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4화 (394/402)
  • 역시…. 내 아들답다.

    한남동 집 거실에 가족들이 모여있었다. 강우는 거실 중앙에 혼자 앉아있었고, 나머지 가족들은 반대편에 앉아있었다. 강우를 바라보는 가족들의 시선에는 여러 감정이 담겨 있었다. 강우는 그런 가족들의 시선을 담담히 마주했다.

    “갑자기 결정한 건 아니에요. 많이 생각하고 고민했어요.”

    강우의 입이 열리자 가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가족들 모두 어느 순간부터 이런 날을 예감했는지도 몰랐다.

    “나는 찬성이다.”

    제일 먼저 할아버지가 찬성 의사를 밝히셨다. 사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할아버지는 묵묵히 강우를 기다려 주었다. 강우가 아직 젊었으니 그리고 수호가 있으니 좀 더 가정에 충실한 시간을 가지기도 원했다. 정치는 타이밍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강우라면 분명 세상의 부름을 거절하지 않으리라 생각하셨다.

    “나도 찬성이다. 이거 진오가 엄청 좋아하겠구나. 이 편지에도 강우 너한테 잘 좀 말해달라는 부탁이 담겨 있었는데 이제 그럴 필요도 없겠고.”

    최준이 위진오에게서 받은 편지를 강우에게 내밀었다. 강우가 중국어로 쓰인 편지를 빠르게 읽어내려갔다. 편지에는 최준의 안부를 묻는 이야기와 강우를 잘 설득해달라는 말도 적혀 있었다. 강우가 편지를 읽으며 위진오를 떠올렸다.

    ‘양부님이 이렇게까지 나를 생각하시는 줄은 몰랐는데.’

    편지에는 강우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위진오는 강우야말로 진정한 지도자감이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위진오는 동북아 3국의 상생과 화합을 위해 강우가 꼭 필요한 존재라고도 적혀 있었다. 강우가 편지를 최준에게 돌려주었다.

    “열심히 세상을 바꿔보겠습니다.”

    “그래, 너라면 가능할 거야.”

    최준이 흐뭇하게 웃었다. 최준의 옆에 있던 김말숙도 강우를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강우같이 심성이 고운 아이라면 어디 가서나 항상 올바른 일을 할 거야.”

    “네, 할머니.”

    최준과 김말숙의 말이 끝나자 막내 할아버지도 입을 열었다.

    “기업인으로서 강우 너는 정말 많은 사회봉사를 하고 있어. 하지만 기업인의 자리와 정치인의 자리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강우 너라면 정치라는 진흙탕 속에서도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겠지.”

    “네, 막내 할아버지. 명심하겠습니다.”

    막내 할아버지도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끝나자 가족들이 아버지를 힐끗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강우가 알아서 잘하는 아들이었지만, 지금의 결정은 더욱 신중히 생각하고 싶었다.

    “음….”

    아버지가 짧은 침음성을 뱉어냈다.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강우와 함께 기업을 이루고 지금까지 키워 온 많은 과정이 말이다. 사실 아버지는 강우가 정치하는 것을 그리 찬성하지는 않았다. 사랑하는 아들이 지금처럼 기업을 이루며 행복하게 살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건 내 욕심이었던 건가…. 더 많은 사람이 그리고 세상이 강우를 원하고 있는데 말이지….’

    정치라는 괴물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잡아먹었는지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강우가 어려운 길은 가지 않았으면 했다. 그 생각은 한 자식의 아버지로서 지극히 정상적인 생각이었다.

    “나는…. 솔직히 반대했었다.”

    아버지의 말에 가족들이 숨을 죽였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시는지 두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 자신도 아버지와 큰아버지를 같은 이유로 학생운동을 못 하게 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가족이 누리는 이 행복. 그리고 너무 과분하다고 생각되는 많은 사람의 사랑을 우리만 누리는 것은 아니겠지. 강우 네가 필요한 많은 사람이 있으니 말이야. 아빠는 지금껏 그랬듯이 강우 너를 믿고 응원할게.”

    아버지가 강우를 향해 강한 신뢰의 눈빛을 지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아버지와 눈을 마주쳤다.

    “네, 아버지.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겠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훌륭한 아들이야.”

    아버지의 차례가 끝나자 당연히 어머니에게 시선이 쏠렸다. 어머니가 강우를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지금껏 늘 떠올리던 그 날을 떠올렸다. 차가운 원장실에서 가족들이 지내던 그날이었다. 평범한 아이들과 다를 게 없던 강우가 돌연 어른스러워진 날이었다.

    “나는 아들한테 너무 미안한 엄마였어요….”

    어머니는 그 고생이 강우를 너무 일찍 철들게 했나 생각했다. 그 생각에 항상 미안하고 미안했다. 조금은 더 세상을 즐기고 나이대에 맞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줬어야 했다. 하지만 갑자기 어른스러워진 아들은 가족을 지켜냈고, 아버지를 도와 기업을 일구었다. 흩어졌던 가족들을 다시 하나로 똘똘 뭉치게 만든 후에는 세상을 향해 도움의 손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강우는 저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 주었어요. 그리고 가족 모두를 이렇게 다 모아주었고요. 이제 더 많은 사람이 강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저는 그걸로 족해요.”

    어머니가 말을 끝내고는 강우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 강우가 뭉클한 감정을 느꼈다. 미래와 달라진 어머니의 행복한 삶에 뿌듯하고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엄마, 앞으로 더 행복하게 해드릴게요.”

    “그래, 고마워.”

    어머니의 눈시울이 더 붉어졌다. 옆에 있던 이나은이 그런 어머니를 살짝 안아주었다. 다음으로는 큰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강우라면 분명히 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야. 큰아빠는 항상 너를 응원한다.”

    “나도 강우야.”

    큰어머니도 강우의 결정을 응원해 주었다. 박선영과 박지영도 강우를 향해 찬성이라는 말을 해주었다.

    “강우 아니면 할 사람이 없지.”

    “언니, 우리 오랜만에 의견이 통일이다.”

    두 자매가 서로를 보며 픽하고 웃었다. 강우도 미소를 지었다. 그사이 손대진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자신도 무어라 한마디를 해야 했는데, 눈앞에 있는 강우는 그 존재감이 너무 거대했다.

    “나는 무조건 처남한테 한 표 던질게.”

    강우가 씩 웃으며 고맙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강용이의 차례가 되었다.

    “형이 하는 일이니까. 무조건 찬성.”

    강용이의 마지막 찬성표를 끝으로 가족회의가 끝났다. 수호는 심각했던 분위기가 끝나자 다시 활기를 찾았다.

    “아빠! 이제 세상을 지키러 가는 거야?”

    수호가 강우의 무릎에 앉으며 말했다. 강우가 웃음을 터트리며 수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가족들도 모두 웃음을 터트리며 수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 * *

    가족회의가 끝나고 늦은 밤. 한남동 집에 고요함이 찾아왔다. 주방에는 강우와 아버지가 마주 앉아있었다. 두 사람의 앞에는 술잔이 놓여 있었다.

    “한잔 받아라.”

    “네.”

    아버지가 강우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잔이 채워지자 소주의 알싸한 알코올 향이 강우의 코를 찔렀다. 강우가 소주병을 받아서 아버지의 잔에 공손히 술을 따라 주었다. 강우와 아버지가 단숨에 잔을 비웠다.

    “크….”

    두 부자가 동시에 소리를 내며 안주를 집어 먹었다. 어머니는 두 부자의 술자리를 위해 두부김치를 만들어 주었다. 아버지가 다시 강우의 잔을 채웠고, 강우도 아버지의 잔을 채웠다.

    “그럼 회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버지가 강우를 향해 물었다. 강우가 정치를 시작한다면 내려놓아야 할 직책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맡아서 이끌어 주셔야죠.”

    “음….”

    강우의 말에 아버지가 침음성을 흘렸다.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동양 그룹과 광복 그룹 내에서 강우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업무 처리는 물론이고 여러 사업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그런 강우가 자리를 비운다고 생각하니 조금 걱정이 됐다.

    “내가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구나.”

    하지만 강우는 아버지를 믿었다.

    “아버지라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해요. 전 아버지를 믿어요.”

    “고맙다.”

    강우가 아버지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강우가 지금 이끌어가던 것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은 아버지라는 든든한 존재가 있기에 가능했다. 아버지라면 충분히 동양 그룹과 광복 그룹을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동양 그룹은 내가 맞으면 될 거고, 광복 그룹은 진 사장이 있으니 든든할 테고. 그럼 사단법인은?”

    현재 사단법인 광복의 이사장은 강우였다. 그 자리 역시 강우가 내려놓아야 할 것 중 하나였다.

    “이사장 자리에 적격인 사람이 있긴 하죠.”

    “누구?”

    아버지가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씩 웃었다.

    “선영 누나요.”

    “그렇지. 선영이가 딱 맞겠네.”

    박선영은 사단법인 광복을 위해 오랜 시간 헌신해왔다. 그리고 독립유공자들과 후손 그리고 재단에서 지원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봉사하고 노력했다. 재단 내에서 박선영에 대한 평가는 매우 높았다. 박선영이라면 분명 재단을 지금과 같이 올바르게 이끌어 줄 수 있을 것이었다.

    “네, 선영 누나가 부담스러워하지만 않으면 좋겠는데요.”

    “꼭 하고 싶다고 할 거다.”

    강우와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생각났다는 듯 강우에게 물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역시나 여당에 입당하는 절차로 가는 건가?”

    아버지가 강우를 향해 물었다. 강우가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전 정권부터 지금까지 현재 여당은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강한 세력을 구성하고 있었다.

    ‘여당에 입당해서 정치에 뛰어든다면 정말 쉬운 길이 되겠지….’

    하지만 강우는 생각이 달랐다. 여당이 잘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강우가 원하는 정치의 모습과 완벽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게 쉬운 길은 맞겠죠. 그런데 저는 기존 정치의 틀을 따라가고 싶지가 않아요.”

    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강우라면 분명 다를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강우의 생각은 아버지의 예상대로였다. 아버지가 술잔을 들었다.

    “한잔하자.”

    “네.”

    강우와 아버지가 다시 술잔을 털어 넣었다. 그리고 동시에 두부김치를 집어 먹었다. 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눈을 빛냈다.

    “정치라는 것은 주류에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 싸움이지. 아무리 좋은 정책과 인물이 있다고 해도 인지도가 없으면 한 표 받기도 힘들고.”

    “그렇죠.”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많은 정치인이 인지도를 쌓고 자신의 이미지를 좋게 하려고 얼마나 노력하던가. 물론, 선거철에 한해서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강우 너는 새로운 당을 만들겠다는 이야기인 거지?”

    “네.”

    강우가 고개를 끄덕했다. 아버지가 감탄을 뱉어냈다. 강우는 새로운 길에서도 가장 힘들지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역시…. 내 아들답다.”

    강우가 씩 웃으며 말했다.

    “정치라는 게 정말 국민을 위한 것이 되려면 정당의 구성원부터 정말 사람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정확히 아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냥 바둑을 두듯 서로 수 싸움을 하고 한 수 물리고 이런 정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가 아니니까요.”

    강우의 말은 남들이 듣기에는 너무 이상적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강우의 능력을 알았다. 강우라면 분명 그런 사람들을 찾아낼 것이라고 말이다. 강우는 사람을 보는 눈이 정말 정확했다.

    “그래, 기존 정치인들이 들으면 허황한 소리라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강우 너라면 분명 그런 정치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네, 반드시 그럴 거예요.”

    강우가 눈을 빛냈다.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세상을 바꾸어 놓겠다 다짐했다.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으로 말이야.’

    생각을 마친 강우가 아버지의 잔에 술을 채웠다. 그렇게 강우와 아버지의 술자리가 밤새 이어졌다. 두 부자는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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