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2화 (392/402)
  • 역시 통이 커. 배포가 달라.

    종로에 있는 법무법인 광복 사무실에 강우와 연정호가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은 초조한 표정으로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기겠지?”

    초조함이 흐르는 적막을 깨고 강우가 물었다. 연정호가 긴 숨을 뱉어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길 거야. 너무 걱정은 하지 말자.”

    “그럼 미안한데 입술 좀 그만 잘근거려줄래?”

    연정호가 움찔하며 입술을 쓱 만졌다. 긴장하면 나오는 연정호의 버릇은 입술을 잘근거리는 것이었다. 연정호도 질세라 강우를 보며 말했다.

    “그럼 너도 볼 좀 그만 긁적이던가.”

    “음….”

    강우도 움찔하며 볼을 긁적이던 손을 쓱 내렸다. 그렇게 강우와 연정호는 서로의 긴장감을 풀어주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픽 웃었다.

    “하긴…. 그동안 계속 승소했는데 걱정하는 것도 그렇긴 하네.”

    “그러니까. 일단 결과 나올 때까지 기다려 보자고.”

    지난 5년 동안 법무법인 광복은 위안부 피해 할머님들의 소송과 강제징용을 당한 피해자분들의 소송을 진행해왔다. 그리고 계속해서 승소를 해왔다. 과거사 진상규명법이 통과되고 나서부터는 소송을 진행하는데 막힘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은 두 가지 소송 중 강제징용 소송의 결과가 나오는 날이었다.

    “......”

    “......”

    그렇게 침묵이 계속해서 흐르던 순간이었다. 두 사람이 있는 사무실 문이 열리고 직원 한 명이 들어왔다. 강우와 연정호의 시선이 동시에 직원을 향했다. 직원이 환한 표정을 지으며 소식을 전했다.

    “연락 왔습니다. 승소라고 합니다!”

    직원의 말에 강우와 연정호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오랜 소송전의 끝이 보이는 것이었다.

    “드디어 끝나는구나.”

    연정호가 긴 숨을 뱉어냈다. 한국 법원에서 벌어진 소송에서 승소한 이후 일본의 제철 회사가 불복해 항소했다. 길고 길었던 소송전의 최종선고에서 법무법인 광복이 아니 응당 승리해야 할 사람들이 승소한 것이었다.

    “이제 산 하나는 넘었구나.”

    “그래, 이제 또 다른 산이 남았지.”

    또 다른 산이란 연정호가 담당하고 있는 위안부 피해 할머님들의 소송이었다. 위안부 소송은 강제징용 소송보다 더 민감한 사항이었다. 강제징용 소송은 일본의 철강 회사를 상대로 한 소송이었다. 하지만 위안부 피해 소송은 일본 정부가 상대였기 때문이었다.

    ‘미래 기억에도 일본 정부는 이 문제를 매우 민감하게 생각했다. 수차례나 덮어버리려고 한국 정부와 협의를 진행하기도 했었지.’

    하지만 일본 정부는 단 한 번도 위안부 할머님들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그것은 군국주의 시절 벌인 자신들의 만행을 인정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이유로 소송은 장기전으로 가고 있었다.

    “위안부 소송도 우리가 이길 거다. 증거들은 차고 넘치니까.”

    강우가 연정호를 향해 말했다. 강우는 독립운동 역사박물관을 채우기 위해 문화재 컬렉터를 고용했었다. 강우는 컬렉터에게 한국 문화재를 아낌없이 사들이라고 주문했다. 동양 그룹과 광복 그룹의 어마어마한 자본금 지원을 받은 컬렉터는 한국의 문화재를 쓸어 담듯 모아왔다. 그리고 그중에는 일본의 위안부 만행을 증명하는 옛 문서들도 있었다.

    “일본 정부는 끝까지 사과할 생각이 없어 보여. 난 그게 걱정이다. 할머니들은 돈을 원하시는 게 아닌데 말이지.”

    “사과하는 날이 올 거다. 반드시.”

    강우가 눈을 빛냈다. 연정호가 강우를 보며 씩 웃었다.

    “그래, 정부도 일본에 사과를 강하게 압박하는 그런 날이 오겠지.”

    연정호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연정호 역시 강우의 위치가 점점 어디로 흘러가는지 예상하였다. 강우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 있고 관심을 받는 남자였다.

    “이제 속 시원하게 점심이나 먹으러 갈까?”

    “좋지.”

    말을 마친 강우가 연정호의 방을 나섰다. 방을 나서자 넓은 사무실에는 법무법인의 직원들이 모여있었다. 연정호의 개인 사무실이 있는 층에는 수백 명이 넘는 직원 중 일부가 사용하고 있었다. 모두 법무법인 광복이 맡은 소송 중 가장 어려운 강제징용과 위안부 피해 소송을 담당하는 직원들이었다.

    “다들 소식 들었나 본데?”

    연정호가 강우를 향해 속삭이듯 말했다. 두 사람이 사무실을 나오자 직원들의 상기된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다. 강우가 직원들을 쓱 훑어보았다. 연정호가 강우를 툭 쳤다.

    “이거 한마디 해야 할 분위기다.”

    “그런가….”

    강우가 씩 웃으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주변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늘 우리는 하나의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순서였겠지만, 참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강우의 말에 직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환호성을 질렀다. 강제징용 소송을 진행하며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고위층에서 압박이 들어오기도 했었고, 변호사들은 법조계 선배들에게 한 소리를 듣기도 했다. 강제징용 소송에 참여하는 피해자분들이 늘어날수록 견제는 심해졌다.

    “우리는 많은 견제와 압력 속에서도 소송을 진행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직원 여러분이 겪었던 고충들이 많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강우가 직원들을 향해 정중히 인사를 했다. 법무법인 광복에 소속된 변호사들과 직원들의 사명감에 강우는 늘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다. 강우의 정중한 감사 표현에 직원들이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어떤 일을 하든지 힘들지 않은 부분이 있겠는가. 거기에 비하면 법무법인 광복은 직원들의 대우도 후했고, 복지도 뛰어났다. 그런데도 강우는 세심하게 직원들의 마음마저 살펴주는 것이었다.

    “아닙니다! 저희는 항상 행복합니다!”

    직원 중 누군가가 강우를 향해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커다란 박수 소리가 사무실을 가득 메웠다. 강우를 향한 고마움이었고, 자신들의 일에 대한 자부심이 담긴 것이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이제 우리는 위안부 소송이라는 커다란 산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 약자들과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억울한 피해자들을 돕는 일에도 더욱더 박차를 가할 겁니다.”

    강우의 말에 박수 소리와 환호성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모두가 강우를 보며 눈을 빛냈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법을 이용해 돈을 쉽게 벌 방법은 많습니다. 다른 법무법인처럼 굵직한 사건들 그리고 부자들을 위한 소송들을 담당하면 되니까요. 일도 쉬울 겁니다. 소송은 일사천리로 승리를 향해 달려갈 것이고, 주변의 압력이나 방해도 없겠죠.”

    연정호가 멍한 표정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의 입에서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도 입에 담기를 꺼리는 불편한 진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직원들 역시 숨을 죽였다. 강우의 몸에서 강한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우리 법무법인이 그런 일을 하게 될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저희는 지금처럼 계속해서 어려운 길을 걸을 겁니다. 하지만 그 끝에 있는 보상은 그 어느 것보다 값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느끼는 그 뿌듯함 그리고 정의감을 절대 잊지 말아 주세요.”

    강우의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길게 한 것 같군요. 오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점심은 제가 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위한 특별 보너스도 준비될 예정입니다.”

    강우의 말에 엄청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 환호성을 뚫고 연정호가 강우의 어깨를 두들겼다. 강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연정호가 눈을 빛내며 강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하자.”

    “그래.”

    강우와 연정호가 사무실로 다시 들어갔다. 연정호가 궁금해 죽겠다는 듯 바로 질문을 던져왔다.

    “너, 오늘 한 이야기 평소랑은 조금 다르다?”

    “뭐가?”

    강우가 씩 웃었다.

    “마치 지금까지 해오던 일을 내려놓고 어디로인가 훌쩍 떠날 사람 같은 느낌?”

    “역시 전직 검사의 직감은 예리한데?”

    “뭔데? 너 설마….”

    연정호가 반색을 하며 강우를 바라보았다. 사실 연정호야말로 강우의 정계 진출을 누구보다 밀었던 사람이었다. 연정호는 기득권들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강우와 같이 강단 있고, 능력 있는 리더가 필요하다고 늘 말했었다.

    “아직 확실히 마음을 굳힌 건 아니다. 몇 군데 더 들러서 내 마음을 확인받고 싶거든.”

    “잘 생각했다. 너야말로 진정한 지도자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야.”

    “음…. 비행기 너무 태우는 거 아니냐?”

    강우의 말에 연정호가 무슨 소리냐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이게 무슨 비행기냐? 생각해봐라. 지금껏 네가 손을 댄 것들은 전부 올바른 길을 찾아갔어. 동양 그룹과 대진 그룹은 사회에서 가장 칭송받는 정직한 기업이고, 소속되어 있는 직원들은 삶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느끼며 살고 있다. 그뿐이냐? 사단법인 광복은 진정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있다. 사회를 위한 봉사와 공헌에 앞장서고 있고, 우리 법무법인도 법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아낌없이 노력하고 있지.”

    연정호가 계속해서 열변을 토해냈다.

    “중국과의 외교 문제를 해결한 것도 강우 너고. 지금 주석인 위진오 님께서도 네가 한국의 지도자가 되기를 바라고 계신 듯하지. 그게 아니면 기업인 FTA 외교 사절이라는 전대미문의 일을 벌이지도 않으셨을 테니까.”

    강우가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연정호 역시 위진오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 네가 기업인으로서 세상을 바꿨다는 거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너도 알잖냐. 기업인으로서 한계는 분명히 존재해. 너는 더 높은 곳으로 가야 한다.”

    “그런 건가….”

    연정호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강우라는 강한 확신하는 연정호였다.

    “망설이지 말고 뛰어들어. 네가 자리를 비워도 지금 네가 이루어놓은 것들은 흔들리지 않는다. 너를 도울 사람들은 많아. 가족들도 있고, 우리 친구들도 있고.”

    “맞아. 나는 참 복 받은 놈이지.”

    강우가 씩 웃었다. 강우의 긍정적인 반응에 연정호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난 5년 동안 수없이 말했지만, 고집불통 강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생각을 바꾸어 먹었으니 정말 기분이 좋았다.

    “네 결정이 세상에 알려지면 긴장하는 사람들 엄청 많겠다. 정당들도 한바탕 난리가 날 거고.”

    “음…. 생각해 놓은 게 있긴 한데….”

    강우의 말에 연정호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정식 코스대로라면 기존 정당에 들어가서 비례대표로 입문을 하거나 바로 공천을 받아 후보로 나서는 걸 텐데. 왠지 너라면….”

    연정호가 말끝을 흐렸다. 강우라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우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해주마.”

    “그래, 알겠다.”

    연정호가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강우를 보며 입을 열었다.

    “강우, 너의 초대 보좌관 자리는 무조건 내 거다. 절대 다른 사람 쓸 생각하지 마라.”

    “어? 네가?”

    강우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연정호가 당연한 거 아니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다른 사람 쓸 생각이었어? 아…. 걱정하지 마라. 위안부 소송은 끝내놓고 시작할 거니까. 어차피 네가 당장 정치에 뛰어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하긴…. 그렇지.”

    연정호의 말이 맞았다. 강우는 현재 많은 것들을 책임지고 있었다. 그 자리들을 모두 내려놓고 정리를 하려면 제법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었다.

    “그러니까. 네가 정리가 끝나고 나면 내가 네 옆에서 도와줄 수 있게 허락해줘.”

    “그래, 고맙다.”

    연정호가 씩 웃었다.

    “네가 나한테 해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대화를 마친 강우와 연정호가 다시 방을 나가 직원들과 점심을 함께했다. 직원들이 많은 관계로 식당을 가지는 못하고 근처의 맛집에서 포장과 배달을 시켰다. 물론, 강우는 통 크게 전 층의 직원들에게 점심을 샀다.

    “역시 통이 커. 배포가 달라.”

    그런 강우를 향해 연정호가 엄지를 ‘척’ 하고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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