 못했다.
"크아아악!!"
"컥!"
정확히 8명의 암살자가 먼저 앞으로 나아가서 한 명씩 일격에 즉사시켰고 그 사이에 100여 명이 넘는 암살자는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동시에 후방을 맡은 암살자들도 자신들의 임무를 성공시키고 8명의 암살자들과 함께 집단의 뒤를 따라갔다.
"전방에 5명."
"크아아악!"
"우측에 8명."
"아아악!"
"좌측에 12명."
"으윽.."
쉐이드의 지시에 맞혀서 그들은 막힘없이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목표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쉐이드는 자신의 부하를 아무도 잃지 않았고 동시에 계획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 쉐이드는 앞에 2명의 인물이 있는 것이 느끼고 얘기했다.
"전방에 2명. 이번에는 내가 맡겠다."
쉐이드는 부하들에게만 재미를 보게 할 수 없어서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했다.
"쉐도우 워크."
시간이 느려지고 육체가 가속화되어 기척이 사라졌다. 쉐이드는 순식간에 상대의 옆으로 이동했고 단검을 휘두르면서 상대의 목이 떨어지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기에 자신의 믿음을 배반하는 상대의 움직임을 봤을 때 그는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쩡!
"뭐야?"
"뭐,뭐야?!"
똑같은 말을 했지만 담겨 있는 뜻은 달랐다. 남자는 마치 벌레가 귀찮게 구는 것을 알아차린 것처럼 말했고 쉐이드는 이런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는 것처럼 말했다. 쉐이드는 지금까지 쉐도우 워크를 쓰면 상대는 정지해 있고 자신만이 움직이는 또다른 세계에 들어갔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는 자신과 똑같은 세계에 있는 것처럼 자신이 접근하는 순간 고개를 돌려 반응한 것을 쉐이드는 놓치지 않고 목격했다.
"아프잖아!"
쾅!
"크아악!"
"쉐이드님!"
쉐이드는 상대의 엄청난 힘에 날아갔고 동시에 벽에 처박혔다. 암살자들은 자신들의 절대자라고 할 수 있는 길드장이 벽에 처박히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우웨엑!"
쉐이드는 입에서 피를 한 움큼 토해내고 힘겹게 고개를 올려 상대를 쳐다보았다. 여자라고 착각할 정도로 예쁜 미남자와 아름다운 엘프였다. 그들은 백 명이 넘는 암살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산책 나온 것처럼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뭐야? 이 녀석은? 다짜고짜 칼질이네."
"그러게. 시비는 이 녀석들이 먼저 걸었으니 싸워도 듀로크가 뭐라 안 하겠지?"
"이 녀석들 생긴 것을 보면 좋은 목적으로 오지 않은 거는 확실하잖아? 오히려 칭찬하겠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쉐이드는 자신이 피를 한 움큼 게워내는 사이에 여유롭게 얘기하고 있는 두 명을 보며 생각했다.
'젠장! 나중에 돌아가면 레드 후작을 꼭 죽일 거다!.'
쉐이드는 자신이 똥을 밟아도 제대로 밟았다는 것을 느끼면서 최대한 피해 없이 일을 마치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