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말 행복한 놈이더라고.
강우와 할아버지의 대국은 역시나 강우의 승리로 끝났다. 할아버지가 돌을 내려놓으며 너털웃음을 터트리셨다.
“허허…. 내가 졌다.”
“수고하셨습니다.”
강우가 씩 웃으며 말했다. 사랑하는 할아버지였지만, 승부의 세계에 양보는 없었다. 막내 할아버지와 최준이 감탄성을 터트렸다. 강우와 할아버지의 대국은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강우는 한 수 한 수를 두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강우야, 이참에 바둑도 한번 둬보는 게 어떠냐?”
“큰형님, 맞습니다. 강우 프로기사로 데뷔해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강우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방문이 조심히 열리며 강용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형아, 애들이랑 놀아주러 가자.”
“그래, 할아버지는 복기를 좀 해야겠으니 나가서 강용이랑 좀 놀아줘.”
할아버지는 복기하신다며 바둑판에 집중하셨다. 막내 할아버지와 최준도 바둑판에 집중했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주방에서는 아직 요리가 한창인 듯했다. 아버지는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계셨다.
덜컥.
현관문이 열리고 강우와 강용이가 밖으로 나왔다. 저녁 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있었다. 정원으로 나온 강용이가 크게 소리쳤다.
“장군아! 루피야!”
강용이의 부름에 어디서인가 장군이와 루피가 미친 듯이 달려왔다. 강우가 씩 웃으며 한쪽에 있는 애완견용 장난감을 들었다. 장군이와 루피가 미친 듯이 꼬리를 흔들며 놀이 준비가 끝난 신호를 보냈다.
“자~ 간다!”
강우가 마당의 한쪽으로 원반을 휙 던졌다. 장군이와 루피가 경쟁하듯 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강용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간다!!”
강용이도 손에 들린 부메랑을 휙 던졌다. 원반을 잡지 못한 루피가 대번에 부메랑으로 방향을 틀었다.
멍-! 멍-!
장군이와 루피가 원반과 부메랑을 강우와 강용이 앞에 내려놓았다. 두 사람은 다시 원반과 부메랑을 던져주었다. 장군이와 루피가 좋다고 짖으며 다시 달려갔다.
“와~ 애들도 형아 오니까 신났네.”
“그래? 강용이가 자주 안 놀아줘?”
강우의 질문에 강용이가 콧잔등을 쓱 훔쳤다.
“자주 놀아주지 그런데 애들도 형아가 보고 싶은 거지.”
“그렇군.”
강우와 강용이는 한참이나 개들과 놀아주었다. 장군이와 루피는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해서 놀아달라 했다. 하지만 강용이는 조금 힘든지 지친 기색을 보였다.
“가서 좀 쉬자.”
“응.”
강우와 강용이가 정원에 있는 스윙체어에 나란히 앉았다. 초여름의 하늘은 맑았고, 저녁이 되어가는 날씨는 바람이 불어 선선했다. 두 형제는 잠시 말없이 불어오는 바람을 만끽했다.
끼이익- 끼이익-
스윙체어가 앞뒤로 움직이며 쇳소리를 냈다. 강우가 슬쩍 뒤를 돌아보니 스윙체어의 연결 부분이 살짝 녹슬어 있었다.
“녹슬었네.”
강우의 말에 강용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 그러네. 왜 녹슬었지?”
“비 맞아서 그러지 뭐. 이거 관리 계속해줘야 하거든.”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창고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용이도 자리에서 일어나 강우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창고에 도착한 강우가 스위치를 올려 전등을 켰다.
틱.
스위치 올라가는 소리와 함께 오렌지색 전구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강우가 익숙하게 창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강용이도 돕겠다며 창고를 뒤졌다.
“찾았다.”
강우가 금세 녹 제거제를 찾았다. 강용이가 후다닥 달려와 엄지를 내밀었다.
“역시 형아가 있으니까 일사천리네!”
“그래?”
강우가 씩 웃으며 강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훌쩍 커버린 동생이었지만, 아직 귀엽기만 했다. 강우와 강용이는 다시 정원으로 돌아왔다.
멍-! 멍-!
장군이와 루피가 입에 원반과 부메랑을 사이좋게 물고 있었다. 꼬리를 마구 흔드는 게 계속 놀아달라는 듯했다. 강우가 픽 웃으며 장군이와 루피를 향해 말했다.
“형, 바쁘다. 있다가 다시 놀아줄게.”
강우의 말을 알아들은 것일까. 장군이와 루피가 ‘낑낑’ 대는 소리를 내며 원반과 부메랑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제자리에 앉아 강우와 강용이를 바라보았다.
치이익- 치이익-
강우가 녹 제거제를 연결 부위에 뿌렸다. 그리고 잠시 기다렸다.
“강용아, 수건.”
“응, 여기.”
강용이가 수건을 내밀었다. 강우가 수건을 받아 녹을 쓱쓱 닦아냈다. 녹슨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연결 부위가 금세 원래 색을 찾았다.
“앉아봐.”
“응.”
강용이가 스윙체어에 앉았다. 그리고 발로 땅을 차서는 스윙체어를 움직였다. 녹이 제거된 스윙체어는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강용이가 활짝 웃으며 엄지를 ‘척’ 하고 내밀었다.
“역시 형아야.”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녹 하나 제거했을 뿐이었는데 강용이는 자신을 최고라며 좋아했다. 강우도 강용이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슬쩍 물었다.
“요즘 형아 없어서 심심하지?”
“응.”
강용이는 기다렸다는 듯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는 말을 이어갔다.
“뭐…. 이해는 해. 형아도 이제 새로운 가정을 꾸린 거잖아. 언제까지 나랑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자식….”
강우가 강용이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자신이 신혼집으로 나간 이후 강용이는 부쩍 외로워하는 듯도 했다. 그도 그럴만했다. 강용이에게 강우는 버팀목이었고, 지지대였으며, 인생의 길잡이였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형아.”
“응?”
강용이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어렸을 적에는 볼 수 없었던 조금은 어른스러운 듯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에 강우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어리광만 부릴 줄 알던 강용이의 성장에 세월이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요즘 영화 공부하고 시나리오 작업하면서 느낀 게 많아. 형아랑 아빠가 항상 내 앞에 있었구나. 눈 덮인 길을 걸을 때 혹시 모를 크레바스를 형아랑 아빠가 먼저 헤쳐나갔구나. 나는 그 뒤에서 정말 편하게 눈길을 걸었구나라고.”
“......”
강우가 강용이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강용이가 말을 이어갔다.
“생각해보니까 말이야. 나는 정말 행복한 놈이더라고. 부족한 것도 없고, 몸도 튼튼해졌고. 가족들은 다 화목하고.”
“예쁜 여자친구도 있고?”
강우의 기습 공격에 강용이가 ‘윽’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씩 웃으며 답했다.
“그럼 예쁜 우리 진아도 있고.”
“그래, 강용이가 행복하다니 좋다. 그리고 이런 행복함을 누릴 수 있는 것 항상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럼 당연하지. 나도 형아처럼 많은 사람에게 역사의 진실을 알리는 사람이 될 거라고.”
강용이가 주먹을 불끈 쥐며 의지를 다졌다. 강용이에게 강우는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늘 형의 뒤를 따르겠노라 다짐하고 다짐했다. 그래서 이번 영화 역시 독립운동에 대한 것을 주제로 삼았었다. 주변에서는 너무 한정적인 소재라 했지만, 강용이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 고맙다. 이번 영화 대박 날 거야.”
강우의 말에 강용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의 말을 들으니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강용이가 녹이 제거된 연결 부위를 쓱 바라보았다.
“형아가 오니까 참 좋다. 장군이랑 루피도 가족들도 나도 그리고 이 스윙체어도.”
“자주 놀러 올게.”
강용이가 강우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이다?”
그 진지한 표정에 강우가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결혼 이후 바쁜 스케줄로 인해 한남동에 들르지 못했던 강우였다.
“오케이. 약속. 주 1회 이상 방문하겠음.”
“노노. 1회는 너무 적음. 2회.”
“하?”
강우가 실소를 흘렸다. 강용이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농담이야 농담. 그냥 형 오고 싶을 때 와.”
강우와 강용이가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했다. 강용이는 기분이 풀렸는지 씩 웃으며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는 그런 강용이가 귀여워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오늘 영화 촬영장에 다녀왔어. 가서 나은이 영화 촬영 장면도 보고 왔지.”
“그래? 어땠어?”
영화 이야기가 나오니 눈을 빛내는 강용이었다. 강용이는 학업으로 인해 촬영장에 자주 방문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현재 어떤 상황인지 궁금했다.
“오늘 형수가 대한제국 소속 친일파 관료를 암살하는 장면이었거든.”
“아! 그 장면이었구나? 어땠어? 찍기 어려운 장면이었을 텐데. 형수님은 잘 찍으셨어?”
강용이가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떠올리며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어, 나중에 한번 감독님한테 보여달라고 해봐. 아마 입이 떡하니 벌어질걸?”
“와…. 대박! 이번 주말에 대진 엔터 가봐야겠다.”
강우가 씩 웃었다. 영화 이야기를 할 때의 강용이는 그 어느 때보다 활력이 넘쳤다. 문득 미래의 기억이 떠올랐다. 집안 형편과 건강상의 문제로 영화에 대한 꿈을 접었던 강용이였다. 그리고 웹 소설 작가로 데뷔해 이름을 날리기도 했었다.
“강용아, 이번 영화가 성공하면 너는 더 유명해질 거야. 그러면 꼭 겸손하고 사랑을 해주시는 분들에게 되돌려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강우의 말에 강용이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존경해 마지않는 강우의 조언은 늘 자신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응, 나는 내가 잘 할 수 있는 거로 사람들에게 보답할 거야. 꼭 세계 최고의 영화감독이 돼서 한국의 이름을 드높일 거야.”
“꼭 할 수 있을 거다. 내 동생은 재능이 있으니까.”
강용이가 멋쩍게 웃었다. 강우와 강용이는 다시 스윙체어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초여름의 해는 길었지만, 어느덧 붉게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장군이와 루피도 나른한지 눈을 감고 잠들었다.
쏴아아-
늦은 저녁 바람이 불어와 정원의 나무와 풀들을 휘감고 지나갔다. 불어오는 바람도 그 바람에 실린 향긋한 풀 내음도 모든 것이 완벽했다. 강우는 스윙체어에 앉아 오랜만에 느끼는 익숙함에 편안함을 느꼈다. 신혼집도 좋고 행복했지만, 역시나 아직은 한남동이 익숙한 강우였다.
“얘들아! 밥 먹어!”
그때, 거실 창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두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잠시 꾸벅 졸던 강용이는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네!”
강우가 픽 웃으며 스윙체어에서 일어났다. 장군이와 루피도 인기척을 느끼고는 부스스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났다. 강우가 한쪽에 있는 장군이와 루피의 보금자리로 향했다.
“애들 밥 주고 들어가자.”
“응.”
강우와 강용이가 장군이와 루피의 밥을 챙겨주었다.
멍-! 멍-!
잘 먹겠다는 소리를 내며 장군이와 루피가 사료통에 코를 박았다. 꼬리를 마구 흔드는 것이 분명 배가 고팠던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뿌듯한 표정을 지은 뒤 현관문으로 향했다.
덜컥.
문을 열고 들어가니 집 안에는 맛있는 냄새가 가득했다. 배가 고프다던 아버지는 먼저 주방으로 돌격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강우와 강용이가 주방으로 향했다. 강우 가족이 모두 앉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식탁이 있었다.
“우와~ 대박! 엄마 오늘 냉장고 다 털었어요?”
강용이가 입을 떡하니 벌리며 말했다. 식탁 위에는 정말 풍성한 상차림이 펼쳐져 있었다. 어머니가 앞치마를 툭툭 털었다.
“오늘 엄마가 날을 잡았지. 나은이랑 큰엄마도 많이 도와줬고.”
“자자. 앉자꾸나.”
어느새 주방으로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 그리고 최준이 도착했다. 식구들이 식탁에 둘러앉기 시작했다. 큰집 식구까지 열 명이 넘어가는 대식구가 옹기종기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모두의 시선이 할아버지를 향했다.
“흠흠…. 다들 모이니까 참 좋구나. 음식들 만드느라 고생들 했고. 고맙다. 이제 맛있게들 먹자꾸나.”
할아버지의 말과 함께 식구들이 일제히 수저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윽….”
이나은이 헛구역질을 했다. 순간, 깊은 정적이 흘렀다. 모두의 시선이 이나은을 향했다. 이나은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
이나은을 향했던 시선이 일제히 강우를 향했다.
“.....”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