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7화 (387/402)
  •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광복이의 이름은 이제부터 수호다.”

    할아버지가 지어오신 이름은 수호였다.

    “이름이 정말 좋네요.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강우도 수호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몸조리를 위해 바닥이 아닌 소파에 앉은 이나은도 연신 새 이름을 되뇄다.

    “박수호. 할아버님, 이름이 너무 멋져요.”

    “그래, 자고로 자신을 지키고 나아가 가족을 지키고 나라를 지키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 나는 우리 수호가 그런 큰 인물이 되었으면 한다.”

    할아버지의 말에 아버지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역시 박수호라는 이름이 마음에 무척 들었다.

    “아버지, 이름이 정말 좋습니다.”

    “그래, 우리 강우가 이제 집안을 이렇게 일으켰으니 수호의 대에서는 더 많은 사람에게 베풀고, 더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나아가서는 우리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었으면 좋겠구나.”

    할아버지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나갔다. 살아생전 증손자까지 본 자신은 정말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루하루가 행복한 지금이 너무나도 감사할 뿐이었다.

    “네, 할아버지 우리 수호 좋은 인물이 될 수 있게 잘 키우겠습니다.”

    “그래, 우리 강우라면 걱정할 것도 없지.”

    할아버지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생각났다는 듯 강우를 바라보았다.

    “기자들이랑 인터뷰한 게 신문에 난리가 났더구나.”

    “네….”

    산부인과에서 가졌던 기자들과의 인터뷰가 나간 상태였다. 기사가 나가고 또 엄청난 이슈가 되었다. 일단 강우와 이나은의 2세가 태어난 것에 대한 사람들의 축하가 쏟아졌다. 강우 커플에 대한 사람들의 호감만큼 엄청난 반응이었다. 동양 그룹의 본사로 축하선물은 물론이고, 편지가 쏟아졌다.

    ‘그룹 홍보실에서 일일이 감사 인사를 전하느라 엄청 애먹었다고 들었는데….’

    늘 그렇듯 강우는 받은 것보다 두세 배로 돌려주었다. 축하해준 모든 사람에게 상품권을 보내거나 그룹 차원에서 답장해주고는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슈가 있었다. 바로 강우의 마지막 발언 때문이었다. 정계 진출 질문을 한 기자에게 강우는 운명이 이끄는 대로 갈 뿐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내 운명의 끝이 결국 정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쏟아지는 기사들은 강우가 금세라도 정치에 뛰어들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그런 기사를 접하는 많은 국민은 강우가 나서야만 한다고 말을 했다. 여론 조사기관에서는 벌써 강우의 정계 진출 성공 여부를 묻는 설문을 진행하기도 했다.

    ‘후….’

    강우가 속으로 크게 한숨을 쉬었다. 강우는 정말 정치를 할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요새 들어서는 정말로 운명이라는 것이 자신을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음을 느꼈다.

    “강우야.”

    할아버지가 강우를 진중한 목소리로 불렀다. 강우가 상념을 깨고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표정에도 망설임이 보였다. 하지만 이내 긴 숨을 뱉어낸 뒤 입을 열었다.

    “광복을 맞이하고 이 할아비 역시 정치계에 입문을 제의받은 적이 있었다. 그 당시 할아비의 고향에서 기호 1번으로 국회의원 출마를 제의받았었지….”

    강우와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말에 집중했다.

    “아버지, 그때가 아마 제3대 민의원 선거였죠?”

    “그래, 맞다. 그때 나는 여당의 기호 1번 후보로 선거에 나설 것을 권유받았었지.”

    3대 국회의원 선거는 여당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던 선거였다. 기호 1번만 받으면 지나가던 개도 당선된다던 그런 시절이었다.

    “하지만 내가 어찌 그들과 같은 소속을 두고 살아갈 수 있단 말이더냐? 정치계에는 이미 친일파들이 득세하고 있었다. 나의 원수들이 죽어간 내 동료들의 원수들이 나라를 위해 일한다며 가면을 쓰고 위선을 행하고 있었지.”

    “.....”

    할아버지의 몸에서 날카로운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세월이 지나 노쇠한 몸이었지만, 아직 그 분위기만은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3공화국 시절에도 이 할아비는 대통령에게서 직접 장관 자리를 권유받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역시 나는 거절했다.”

    할아버지가 잠시 숨을 고르셨다.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할아버지에게 따듯한 물을 떠다 드렸다. 할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고맙다고 한 후 물을 마셨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어가셨다.

    “정식아.”

    “네, 아버지.”

    할아버지의 부름에 아버지가 잔뜩 긴장했다.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향해 물었다.

    “네가 대학생 시절 때. 이 아비가 너와 네 형에게 절대 하지 말라던 것이 무엇이더냐?”

    “학생운동입니다.”

    아버지가 망설임 없이 답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의 자부심과 긍지가 큰아버지와 아버지에게도 왜 없었겠는가. 큰아버지와 아버지 역시 젊은 시절 잘못된 나라의 상황을 참지 못했었다.

    “그래, 너희 둘이 첫 학생운동으로 경찰서에 잡혀갔던 날 기억하느냐?”

    “네, 그날 아버지께서 경찰서에 와서 저랑 형을 꺼내주셨던 거 기억합니다.”

    아버지가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경찰서장은 독립유공자인 할아버지에게 정말 깍듯했었다. 그리고 큰아버지와 아버지에게 다시는 사고를 치지 말라고 한 후 풀어주었다.

    “그래, 그때의 나는 너랑 네 형이 허망한 일에 매달려 젊음을 낭비한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이미 저들의 것이 되었고,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지.”

    할아버지의 얼굴에 후회의 빛이 가득 차올랐다.

    “어쩌면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온 많은 동료가 그런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구나. 그리고 정신적 지도자나 다름없는 백범 선생님의 죽음 이후 더 그랬던 것일 수도 있고….”

    많은 독립운동가가 이미 친일파들이 득세한 조국에 실망하고 등을 돌렸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외세의 탄압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들에게 같은 민족과 싸움까지 하기에는 지친 상태였을 것이다. 할아버지도 그런 이유로 세상을 등지고 사업에만 몰두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나도 그리고 다른 동료들도 후회했을 거야…. 우리는 그때 물러서지 말고 싸웠어야 했어. 같은 민족이라 하여 일말의 안심을 하고 자포자기했던 우리가 지금의 나라를 만든 것일지도 몰라.”

    그 역사의 시작으로 독립운동가들은 세상에서 잊혔다. 후손들은 가난과 무지를 강요당했다. 세상은 거짓으로 이루어낸 기득권들의 세상이 되었다. 뿌리가 바르지 못한 나라에는 늘 잡음이 일었다. 많은 사람이 그 잘못을 고치려고도 했지만, 그 힘이 너무 미약했다. 강우가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모두 내 잘못이라 생각한 적도 많아….”

    강우가 고개를 저었다. 친일파들이 득세한 것이 어찌 할아버지와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잘못이란 말인가. 모두 나라가 힘이 없어서였다.

    “할아버지, 그건 절대 아닙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할아버지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강우가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조국의 역사는 지금껏 이어지고 있었다.

    “정치는 마약과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청렴하고 깨끗한 사람일지언정 한 번 발을 담그면 헤어나오지 못할 구렁텅이로 몰아가지. 그래서 나는 정치에 뛰어드는 것이 싫었다. 네 아비와 큰 아비가 혹여나 정치에 뛰어들까 학생운동도 막았다.”

    할아버지가 회한에 가득 찬 숨을 뱉어냈다.

    “그저…. 가족을 이루고 부족함 없이 행복하게만 살겠다 다짐했었다. 물론…. 그것조차 제대로 건사하지 못했지만 말이야…. 나는 못난 아비다.”

    “아버지, 아닙니다. 저희는 늘 아버지를 존경했습니다.”

    아버지가 무슨 소리를 하시냐며 발끈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할아버지가 고맙다며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리고 강우를 향해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네가 정치를 하는 것에 반대했었다. 네가 점점 유명해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수록 무섭기도 했었다. 너라는 내 버팀목을 정치라는 마약에 잃기 싫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너는 이 할아비의 생각보다 훨씬 굳고 강한 아이다.”

    “.....”

    할아버지의 말에 집 안으로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아버지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나은은 강우의 표정을 살피며 걱정스러워했다. 강우의 얼굴이 너무나 무거웠기 때문이다.

    “언제인가부터 네 행보를 보며 이 할아비의 생각이 틀렸다고 느끼게 되더구나. 누군가가 나서지 않는 이상. 누군가가 그 첫발을 내딛지 않는 이상 이 세상은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게야. 그리고 더는 예전의 잘못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

    강우가 침음성을 흘렸다.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하려는지 알아챘다. 할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눈을 빛냈다.

    “강우야, 운명이 너를 이끈다면 피하지 말아라. 힘든 일이라고 외면하지 말아라. 그리고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라 무서워하지 말아라. 너에게는 내가 있고, 가족이 있고, 너를 지지하는 많은 사람이 있다.”

    “......”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 순간, 애써 외면하던 운명이 자신에게 인이 박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몇 년 전 가문을 일으키고 친일파 청산이라는 염원을 이루어달라던 할아버지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아버지……. 강우가 우리 강우가 해낼 수 있을까요?”

    아버지 역시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작금의 정치판이 그리고 기득권이 어떤 세상인지 아버지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던가.

    “정식아,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우리 강우다. 무너져가는 우리 집안을 일으키고 수렁에 있던 수많은 내 동료들과 그 후손들을 양지로 끌어올렸다. 우리의 가업은 튼튼하기가 이를 데 없다. 지금이 아니면. 그리고 강우가 아니면 안 된다.”

    할아버지의 말에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가 강우를 바라보았다.

    “너에게 이 할아비가 너무 어려운 부탁을 하는 걸까? 오래전 역사에 지은 나와 독립투사의 실수를 네가 다시 올바른 길로 해줄 수는 없는 게야?”

    강우가 잠시 침묵했다. 운명이라는 것은 거대한 계기가 있을 줄 알았다. 아니 아직은 시간이 더 남았다고도 생각했다. 강우 자신은 아직 어렸고, 해야 할 것도 많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자신의 운명을 이끌어주는 것은 할아버지였다.

    “네, 할아버지의 말씀 어떤 의미인지 알 거 같아요. 운명이 저를 이끈다면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먼저 다가오기 전까지 나서지는 않겠습니다. 아직 제 위치에서 해야 할 것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강우의 답에 할아버지가 환하게 웃었다. 강우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아주었다. 주름진 할아버지 손의 까끌까끌한 감촉을 느낀 강우의 표정이 대번에 안정감을 찾았다.

    “그래, 그거면 됐다. 강우 너라면 반드시 잘못된 첫 단추를 바로 잡을 수 있을 거야.”

    “대신 저랑 약속 하나만 해주세요.”

    할아버지가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말해 보아라.”

    “그때까지 건강하게 사셔야 해요.”

    할아버지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노력해 보마.”

    “꼭 지키셔야 해요?”

    “그럼 그럼. 누구와의 약속인데.”

    강우가 이제야 환하게 웃었다. 그런 할아버지와 강우를 가족들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무거운 공기가 사라지자 다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었다.

    “아버님, 식사하세요.”

    어머니는 저녁 준비를 마쳤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강우와 이나은이 식탁으로 향했다. 어머니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산모가 있어서 맵고 짠 건 안 했어요.”

    “그래도 우리 어멈이 한 거면 얼마나 맛있을까?”

    할아버지가 자리에 앉으셨다. 다른 가족들도 자리에 앉아 식사 준비를 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응애!”

    아기방에서 광복이 아니 이제는 박수호가 큰 울음을 터트렸다. 그 울음소리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반색했다.

    “허허…. 녀석 가족 식사라고 자기도 빼먹지 말라는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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