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3화 (393/402)
  • 때 되면 하겠죠.

    지이잉-

    한남동의 차고 문이 올라가고, 강우가 운전하는 SUV가 차고로 들어섰다. 주차를 마친 SUV의 문이 열리고 수호가 폴짝 뛰어내렸다.

    “내가 왔다!”

    수호가 후다닥 차고를 통해 정원으로 올라갔다. 뒤따라 SUV에서 내린 이나은이 수호의 뒷모습을 보며 소리쳤다.

    “수호야, 넘어져. 박수호!”

    하지만 수호는 이미 모습을 감춘 후였다. 이나은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누굴 닮아서 저렇게 장난꾸러기인지.”

    “나는 아님.”

    마침 주차를 끝내고 내린 강우가 자기는 아니라면서 강력하게 부인했다.

    “사실…. 나를 닮은 건가 싶기는 해.”

    “응?”

    이나은이 싱긋 웃으며 계단을 통해 정원으로 향했다.

    멍! 멍!

    정원에서 장군이와 루피의 소리가 들려왔다. 수호가 대장 놀이를 하는 게 분명했다.

    삐빅-

    강우가 차 문을 잠그고는 이나은의 뒤를 따라 정원으로 올라갔다. 역시나 정원에는 수호가 늠름한 자세를 취한 채 서있었다.

    “장군! 루피! 앉아!”

    이미 여러 번 겪은 상황이었을까. 장군이와 루피가 일사불란하게 자리에 앉았다. 수호가 장군이와 루피를 향해 간식을 내밀었다. 집에서부터 분주히 무언가를 챙기더니 개들을 위한 간식이었나 보다. 장군이와 루피가 간식을 받아먹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수호를 향한 충성심의 원인은 바로 이 무한히 주어지는 간식인 게 분명했다.

    “조금만 놀고 들어와.”

    이나은이 수호를 향해 말하며 현관으로 들어갔다. 뒤를 이어 올라오는 강우를 보고 장군이와 루피가 움찔했다.

    “기다려.”

    하지만 수호의 지시에 이내 움직임을 멈추고 꼬리를 흔들 뿐이었다. 강우가 장군이와 루피를 쓰다듬어 주었다. 사실 장군이와 루피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강우였다. 하지만 간식 앞에 명견 없었다.

    “수호야, 장군이랑 루피 간식 너무 많이 주면 안 된다? 건강 나빠져.”

    “응, 아빠.”

    수호가 알겠다고 했다. 강우도 현관으로 향해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주말을 맞이한 한남동 집은 가족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강우, 왔어?”

    거실에 있던 박지영이 강우를 보더니, 손을 들어 인사했다. 강우도 반갑게 웃으며 박지영에게 인사했다.

    “잘 지냈어?”

    “나야, 잘 지냈지.”

    박지영은 대학을 졸업하고 동양 그룹에 취업했다. 물론, 특혜를 준 것은 절대 없었다. 정정당당하게 본인의 실력으로 신입사원 모집에 합격했다. 박지영은 동양 무역을 다니며 철저하게 자신의 신분을 숨겼다. 강우가 자신의 사촌이라는 것을 말이다.

    “매형은?”

    “아빠랑 집에 있어.”

    박지영은 광복 그룹을 다니며 만난 남성과 결혼을 했다. 그렇게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얼마 전에는 임신도 했다. 강우에 비하면 늦게 결혼을 한 편이었다.

    “선영 누나는?”

    “오늘 봉사 있다고 나갔어. 아마 저녁 늦게 올걸?”

    박선영은 아직 미혼이었다. 사단법인의 일에 매진하고 있는 박선영은 결혼 생각이 없다고 말하고는 했다.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의 유일한 걱정거리 중 하나였다. 하지만 강우는 미래 기억으로 알고 있었다.

    ‘미래 기억에서 선영 누나는 결혼한다. 하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참 몸 고생 마음고생이 심했지….’

    그 기억 때문에 강우는 차라리 미혼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몇 번이고 박선영에게 말 좀 해보라는 것도 묵묵히 웃기만 했었다.

    ‘뭐…. 운명이 있다면 누나도 언젠가 결혼하겠지.’

    덜컥.

    그때, 문이 열리고 큰아버지와 박지영의 남편이 들어섰다. 훤칠한 키에 깔끔한 외모를 가진 남성의 이름은 손대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손대진은 동양 그룹 해외 무역 파트에서 일하고 있었다. 직급은 대리였다. 다만 업무 능력이 뛰어나 조만간 과장 승진을 앞두고 있었다. 물론, 아직은 강우만 아는 사실이었다.

    “어? 강우 왔구나.”

    “네, 큰아버지.”

    강우가 꾸벅 인사를 했다. 강우를 발견한 박지영의 남편 손대진이 인사를 건네왔다.

    “사…. 아니 처…. 처남.”

    결혼을 한 지 제법 시간이 흘렀지만, 손대진은 강우가 참 어려웠다. 자신이 다니는 그룹의 주인이자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지 않던가.

    “매형 오셨어요?”

    강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강우와 박지영은 동갑이었지만, 생일은 박지영이 빨랐다. 그리고 박지영의 남편은 강우보다 나이가 많았다. 강우와 박지영은 서로 편하게 말을 하며 대했지만, 강우는 박지영의 남편에게는 존대했다.

    “손 서방, 집에서는 편하게 대해도 된다니까.”

    강우를 어려워하는 사위를 보며 큰아버지가 웃음을 터트렸다. 손대진이 움찔했다. 사실 박지영의 가족들을 알고 나서 얼마나 놀라 까무러쳤었는지 몰랐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문가가 바로 강우네 가족이 아니던가. 맨 처음 사실을 알았을 때는 결혼을 심각하게 고민했을 정도였다.

    -난 나고. 내 가족이 결혼의 배경에 뭐가 중요해? 오빠 나 안 사랑해?- 라고 당당하게 물어보는 박지영 덕분에 결혼했지만, 여전히 어렵기는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네, 장인어른.”

    손대진이 강우를 보더니, 결심한듯한 표정을 지었다.

    “처남, 오늘 술도 한잔하고 가는 거지?”

    “오~ 좋죠.”

    강우도 편하게 말을 하는 손대진이 오히려 편했다. 가족끼리 어려워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럼,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면 되겠네.”

    큰아버지가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온 가족이 모인 지금, 이 순간이 참 좋았나 보다. 강우도 오늘은 하룻밤 머물 생각으로 온 것이었다. 오늘 가족들과 나눌 이야기가 참 많았으니까 말이다.

    “네, 오늘 자고 가려고 다 챙겨 왔어요.”

    “수호가 엄청나게 좋아하겠네.”

    큰아버지가 수호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수호는 박 씨 가족의 마스코트였다. 모든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어? 형 왔어?”

    그때, 북적거리는 소리를 듣고 강용이가 방에서 나왔다. 부스스한 머리에 퀭한 얼굴을 보니 시나리오 작업이 고됐나 보다.

    “어, 밤새 시나리오 작업한 거야?”

    “응…. 마무리 작업 중인데 끝부분이 잘 안 써지네.”

    강용이가 머리를 긁적였다. 강우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럼 형이 좀 봐줄까?”

    “진짜? 좋아.”

    강용이가 환하게 웃었다. 훌쩍 커서 대학생이 되었지만, 가끔 이렇게 어릴 적 표정이 나오는 강용이었다. 강우는 커버린 강용이를 보며 세월을 느끼고는 했다.

    “일단 어른들한테 인사드리고.”

    “엉. 그럼 나는 나가서 수호랑 좀 놀아줄게.”

    강용이도 수호가 많이 보고 싶었는지 곧장 정원으로 나갔다. 현관문이 열리자 수호가 좋아하며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강우가 픽 웃으며 할아버지 방으로 향했다.

    똑똑.

    “들어와.”

    방 안에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짝 기침이 섞인 목소리였다. 강우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할아버지가 창문 밖을 바라보고 계셨다.

    “할아버지, 저 왔습니다.”

    “그래, 강우 왔구나.”

    5년이라는 세월에 할아버지는 백발이 되어 계셨다. 연세가 많은 분들에게는 1년이라는 시간도 빠르게 늙어가는 세월이었다. 하지만 아직 눈빛에는 생기가 가득하셨다. 강우가 할아버지 앞에 앉았다.

    “오늘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래?”

    할아버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강우가 이렇게 먼저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할 때는 범상치 않은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네, 있다가 저녁 먹고 가족들 다 모이면 말씀드릴게요.”

    “허허…. 녀석 궁금하게.”

    강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그리고는 화제를 돌렸다.

    “병원 건강검진은 다녀오셨어요?”

    “아주 건강하다고 하는구나. 하긴 건강하지 않을 리가 없지.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담배도 끊은 지 한참이고 매일 운동하고 좋은 것만 먹으니 말이다.”

    “다행이에요.”

    강우의 말에 할아버지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강우, 네 표정을 보면 이 할아비가 백 살은 넘게 살아야 만족할 눈치야.”

    “당연하죠. 백 살이 아니라 더 오래 사셔야죠.”

    “예끼! 녀석아. 염라대왕이 화들짝 놀랄 소리 하지 마라.”

    강우와 할아버지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큰할아버지랑 막내 할아버지는 어디 계세요?”

    “형님은 형수님이랑 산책하러 나가셨고, 막내는 선영이랑 같이 봉사 나갔어.”

    막내 할아버지는 건강을 되찾은 후 사단법인의 일에 크게 관심을 보였다. 고아원을 운영했던 경험도 있으니 사회봉사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 막내 할아버지는 조금씩 사단법인 광복의 봉사 활동에 참여하셨다. 연세가 있었지만,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하루하루가 즐겁다고 하셨다.

    “그럼 저녁 늦게 오시겠네요.”

    “그렇겠지.”

    강우가 한쪽에 있는 바둑판을 힐끗 바라보았다. 할아버지가 강우의 시선을 느끼고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바둑 한판 두려나?”

    “네.”

    강우가 바둑판을 들고 와 가운데 놓았다. 할아버지는 그동안 이어진 연패의 사슬을 끊겠다며 전의를 다지셨다. 강우와 할아버지가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방 안에 고요함이 흐르고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둘째는 안 만들 생각이야?”

    전세가 불리해지자 할아버지가 기습 질문을 해오셨다. 강우가 할아버지의 의도에 웃음을 참으며 답했다.

    “생각 중이에요.”

    “지…. 진짜?”

    한동안 둘째 생각은 없다던 강우였다. 오늘 갑자기 둘째 계획이 있다고 하니 되려 놀라는 할아버지였다. 그때부터 할아버지의 수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대국은 강우의 승리로 끝났다.

    “에잉~ 오늘도 졌어.”

    할아버지가 못마땅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강우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덜컥.

    “할아버지!”

    그때, 문이 열리고 수호가 뛰어 들어왔다. 밖에서 얼마나 뛰어놀았는지 땀 냄새와 풀냄새가 뒤섞여있었다. 할아버지의 얼굴에 해가 뜨듯 환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아이고! 우리 증손자!”

    “할아버지! 진지 잡수세요.”

    수호가 공손히 인사를 하며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할아버지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우도 자리에서 일어나 수호를 향해 말했다.

    “수호는 가서 씻고 와야겠다.”

    “응.”

    거실로 나오자 최준이 돌아와 있었다. 저녁 늦게 온다던 막내 할아버지와 박선영도 돌아와 있었다. 강우가 먼저 최준에게 인사했다.

    “산책 잘 다녀오셨어요?”

    “그래, 강우야. 나이가 더 드니까 이제 걷는 것도 힘들어.”

    5년이라는 세월에 최준도 더욱더 늙어있었다. 할아버지보다 연세가 많으니 건강에 특히 신경을 써야 했다.

    “건강 잘 챙기세요. 아 그리고 양부님이 편지 전해 드리라고 하셨어요.”

    강우가 품에서 위진오의 편지를 꺼냈다. 최준이 상기된 표정으로 편지를 받았다. 그리고는 바로 뜯어 읽어내려갔다. 편지를 읽는 최준의 표정은 정말 행복했다.

    “봉사 잘 다녀오셨어요?”

    강우가 막내 할아버지에게도 인사했다. 막내 할아버지는 오히려 더욱 건강해져 계셨다. 평생을 괴롭혀 오던 피부병이 말끔히 치료된 이후 점점 건강해진 것이다.

    “그럼, 오늘은 서울에 있는 고아원에 들러서 봉사하고 왔어. 아이들이 어찌나 좋아하던지.”

    “좋으셨겠어요.”

    “좋지. 좋아.”

    막내 할아버지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박선영과는 손을 들어 가볍게 인사했다.

    “누나.”

    “어, 왔어.”

    특별한 것 없는 짧은 인사였지만, 서로에 대한 애정이 엿보이는 표정이었다.

    “자자! 다들 식사하러 오세요.”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 식사 준비가 끝났다. 강우와 가족들이 커다란 식탁에 둘러앉았다. 온 가족이 다 모이니 마치 연회장에 모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상차림도 훌륭했다.

    “다들 먹자꾸나.”

    할아버지의 말과 함께 식사가 시작됐다. 수호는 그새 강용이 옆에 붙어서 밥을 먹었다. 강용이에게 연신 질문을 퍼부었다. 강용이는 귀찮지도 않은지 일일이 답을 해주었다.

    “수호야. 삼촌 체하겠다.”

    이나은의 만류도 소용없었다.

    “나 오늘 삼촌이랑 잘래.”

    오히려 강용이와 같이 자겠다며 선언을 하는 수호였다. 강용이는 그게 너무 귀여운지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그러자고 했다. 모두가 화기애애한 식사 속에서 유독 한 명이 경직되어 있었다.

    “여보, 왜 그래? 편하게 먹어.”

    “어…. 어….”

    이제 막 가족 구성원이 된 손대진이었다. 큰어머니가 사위 사랑을 실천한다고 열심히 반찬을 올려주었다. 손대진은 그게 또 부담스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선영이 남편은 누구이려나.”

    큰아버지는 그런 모습을 보며 기회다 싶었나 보다. 박선영을 힐끗 보며 슬쩍 입을 열었다. 박선영은 늘 그랬다는 듯 밥에 집중했다.

    “때 되면 하겠죠.”

    아버지가 박선영의 대변인을 자처했다. 어머니가 박선영을 보며 싱긋 웃었다.

    “선영이가 자기 앞가림 못하는 것도 아니고. 알아서 하겠죠.”

    든든한 지원군의 등장에 박선영이 씩 웃었다. 그렇게 대가족의 식사가 끝날 무렵에 강우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가족 모두가 화들짝 놀랐다. 대식가 강우가 먼저 숟가락을 내려놓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강우에게 쏠렸다.

    “음…. 갑자기 이런 말 해서 죄송한데요.”

    강우의 진지한 표정에 가족들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강우가 결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 정치…. 정치라는 거 해보려고 합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어느 순간.

    딸꾹.

    어찌나 놀랐는지 손대진이 딸꾹질을 했다. 모두의 시선이 손대진을 향했다. 손대진이 입을 틀어막았다.

    “죄….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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