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5화 (395/402)
  • 이왕 시작한 일 끝을 보고 싶습니다.

    찌르르- 찌르르-

    귀뚜라미가 울어대는 고요한 밤. 한 대의 SUV가 시골 마을 길에 들어섰다. 양쪽으로 보이는 논에는 달빛이 내려앉아 어둠을 걷어 내주고 있었다.

    지이잉-

    SUV를 운전하던 강우가 운전석 창문을 내렸다. 한여름이었지만, 시원한 바람이 밀려 들어왔다. 강우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틀어놓았던 에어컨을 껐다.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시원함보다야 자연의 바람이 훨씬 기분 좋지 않겠는가.

    부우웅-

    SUV는 시골길을 달려 한 마을의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에는 방문객들을 환영하는 안내판과 마을에 대한 설명이 적힌 게시판이 있었다. 이 마을은 바로 전직 대통령이 태어난 고향이었다. 전직 대통령은 임기를 마치고 이 마을로 돌아와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카라라락-

    SUV는 자갈밭으로 되어있는 마을 공동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이 마을은 전직 대통령이 돌아온 이후 많은 관광객과 지지자들이 찾아오는 명소가 되어있었다. 강우는 차를 몰아 대통령 사저 앞에 도착했다. 사저를 경호하던 경호원들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박강우입니다. 미리 연락하고 왔습니다.”

    “네, 신분증 확인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미 방문 연락을 받은 경호원들은 신분증 검사만 하겠다고 했다. 강우가 지갑에서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었다. 경호원이 신분증을 받으며 정중히 말했다.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절차라서….”

    한국에서 가장 핫하다는 남자 강우였다. 경호원들이 못 알아봤을 리 없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신분증을 돌려받았다.

    “당연한 겁니다. 절차는 지키라고 있는 거니까요.”

    “네, 주차장은 저쪽입니다.”

    강우가 사저의 주차장에 SUV를 주차했다. 주차를 끝내고 차에서 내린 강우에게 사저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초록빛이 가득한 마당과 일 층 높이로 지어진 작고 아담한 사저였다. 평생 검소하게 살았다는 전직 대통령의 성격이 담긴 모습이었다.

    “박강우 사장?”

    그때, 누군가 강우를 불렀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전직 대통령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강우가 전직 대통령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셨습니까?”

    “그럼, 나야 잘 지내고말고요.”

    전직 대통령의 표정은 참 편안해 보였다.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전직 대통령은 고향에서 사람들과 함께 매일매일을 즐기며 살고 있었다.

    “얼굴이 참 편안해 보이십니다.”

    “그런가요? 이제 다 내려놓고 평범한 국민으로 돌아와서 그런가 봅니다. 아….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갑시다.”

    강우와 전직 대통령이 함께 사저로 들어갔다. 사저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곧장 서재로 향했다. 두 사람이 서재의 의자에 마주 보고 앉았다.

    “늦은 시간에 찾아오라 해서 미안합니다. 저녁까지는 마을을 찾아주는 분들이 많아서 행여 박강우 사장이 불편할까 봐 그랬어요.”

    “아닙니다. 저도 업무 처리할 게 많아서 지금 시간이 딱 좋았습니다.”

    “아…. 이런 내 정신을 좀 봐. 사람을 불러놓고. 잠깐만 기다려 봐요.”

    전직 대통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우가 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전직 대통령이 부드럽게 웃으며 앉으라 손짓했다.

    “내 집에 왔으니 내가 직접 대접을 하고 싶어 그래요. 오렌지주스? 맞죠?”

    “같이 가시죠.”

    전직 대통령이 다시 한번 앉으라 손짓했다.

    “앉아 있어요.”

    “네.”

    결국, 강우가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서재를 나갔던 전직 대통령이 두 손으로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쟁반에는 강우가 좋아하는 오렌지주스에 얼음까지 띄워져 있었다. 간단히 먹을 떡과 과일도 담겨 있었다.

    “마침 집사람이 박강우 사장 왔다고 이것저것 준비를 해 놓았더군요.”

    “감사히 먹겠습니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쟁반을 받았다. 전직 대통령도 그것까지 거절하지는 않았다. 아마 불편해하는 강우를 배려한 것이었다.

    “날이 참 덥지요?”

    “그래도 여기는 바람이 시원하고 좋습니다.”

    “도시와 다른 점이 바로 그거지요. 여기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밤이 되면 참 시원하답니다.”

    “마을이 한적하고 경치도 좋습니다.”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음식을 권했다.

    “일단 드시지요.”

    “네, 잘 먹겠습니다.”

    강우가 오렌지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떡과 과일도 집어 먹었다. 전직 대통령이 그런 강우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사실 강우와의 나이 차이는 아들뻘이었으니 말이다.

    “내 퇴임을 하고 국민의 곁으로 돌아오니 그동안 박강우 사장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는지 다시 한번 느끼게 되더군요. 참 고마웠습니다.”

    강우가 오물거리던 음식을 꿀꺽 삼키고는 답했다.

    “아닙니다. 제가 특별히 도와드린 게….”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동북공정 때도 그랬고, 동양 그룹과 대진 그룹 그리고 SJ 그룹의 엄청난 성장으로 한국 경제가 활력을 얻었어요. 그 배경에 박강우 사장의 존재가 있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강우가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세 기업의 성장으로 한국 경제는 부흥기를 맞이했다. 세 기업은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였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은 다시 한국 경제에 집중 투자를 했다. 취업률은 올라갔고, 실물 경제 역시 호황을 맞이했다.

    “저는 사업가로서 회사의 이익을 좇았을 뿐입니다.”

    “허허…. 박강우 사장이 이익을 좇았다고 하면 우리 마을에 있는 아이들도 웃겠습니다.”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오랜만에 만난 전직 대통령의 칭찬 세례에 멋쩍었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경제가 살아나니 국민은 정부의 경제 정책을 칭찬했다. 자연스레 높은 지지율로 이어졌고, 정부는 더 과감하게 정책을 펼쳤다.

    “그래요. 박강우 사장이 멋쩍어하니 내 얼굴에 금칠은 그만하겠습니다.”

    “하하….”

    대통령이라는 자리에서 벗어난 전직 대통령은 장난스러워져 있기도 했다.

    “오늘 갑자기 만나자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전직 대통령은 강우의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크게 놀랐다. 임기 때에도 절대 먼저 연락이 오는 일이 없던 강우였다. 아니 심지어 만나자고 연락을 해도 잘 만나주지 않던 강우였다. 그 당시 강우는 정권과 엮이는 일을 극도로 피했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음….”

    강우의 말에 전직 대통령이 침음성을 흘렸다. 강우의 눈빛을 확인한 대통령은 그 부탁이 무엇인지 대충 예감을 했다. 하지만 짐짓 모른 척 말을 이어갔다.

    “이제 퇴임을 한 평범한 사람에게 어떤 부탁을 하려는 겁니까?”

    “제가 정치를 해보려고 합니다.”

    강우의 말에 전직 대통령의 표정이 달라졌다. 예상은 했지만, 직접 들으니 놀랍고도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박강우 사장이 한 마리 백로라 생각했습니다. 고고하고 정직하고 겸손한 한 마리의 백로. 그런데 어찌 까마귀 노는 곳에 뛰어들려 하는 겁니까?”

    “그 까마귀들의 행패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강우의 답에 전직 대통령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자신 역시 그런 청운의 꿈을 안고 정치에 뛰어들었었다. 하지만 정치라는 판은 자신조차 오염시키는 무서운 곳이었다.

    ‘하지만…. 박강우 사장이라면….’

    전직 대통령이 눈을 뜨고 강우를 바라보았다. 신념이 가득 찬 강우의 표정에 지난날 자신의 모습을 엿보기도 했다.

    “내가 퇴임하고 나서 내 주변에 있는 많은 분께 줄곧 해주던 말이 있습니다. 절대로 정치는 하지 말아라. 바로 이 말입니다. 하지만 내가 정치를 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었습니다.”

    강우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이곳을 찾아온 이유도 바로 그 사람 때문이었다.

    “알 것 같습니다. 바로 지금 비서실장을 맡고 계시는 분이시죠?”

    “오?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전직 대통령이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강우에게 해준 말은 측근들이나 알고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강우는 미래 기억으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분이야 지지자분들 사이에서 워낙 유명하시지 않습니까?”

    전직 대통령이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맞습니다. 그 사람이야말로 정말 참된 인물이지요. 내가 그 사람의 친구라는 게 자랑거리입니다.”

    웃음을 멈춘 전직 대통령이 강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늘 내 또 한 명에게 같은 말을 하게 되겠군요. 박강우 사장이 정치에 뛰어드는 것은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참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왕 시작한 일 끝을 보고 싶습니다.”

    강우의 포부에 전직 대통령이 감탄성을 뱉어냈다. 강우의 말이 절대 허언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다. 강우는 여태껏 자신의 말을 실현하며 살아 온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나한테 하고 싶어 부탁이 바로 정계 진출을 도와달라는 것이겠지요?”

    전직 대통령이 부드럽게 웃었다. 물론, 퇴임한 자신이 강우를 지지한다면 부담스러운 일이 될 것이었다. 자신은 초야에 묻혀 정치를 잊고 살아가겠다 다짐했고, 약속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강우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어떤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도와줘야지. 암 그렇고말고.’

    상념에 빠진 전직 대통령에게 강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닙니다. 그런 부담을 드리기는 싫습니다. 저는 딱 한 명만 저와 함께해달라고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전직 대통령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껏 나눈 분위기상 강우가 말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알았다. 전직 대통령이 새삼 강우를 보며 감탄했다. 강우가 지칭하는 사람은 현 비서실장이었다. 그리고 현 비서실장이 수많은 정치계의 러브콜을 단호히 거절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으음…. 가장 쉬우면서도 어려운 부탁이군요.”

    가장 쉬운 것은 오랜 친구이기도 한 비서실장에게 강우의 부탁을 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또 가장 어려운 것은 정계 진출을 거부하는 비서실장을 어찌 설득하냐였다.

    “제가 직접 찾아가는 것보다 부탁을 드리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리만 만들어 주시면 그분이 어떤 선택을 하든 저는 만족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전직 대통령이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는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늦은 시간인 탓에 비서실장은 퇴근한 상태였다. 전직 대통령은 비서실장에게 사저로 와줄 수 있냐고 물었다. 비서실장은 알겠다며 곧 온다고 했다.

    “지금 출발을 한다고 하니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그동안 산책이나 좀 하시지요. 여기 밤경치가 아주 볼만합니다.”

    “네, 좋습니다.”

    전직 대통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우도 생각을 정리할 겸 좋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사저 밖으로 나왔다. 전직 대통령의 외출 소식에 경호팀이 분주해졌다.

    “이게 항상 미안한 부분입니다. 이 평범한 사람 한 명을 지키겠다고 고생을 너무 해요.”

    전직 대통령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당연한 예우이니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마십시오. 이 또한 절차이고 저들에게는 맡은 바 일 아니겠습니까?”

    강우의 말에 전직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한여름 밤의 시골 마을은 깊은 정적에 싸여있었다. 두 사람의 곁은 한 명의 경호원이 지켰다. 강우와 전직 대통령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마을을 산책했다.

    “그런데 정말 그 부탁이면 충분하겠습니까? 박강우 사장의 부탁이라면 내 조금의 비난을 감수하고 지지를 표해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여당에 말을 해서….”

    전직 대통령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강우에게 받은 많은 도움을 이렇게라도 갚고 싶은가 보다.

    “저는…. 새로운 당을 만들 생각입니다.”

    “아….”

    전직 대통령이 탄성을 뱉어냈다. 신당을 만들겠다니 정말 가시밭길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또 내심 가슴이 두근거렸다. 강우라는 인물이 만들어낼 새로운 정치의 모습이 어떨지 기대됐다.

    “그렇다면 비서실장이 필요하다는 이유는….”

    전직 대통령이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새로 만들 당의 초대 대표로 그분을 모실 생각입니다.”

    강우의 말에 전직 대통령이 감탄하며 말했다.

    “정말 탁월한 선택입니다. 역시 박강우 사장은 대단한 사람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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