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도 같이 가야지.
재판장에 깊은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한쪽에 앉아있는 할머니들은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 할머니들의 곁에는 연정호가 있었다. 꾹 다문 입술은 긴장했는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오늘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위안부 피해 손해배상 판결이 있는 날이었다.
“정호야,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정호야….”
할머니들이 연정호를 향해 나지막이 물었다. 연정호를 바라보는 할머니들의 얼굴에는 짙은 회한과 슬픔이 담겨 있었다. 연정호가 할머니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길 겁니다. 꼭.”
연정호의 확신에 찬 말에 할머니들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지금껏 연정호는 할머니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 그런 연정호의 노력을 알기에 할머니들도 연정호를 손자처럼 대했다.
“강우는? 강우는?”
할머니들이 강우를 찾았다.
“아마 오늘 못 올….”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연정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청석의 한쪽에 강우가 앉아있었다.
‘가…. 강우야!’
연정호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실 오늘 강우가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정치에 뛰어든 이상 중립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강우는 강우였다. 친일파와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불의한 일에 대해서는 절대 물러섬이 없었다.
-이길 거다.-
연정호의 시선을 느낀 강우가 입 모양으로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런 강우의 메시지에 연정호의 뛰던 가슴이 차분해졌다. 강우의 말이라면 분명 현실로 이루어질 것이었다. 이윽고 재판정으로 판사가 들어왔다. 방청객들이 웅성거리며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탕. 탕.
“정숙하세요.”
자리에 앉은 판사가 조금 소란스러운 재판정을 정숙 시켰다. 오늘 있을 역사적인 판결을 보기 위해 찾아온 방청객들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법정이 조용해지자 재판이 시작됐다. 원고인 위안부 피해 할머니 측과는 달리 피고인 일본 정부는 어떤 대리인도 보내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 원고 측 최후 변론 시작하세요.”
판사의 말에 연정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판사님 그리고 방청객 여러분. 오늘 저희는 어긋난 역사의 한 조각을 바로잡고자 합니다. 일본 정부는 한반도를 강제 점거한 상황에서 원고인 위안부 할머님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강제적으로 반인륜적인….”
연정호의 최후 진술이 재판정에 퍼져 나갔다. 연정호의 입에서 나오는 시대의 참상에 방청객들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그리고 그동안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에 무심했던 자신들을 반성했다.
“할머니들은 누군가의 딸이었으며 또 누이였습니다. 할머니들이 겪은 고통과 아픔은 곧 이 땅의 고통이었고, 아픔이었습니다. 이는 할머니들에게만 국한된 피해가 아닙니다. 일본 정부는 조선의 딸들에게 크나큰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피해자들이 살아있을 때 사과하지 않는다면 영원한 전범국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연정호가 마지막 변론을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재판정을 울리는 연정호의 최후 변론에 깊은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는 잘못된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에 대한 무서운 분노도 담겨 있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판사가 입을 열었다.
“원고 측 최후 변론 잘 들었습니다. 피고 측은 이번 재판에 참석하지 않은 관계로 바로 판결에 들어가겠습니다.”
판사가 판결문을 읽기 시작했다. 판사의 판결문은 시작부터 묵직한 분위기였다. 오늘 있을 판결이 역사에 남을 사건이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고 했다.
-먼저 본 재판부는 이번 소송이 외국 국가를 피고로 하는 소송인 만큼 소송에 대한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 또한 국제 관습법인 국가 주권면제가 이 사건에서도 적용돼 우리 법원이 피고에 대한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는지 고려했습니다. 하지만……. 중략……. 피해자들이 ‘위안부’로 고통받은 기간, 피해자들이 귀국 후 겪은 사회적, 경제적 피해와….-
판결이 시작되자 재판정의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할머님들은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두 주먹을 불끈 쥔 연정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피고는 원고에게 각 1억 원씩을 지급하라.-
탕탕탕.
최종 승소를 알리는 판결문의 끝과 함께 판사가 선고를 내리는 판사봉을 내리쳤다.
“언니! 우리가 이겼어요.”
“그래, 다들 고생했어!”
할머니들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기 시작했다. 판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재판정을 빠져나갔다. 그런 할머니들을 보며 연정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강우야!’
연정호가 고개를 돌려 강우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강우 역시 눈시울을 붉힌 채 손뼉을 치고 있었다. 그렇게 재판이 마무리되었다.
“강우야!!”
재판정을 나오자 강우가 기다리고 있었다. 강우가 연정호를 와락 껴안았다.
“고생했다!”
연정호와 뜨거운 포옹을 마친 강우가 할머니들을 바라보았다. 오늘 재판에 대표로 참석한 할머니들이 강우를 향해 우르르 달려왔다. 그리고 강우의 손을 앞다투어 잡았다.
“강우야. 강우야.”
“우리가 이긴 거 맞아?”
할머니들이 울음에 강우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하지만 찡한 코끝을 훌쩍이며 씩씩하게 답했다.
“네, 우리가 이겼어요. 이제 반드시 일본 정부에 사과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할머니들이 다시 울음바다가 되었다. 할머니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법원이 판결한 피해보상금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가슴에 멍울처럼 억누르고 있었던 과거에 대한 사과였다. 이미 세월이 지나 닳고 닳은 할머니들의 슬픔이었다. 분노는 세월이라는 바람을 타고 흩어져 버렸다. 하지만 자신들은 잘못이 없다고, 자신들은 생계를 위해 몸을 판 여자가 아니라고. 그렇게 세상에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강우야.”
할머니들이 강우를 향해 연신 고맙다고 했다. 강우를 만나기 전 할머니들은 외롭고 힘들었다. 사단법인 광복을 만나기 전에는 현실적인 삶의 무게에 짓눌려있었다. 법무법인 광복을 만나고 나서야 진정한 사과를 받는 길이 열렸다. 할머니들은 강우를 만난 것이 정말 행복했다.
“아니에요. 제가 한 게 있나요….”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그런 강우의 겸손함에 할머니들의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울음과 미소가 함께 범벅이 되는 모습이었지만, 강우는 그 모습이 참 예쁘다 생각했다. 그리고 참 좋았다.
“이제 밖으로 나가셔야죠.”
강우가 할머니들에게 말했다. 할머니들이 멀리 보이는 법원의 출입구를 바라보았다. 오늘 있을 역사적인 판결을 위해 분명 많은 취재진이 와 있을 것이다. 할머니들이 소매를 들어 눈물을 닦아냈다.
“그래, 나가야지. 오늘같이 좋은 날 울지 말고.”
할머니들을 항상 앞장서서 이끌어 주던 김 씨 할머니가 할머니들을 달랬다. 할머니들이 당당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연정호를 바라보았다.
“정호야, 마지막까지 잘 부탁한다.”
“왜? 같이 안 나가?”
강우가 고개를 저었다. 같이 가고 싶었지만, 할머니들을 정치 홍보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 같아 꺼려졌다.
“어, 나는 기자회견 끝나고 찾아갈게.”
그때였다.
“아니야. 강우도 같이 가야지.”
김 씨 할머니를 비롯한 할머니들이 강우의 팔을 잡아주었다. 강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할머니들이 강우를 보며 말했다.
“세상 그 누구도 강우 네가 우리를 이용했다고 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 할머니들이 나서서 혼을 내줄 거야. 오늘은 우리를 위해서도 강우 네가 함께해주지 않으련?”
김 씨 할머니의 말에 다른 할머니들도 맞장구를 쳤다. 강우와 오늘의 승리를 함께하고 싶었다.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 이러려고 찾아온 게 아닌데요….”
강우가 할머니들의 손에 끌려 법원 밖으로 나갔다. 역시나 엄청난 취재진이 몰려있었다.
펑- 퍼퍼펑-
할머니들이 나오자 기자들의 플래시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강우는 슬쩍 뒤로 빠져 주었다.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연정호가 앞으로 나서 하나하나 질문에 답을 해주었다.
“오늘 재판 승리로 이제 일본 정부는 더 이상 재판 자체를 부정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일본 정부는 한국법원의 공소장을 받지 않으며 재판 자체를 부정해 왔다. 하지만 오늘 판결이 난 이상 더는 모른 척 잡아뗄 수 없었다.
“축하드립니다!”
“할머님들 고생하셨습니다!”
오늘 재판이 원고 승소로 끝났다는 소식에 몇몇 기자들이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강우가 씩 웃었다.
‘좋은 현상이야.’
그동안 강우는 언론이 진정한 언론이 될 수 있도록 큰 노력을 해왔다. 대진 엔터를 통해 올바른 기자 의식을 가진 언론사에 투자했다. 그런 오랜 노력의 열매가 지금 조금씩 맺어지고 있었다. 어느 한쪽에 쏠리지 않고, 오직 진실과 정의를 따르는 그런 언론이야말로 강우가 꿈꾸는 언론의 모습이었다.
“할머니들의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기자의 질문에 할머니들이 앞으로 나섰다. 할머니들이 김 씨 할머니를 쿡쿡 찔렀다. 김 씨 할머니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오늘은 우리 할머니들에게 정말 역사적인 날입니다. 우리 할머니들이 최대한 많이 생존해 있을 때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고 싶습니다. 그리고 꼭 감사를 전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할머니들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신경 써준 광복 재단 여러분. 법무법인 광복 여러분 그리고 우리 손자 같은 연정호 변호사님.”
마지막으로 김 씨 할머니가 강우를 바라보았다. 뒤쪽으로 빠져 있던 강우가 깜짝 놀라며 할머니들을 바라보았다. 연정호와 할머니들을 향했던 관심이 강우를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박강우 사장님께 질문이 있습니다! 이번 판결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계십니까? 또한, 이번 재판에 참여하신 것은 개인의 입장이십니까?”
기다렸다는 듯 기자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강우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리고는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이번 판결은 당연한 결과였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역사가 바로 잡히는 판결이니까요. 이제 일본 정부는 할머니들에게 정식으로 사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할머니들의 상처를 어찌 치유해드릴지 그것이 남은 국민과 책임을 져야 할 분들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강우의 말에 기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아…. 그리고 이번 재판 참석은 당연히 제 개인적인 입장입니다.”
강우의 발언에 기자들이 그러면 그렇지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기자들은 강우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그리고 이것은 앞으로 제가 펼쳐나갈 정치의 길과 같습니다. 저는 더 많은 분과 낮은 곳에서 함께할 것이며 더 많은 분의 억울함과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정치를 할 것입니다.”
강우의 발언에 기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정치인들은 보통 애매하고 중립적인 입장 표현을 하고는 한다. 그것이 더 많은 표를 얻을 방법이라고 생각하고는 했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올바른 길을 가는데 망설이지 않을 것이며, 표를 얻고자 거짓 언행을 하고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강우가 정치에 뛰어들며 다짐했던 것이 아니던가.
“오늘의 주인공은 제가 아닙니다. 오랜 염원을 푼 할머니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위로를 부탁드립니다.”
그 말을 끝으로 강우가 다시 뒤로 물러났다. 기자들이 감탄하며 잠시 강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할머니들에게 집중하며 취재를 이어나갔다.
* * *
촤라락-
-함께시민당-
커다란 현수막이 신당의 당사에 걸렸다. 정식 창당식을 맞이해 수많은 당원이 당사에 모였다. 함께시민당은 창당 등록 절차를 마무리 짓고 오늘 힘차게 그 첫걸음을 시작하는 날이었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말끔한 양복을 입은 강우 옆에 연정호가 있었다. 강우가 씩 웃으며 연정호를 바라보았다. 연정호는 위안부 재판 승소를 끝내고 바로 신당 참모진으로 합류했다. 앞으로 강우 옆에서 선거 전략을 짜며 엄청난 활약을 할 것이었다.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한다.”
강우와 연정호가 서로를 보며 씩 웃었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정치사에 커다란 변화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