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6화 (396/402)

필연이었던가.

전직 대통령의 사저에 있는 서재에 강우가 앉아있었다. 밤늦은 시간이었지만, 강우의 눈은 생기가 넘쳤다.

똑똑.

이윽고 문이 열리고 한 명의 남성이 들어섰다. 남자다운 굵직한 외모에 강렬한 눈빛을 가진 남성이었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강우를 바라보는 남성의 시선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그럴 만도 하지. 갑자기 내가 보자고 했으니까.’

눈앞의 사내는 바로 전직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다. 강우가 가진 미래 기억으로는 훗날 한국의 대통령이 되는 인물이었다.

“안녕하세요. 박강우입니다.”

“안녕하십니까. 강정후입니다.”

강우와 강정후가 악수하였다. 서재에 있던 전직 대통령이 부드럽게 웃으며 두 사람에게 앉으라 했다.

“갑작스럽게 뵙자고 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저도 소문으로만 듣던 박강우 사장님을 직접 뵈니 좋습니다.”

강우와 강정후는 오늘이 첫 만남이었다.

“두 사람이 만나니 내가 기분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서로 소개해주고 싶었는데 말이에요.”

전직 대통령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두 사람은 닮은 점이 많았다. 나이 차이를 떠나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강우가 강정후를 지목했을 때, 내심 놀라면서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오늘 뵙자고 한 것은 제안할 게 있어서입니다.”

강우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늦은 밤이기도 했고, 강우 자체가 말을 돌리는 것을 싫어하기도 했다. 전직 대통령이 스르륵 미소를 지었다. 젊은 나이에도 강단 있는 강우의 모습에 또 반하고 말았다.

“제안을 말입니까?”

강정후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전직 대통령의 연락을 받고 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강우가 자신을 보자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했었다. 그리고 낸 결론은 단 한 가지였다. 강우는 자신에게 정치적 제안을 하러 온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생각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시대가 그리고 여론이 운명적으로 박강우 사장을 원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강우는 그런 운명을 거부할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 많은 사람을 위해 정치에 뛰어들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강우의 말은 역시나 강정후의 생각대로였다.

“새로운 정당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 당에 비서실장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으음….”

강정후가 탄성을 뱉어냈다. 직접 듣고 나니 알 수 없는 강한 운명의 끌림을 느꼈다. 사실 자신은 정치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전직 대통령이 정치를 계속 권유했지만, 계속 거절해 왔었다. 굳이 자신이 정치에 뛰어들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

“......”

잠시 정적이 흘렀다. 강정후의 얼굴에 짙은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그런 강정후를 보며 강우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강정후를 정치로 이끈 건 전직 대통령의 죽음이었어….’

후일 강정후가 낸 자서전에서도 그것을 밝히고 있었다. 전직 대통령의 죽음이 자신을 운명처럼 정치로 이끌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현재 전직 대통령은 여전히 생존해 있었다. 그리고 여당은 계속해서 정권을 이어가고 있었다.

‘강정후의 성향은 솔직히 정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봐야겠지.’

하지만 강우는 강정후가 꼭 필요했다. 강정후 본인이 정치를 꺼린다고 하지만 강우는 알고 있었다.

‘내가 신당을 만든다면 반드시 사방에서 견제가 들어오겠지. 그런 상황에서 뚝심 있게 버텨줄 사람이 필요해. 그리고 비록 청와대 참모를 지낸 경력뿐이 없지만, 내 미래 기억대로라면 그 누구보다 당을 잘 끌어줄 사람이다.’

물론, 신당을 만드는 핵심 인물은 강우 자신이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삼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우는 아직 너무 젊었다.

“왜 제가 필요하신 건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강정후가 깊은 고민을 끝내고 강우에게 물었다. 묵직한 목소리에서는 꺾을 수 없는 고집도 엿보였다. 강우가 상념을 깨고 강정후를 바라보았다.

“새로운 정치를 하고 싶다는 구태의연한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저는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정치를 하고 싶습니다. 정당을 만들어 제1당이 되거나 세력을 늘리고 힘을 기르는 데 연연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하게 살 기회를 주고 싶습니다.”

강정후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눈앞의 젊은 강우에게서 강한 신념과 묵직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강정후가 살면서 경험해보지 못했던 그런 인물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 순간, 강정후의 가슴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필연이었던가.’

오늘 이곳에서 강우를 만난 것이 운명의 당연한 순서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자신은 정치를 해야 할 운명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강정후가 전직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평생 옆에서 함께하리라 다짐했었다.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친구와 같은 존재와 함께 말이다.

“제가…. 잠시 곁을 떠나도 괜찮겠습니까?”

강정후의 말에 전직 대통령이 부드럽게 웃었다.

“거절하면 내 엉덩이라도 차서 보내려 했습니다.”

강정후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강우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사실…. 제가 정치를 할 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박강우 사장님과 같은 분이라면 좋은 정치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왜인지 모르지만 조금 설레기도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강정후의 말에 강우가 환하게 웃었다. 신당 창당을 위한 첫걸음이 지금, 이 순간 내딛어졌다.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강우가 강정후를 향해 정중히 인사했다. 전직 대통령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박강우 사장의 첫 인재 영입 성공 축하합니다. 두 사람이 힘을 합쳐서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강우가 전직 대통령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호탕하게 웃고 있지만, 가장 믿는 강정후를 보내려니 허전한 마음이 들게 분명했다.

“그러면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전직 대통령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강정후도 같은 표정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먼저 제가 정리할 것이 조금 있습니다. 회사랑 재단 운영도 인계해야 하고요. 그리고 아직 위안부 소송 재판도 제가 정리해야 할 게 조금 있습니다. 그래서 창당 준비 작업은 실장님에게 부탁드리려고 합니다.”

전직 대통령과 강정후가 새삼 감탄스러운 눈빛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가 하는 일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들인지 느꼈다.

“창당하고 나면 제 목표는 다음 총선에서 유의미한 결과를 내는 것입니다.”

“유의미한 결과라면 어느 정도까지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전직 대통령이 물었다. 새로 만들어진 정당이 선거에서 유의미한 결과라면 교섭단체 정도가 맞으리라 생각했다.

“교섭단체 확보는 기본이고 그 이상을 보고 있습니다.”

강우의 포부에 전직 대통령과 강정후가 감탄성을 뱉어냈다. 언뜻 들으면 지나친 포부라고 생각됐지만, 또 강우의 말이기에 다르게 느껴졌다. 그동안 강우의 행보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럼…. 당 구성을 위해 당분간 바쁘게 움직여야겠군요.”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이제 총선이 2년 남았으니 정말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겁니다.”

전직 대통령과 강정후가 일정을 짜며 대화를 나누었다. 정치 경험이 전혀 없는 강우는 두 사람의 대화를 유심히 들었다.

“일단 내가 나서는 모습은 주변에 좋게 보이지 않을 테니. 실장님이 몇 명 접촉해보도록 하는 게 어떨까요?”

“음…. 현역 의원 중 몇 분을 만나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신당에 영입할 의원들을 몇 명 언급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대화를 듣던 강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대화 중에 죄송합니다만….”

전직 대통령과 강정후가 강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강우가 씩 웃었다.

“새로 만들 당에 현역 의원분들은 모시지 않을 생각입니다.”

전직 대통령과 강정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제가 생각하는 정치를 위해 모시고 싶은 분들은 정치판에 있는 분들이 아닙니다. 바로 사회 곳곳에 있는 분들이 될 것입니다. 많이 힘들고 어려운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 고난도 이겨내지 못하면 정치를 바꾸겠다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직 대통령과 강정후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조차 기존의 정치를 떠올렸었다. 그런데 강우는 정말 정치계를 바꾸어 놓을 생각인 듯했다. 그리고 그 꿈이 허황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박강우 사장님의 뜻을 알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그 뜻에 맞춰 뒤에서 잘 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강정후의 말에 강우가 씩 웃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뒤가 아니라 앞에서 잘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

“네? 제가요?”

강정후가 고개를 갸웃했다. 전직 대통령은 강정후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새로 만들 당의 초대 대표가 바로 강정후 실장님이시니까요.”

“네?”

강정후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 * *

마음의 결정을 내린 강우는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강정후에게 창당 준비 작업을 부탁했고, 최고의 환경을 조성해주었다. 강정후는 전폭적인 지원으로 먼저 창당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에 들어가는 자금을 합법적으로 지원했다.

-강정후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가칭 ‘광복당’의 창단 준비위원회 발족 기자회견을 열어….-

뉴스에서는 연신 속보가 흘러나왔다. 얼마 전부터 정계에 떠돌던 강우의 정치 참여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정계는 물론 재계도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는 강우라는 존재의 정치 참여 여부는 그동안 엄청난 화젯거리였다.

-동양 그룹 박강우 사장이 정치 참여를 선언하면서 국내 여론이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특히 기존의 정당들은 혜성처럼 나타난 새로운 인물의 행보에 촉각을….-

정치계의 충격은 특히 컸다. 강우의 정치 참여가 기정사실이 되자 많은 사람이 폭발적인 지지 의사를 밝힌 것이다. 국민의 강력한 지지 의사와 신당에 관한 관심에 기존 정당들은 바짝 긴장하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런 상황에서 모두의 관심이 동양 그룹으로 쏠렸다.

-동양 그룹 박강우 사장은 아직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는 가운데….-

세상이 발칵 뒤집힌 가운데 동양 그룹의 회장실에는 강우와 아버지가 함께 있었다. 두 사람은 뉴스에서 나오는 소식을 주의 깊게 보고 있었다.

“이제 정말 시작이구나….”

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감회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아들이 정치계에 뛰어드는 순간을 뉴스를 통해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반면 강우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일단 회사 운영 인계는 이 정도면 충분할 거 같아요.”

강우는 아버지를 위해 회사 운영에 대한 것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진행해온 것들과 앞으로 진행했으면 하는 사업들을 모두 정리했다. 그 양이 어마어마해서 아버지가 놀랄 정도였다.

“이건 뭐…. 네가 없어도 아무 걱정이 없을 정도네.”

아버지는 강우의 능력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제가 경영에서 손을 떼긴 하지만 그래도 계속 옆에 있으니까 언제든지 도움을 드릴게요.”

“그래, 든든하다.”

아버지가 강우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이제 지금과는 또 다른 전쟁터로 나가는 아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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