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3화 (373/402)
  • 함께 하나씩 바꿔나가 보자.

    거만한 표정의 중년 남성은 연정호의 선배였다. 현재 서울중앙지검의 부부장 검사를 맡고 있었다.

    ‘이름은 유병우. 미래의 기억대로라면 정말 정검유착의 끝판왕.’

    그리고 연정호가 사법시험을 통과하기 전까지는 최연소 사법고시 합격자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던 자였다. 알려진 대로라면 매우 거만한 성격이었다.

    ‘뭐…. 똑똑한 건 사실이지. 당분간도 승승장구할 거고.’

    강우가 생각을 끝내고는 유병우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십니까.”

    연정호가 유병우를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유병우가 연정호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 미소에는 거만함이 담겨 있었다.

    “그래, 연 검. 밥 먹으러 가냐?”

    “네, 친구가 점심 먹자고 해서요.”

    연정호의 말에 유병우의 시선이 강우를 향했다. 강우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유병우였다. 그 시선에서 강우는 알 수 없는 불쾌감마저 느꼈다.

    “오~ 동양그룹 박강우 사장님이시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연 검이랑 고등학교 동창이시죠?”

    “네, 안녕하십니까.”

    강우가 짧게 답했다. 미래 기억 때문일까 아니면 첫인상 때문일까. 유병우에 대한 인상은 좋지 못했다. 강우의 짧은 대답에 유병우의 안색이 살짝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고쳤다.

    “둘이서 자주 만나시나 봅니다?”

    유병우의 말에 연정호가 무어라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강우가 먼저 나섰다.

    “고등학교 동창이라서요.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봅니다.”

    “친구가 검사라서 든든하시겠습니다.”

    강우가 씩 웃었다. 그 말 한마디에서 유병우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인물인지 알 수 있었다.

    “친구가 검사라서 든든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저는 살면서 법을 어겨본 적이 없어서요. 다만 좋은 친구로서 정호는 정말 든든한 친구가 맞죠.”

    “......”

    유병우의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그리고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하하! 젊은 분이 굉장히 재치가 있으시군요. 맞습니다. 법을 지키는데 법이 무서울 이유는 없죠.”

    한바탕 웃음을 터트린 유병우가 강우를 향해 악수를 청했다. 강우가 유병우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자존심 강한 성격이니 아마 속으로는 부글부글하겠지.’

    강우가 슬쩍 손을 내밀어 유병우와 악수했다. 유병우가 강우를 향해 말했다.

    “요즘 가장 유명하신 분이랑 안면을 트게 돼서 영광입니다. 언제 식사 한번 같이하시죠.”

    “네, 기회가 된다면 말이죠.”

    강우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대놓고 거절할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친구인 연정호의 상관이었으니 말이다. 유병우의 얼굴로 묘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하긴…. 검사랑 자주 볼 일이 있으면 좋은 일은 아니겠죠.”

    유병우가 나름의 농담을 던지고는 연정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래, 식사 맛있게 하고.”

    “네, 부부장님.”

    유병우가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갔다. 연정호가 깊은 한숨을 뱉어냈다. 그리고는 강우를 미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뭐가? 저 사람 원래 저렇잖아.”

    강우의 말에 연정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검찰 내에서 유병우가 거만한 것은 유명했다. 하지만 강우까지 알고 있으니 의아한 것이었다.

    “부부장님이랑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지?”

    “내가? 아니. 우리도 밥이나 먹으러 가자.”

    강우가 연정호의 어깨를 두들겨 주며 앞장섰다. 연정호가 그런 강우의 뒤를 따라갔다. 건물을 벗어나자 많은 사람이 점심시간을 위해 어디로인가 향하고 있었다.

    “시간 별로 없지?”

    강우가 연정호를 향해 물었다. 검사가 되고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있는 연정호였다. 연정호가 슬쩍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낡고 낡은 가죽 시곗줄을 보며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검사님이 시계 살 돈도 없냐?”

    “무슨 소리야? 아…. 이거….”

    연정호가 멋쩍은 듯 손목을 어루만졌다. 연정호가 차고 있는 손목시계는 사연이 있는 것이었다.

    “이거…. 민정이가 나 사시 합격하고 사준 거야. 나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거지.”

    연정호가 사법고시를 준비할 때 조민정은 정말 헌신적으로 내조를 했다. 연정호는 그런 조민정을 정말 사랑했고, 또 감사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조민정이 선물한 손목시계를 단 한시도 풀은 적이 없었다.

    “그럼 손목 줄이라도 갈아라. 너무 낡았어.”

    강우의 말에 연정호가 머리를 긁적였다. 강우가 픽 웃었다. 예전부터 그랬다. 연정호는 공부도 잘했고, 참 똑똑했지만, 어수룩한 면도 많았다. 그리고 가난했던 환경 때문인지 돈을 쓰는 것에 인색했다.

    “내가 갈아주랴?”

    “됐다. 그 정도는 내가 할 수 있어.”

    연정호가 팔을 쓱 움직였다. 걷어졌던 옷이 스르륵 내려와 손목시계를 덮었다. 연정호가 강우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가자. 점심시간 얼마 안 남았다.”

    “그래? 그러면 근처 식당으로 가자고.”

    강우와 연정호는 서울중앙지검 건물을 벗어났다. 그리고 근처의 식당으로 향했다. 연정호는 오늘은 자기가 밥을 사겠다며 단골 한식집으로 향했다.

    “민정이는 잘 지내지?”

    “그럼, 요새 직장 다니느라 바쁘다.”

    이나은과 함께 연극영화과를 나온 조민정은 현재 영화사에 취직해서 다니고 있었다. 강우가 대진 엔터에 면접을 보라고 했지만, 연정호가 극구 반대했다. 혹시나 모를 뒷말이 나오는 것조차 강우에게 부담이라고 했다.

    “너네도 연애한 지 참 오래됐다.”

    “그렇지.”

    연정호가 조민정을 떠올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강우가 그런 연정호를 보며 슬쩍 미소 지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의 애정은 깊어지고 있었다. 다만 연정호는 가정형편이 더 안정되고 나서야 결혼 생각이 있다고 했다.

    “여기다.”

    이윽고 두 사람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두 사람이 도착한 한정식집은 점심시간을 맞아 사람들로 북적였다. 강우와 연정호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이모, 방 하나 주세요.”

    “아이고~ 연 검사님 오셨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가게 주인이 대번에 연정호를 알아보았다. 단골은 단골인가 보다. 두 사람은 작은 방으로 안내받았다. 성인 남성, 네 명 정도면 꽉 찰듯한 방이었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았다.

    “정식 이 인분…. 아니 삼 인분 주세요.”

    연정호가 강우를 힐끗 보더니, 추가 주문을 했다.

    “한 분 더 오세요?”

    가게 주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연정호가 픽하고 웃었다.

    “아니요. 두 명입니다.”

    “아…. 네.”

    가게 직원이 직접 주문을 받으며 알았다고 했다. 이윽고 밑반찬과 물이 먼저 서빙됐다. 강우는 수저통에서 수저를 꺼내 놓았다. 연정호는 물컵에 물을 따라 강우와 자신의 앞에 놓았다. 오랜 친구인 두 사람은 이런 호흡조차 완벽했다.

    “여기가 가격도 싸고 맛도 좋아. 그래서 지검 직원들이 많이 오지.”

    연정호의 말대로였다. 가게를 들어서는 순간 연정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연정호는 그런 사람들과 가볍게 눈인사를 하기도 했다.

    “그래? 웬일이래? 전에는 둘이 만나는 거 누가 보는 거 싫다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만났잖아.”

    강우의 말에 연정호가 말없이 웃었다. 연정호의 얼굴로 복잡한 심경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뭐…. 오늘은 바쁘기도 하고. 멀리 갈 시간이 없잖냐.”

    연정호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하지만 원래도 눈치가 빠른 강우였다. 오늘은 국재훈 변호사의 언질도 있었다. 연정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강우는 먼저 묻지는 않기로 했다. 이윽고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오…. 된장찌개.”

    강우가 된장찌개를 보며 군침을 삼켰다. 뚝배기에 담겨 나온 된장찌개는 열심히 끓어오르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한정식답게 다른 반찬들도 나왔다. 보쌈도 나왔고 겉절이도 나왔다. 그야말로 근사한 한 상 차림이었다.

    “이 집 잘해. 먹어봐.”

    “일단 먹자.”

    강우와 연정호가 밥을 먹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 강우는 잘 먹었고, 연정호는 천천히 밥을 음미했다. 순식간에 1인분을 해치운 강우는 전투적으로 2인분을 향해 달려갔다. 그런 강우를 보며 연정호가 픽 웃었다.

    “하나 더 시킬 걸 그랬네.”

    열심히 밥을 먹던 강우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럼 좋고.”

    “하?”

    연정호가 실소를 흘렸다. 강우가 씩 웃으면서 신사옥 사내 식당 자랑을 늘어놓았다. 강우의 자랑에 연정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세상에 먹는 거에 그렇게 투자하는 대기업 총수는 너밖에 없을 거다.”

    “왜? 나도 좋고 직원들도 좋고. 일거양득이지. 다 나누면서 사는 거 아니겠냐?”

    강우의 말에 연정호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게 말이다. 세상 사람들이 너처럼만 생각하고 살면 참 좋을 텐데. 특히 가진 사람들이 말이야.”

    “누군가 앞장서서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씩 따라오지 않을까?”

    강우의 말에 연정호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는 바뀌지 않는 것들이 있더라고. 특히 오랜 시간 굳어진 기득권들의 사상은 절대.”

    연정호의 목소리에는 울분이 섞여 있었다. 강우는 그런 연정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번 입을 열기 시작한 연정호의 울분이 점점 짙어졌다.

    “너 그 말 알지? 유전무죄. 무전유죄. 범죄자의 말이지만 틀린 말이 아니야. 빵 하나 훔친 사람은 몇 년이나 징역을 살고, 온갖 더러운 짓을 하는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법 앞에서 벗어나. 법은 돈 앞에서 지나치게 관대하다고.”

    연정호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검찰이 되고 난 이후 마주 보게 된 조직의 이면을 연정호는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연정호는 꾹 참아왔었다. 자신이라도 올바르게 검사의 임무를 다하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했다. 하지만 근래 들어서는 정말 지치고 힘들었다.

    “하나씩 하나씩 바꿔나가면 돼.”

    “가능할까? 검찰은….”

    썩었다고 말하려던 연정호가 말을 아꼈다. 자신의 한마디로 강우에게 영향을 주기는 싫은 것이었다.

    “아니다. 밥이나 먹자. 너한테 하소연할 일은 아닌 것 같아.”

    “어제 국 변호사님 만났다.”

    “......”

    강우의 말에 연정호가 입을 꾹 다물었다.

    “요새 너 많이 힘들어한다고 하시더라고.”

    “선배님도 왜 그런 말을….”

    연정호가 강우를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강우의 표정을 보니 더는 숨길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우는 예전부터 그런 친구였다. 숨기고 싶은 자신의 밑바닥까지 속속들이 아는 그런 친구. 하지만 그것이 창피하거나 부끄럽지 않고 힘이 되는 그런 친구였다.

    “네가 내 친구라는 이유로 주변에서 너를 힘들게 한다더라.”

    “아니야! 그건…. 그냥 내가 좀 유별나서 그런 거다.”

    강우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아는 연정호는 정의롭고 올바른 놈이야. 네가 유별난 게 아니고 그놈들이 이상한 거지.”

    “강우야….”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의 말에 연정호가 울컥했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미안하다. 내가 너무 무신경했던 거 같아.”

    “아니야. 그런 말 하지 마라. 네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나도 없어. 그리고 네가 하는 일은 옳은 일이야. 그걸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 하나도 안 무섭다.”

    강우가 연정호를 바라보았다. 처음 연정호와 싸웠던 고등학생 때의 그날이 떠올랐다. 그 당시 연정호는 자격지심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연정호는 달랐다.

    “힘들면 그만두고 나한테 와라.”

    “.....”

    연정호가 묵묵히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내 친구 힘든 거 나 못 본다. 그리고 법으로 사람들을 도와주는 거 꼭 검사 아니어도 된다. 나는 내 친구가 진흙탕 속에 억지로 몸 담그고 있는 꼴 못 본다.”

    “......”

    연정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사실 연정호는 적나라하게 마주한 검찰의 모습에 실망을 많이 한 상태였다. 하지만 강우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 내색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강우가 손을 내밀었다. 연정호가 옛 기억을 떠올렸다.

    “그래, 내가 힘들 때마다 항상 네가 있었지. 고맙다 친구야.”

    연정호의 얼굴이 평온해졌다. 생각해보니 얼마 만에 느끼는 평온한 감정인지 몰랐다. 강우가 씩 웃었다.

    “함께 하나씩 바꿔나가 보자. 더 좋은 세상이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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