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2화 (372/402)
  • 우리는 언제든지 준비됐다.

    스르륵.

    신혼집이 있는 강남 아파트에 고급 세단이 나타났다. 고급 세단은 곳곳에 주차된 차들을 피해 미끄러지듯 목적지 앞에 섰다. 뒷좌석 문이 열리고 강우가 내렸다. 반대쪽에서는 최 비서가 내렸다.

    “고생들 하셨어요.”

    “사장님, 좋은 저녁 되십시오.”

    최 비서와 정 기사가 강우를 향해 인사를 했다. 강우도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저는 편의점에 좀 들러야 해서…. 먼저들 들어가세요.”

    “네, 사장님.”

    강우가 몸을 돌려 편의점으로 향했다. 늦은 저녁 불어오는 바람을 강우가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딸랑.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르바이트생이 강우를 알아보고는 살짝 목인사를 했다. 강우도 목인사를 해주었다. 그리고는 익숙하게 매대를 누볐다. 강우는 캔맥주와 간단한 안줏거리를 샀다.

    삑- 삑-

    아르바이트생이 계산해주었다. 강우는 물건들을 열심히 비닐봉지에 담았다.

    “조금 전에 아내분께서 다녀가셨어요.”

    “아…. 그런가요?”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강우의 퇴근 시간을 맞춰서 이나은이 편의점에서 무언가를 사간 모양이다. 강우가 잠시 캔맥주와 안줏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계산 취소해드릴까요? 맥주랑 이것저것 사가셨는데….”

    “아니요. 계산해주세요. 두고 먹으면 되죠.”

    아르바이트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강우가 내민 카드를 받았다.

    “수고하세요.”

    “네, 안녕히 가세요.”

    편의점을 나선 강우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며 아파트 현관으로 향했다. 주변을 지나치던 아파트 주민들이 강우를 알아보고는 인사를 건네왔다. 강우는 주민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안녕하세요.”

    강우가 경비원을 향해 인사했다. 2교대로 돌아가는 경비실에는 오전과는 다른 경비원이 있었다. 강우를 발견한 경비원이 반갑게 웃었다.

    “오~ 강우 왔구나.”

    “이거 하나 드세요.”

    강우가 봉지에서 간단한 간식들을 꺼내 내밀었다. 경비원이 환하게 웃었다.

    “아이구…. 매번 이렇게 챙겨주고 고맙다.”

    “아니에요. 맛있게 드세요.”

    강우가 꾸벅 인사를 하고는 엘리베이터로 다가갔다. 그런 강우의 뒷모습을 경비원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대기업을 이끌고 유명하기로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강우였다. 하지만 매일 마주치는 강우는 예의 바르고 착한 청년이었다. 아니 오히려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 중 그 누구보다 살뜰히 경비들을 챙기는 청년이었다.

    ‘참…. 가정교육을 잘 받았어. 정말 바르고 곧아.’

    경비원이 힐끗 경비실 위쪽으로 바라보았다. 곧 다가올 여름을 위해 설치된 에어컨이 보였다. 저것 역시 강우가 아파트에 기부금을 내서 모든 경비실에 달아준 것이었다. 에어컨으로 발생하는 전기료도 모두 강우가 부담하고 말이다.

    ‘나중에 보면 고맙다고 한마디라도 해야겠어.’

    그사이 공동현관을 지나친 강우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강우가 안으로 몸을 던졌다.

    지이잉-

    엘리베이터가 위로 향했다. 강우는 계속해서 바뀌는 붉은색 숫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법이 통과되고 나면 본격적인 싸움의 시작이겠지.’

    미래의 기억대로라면 과거사 진상규명법은 야당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힌다. 아니 현 정부가 추진한 4대 개혁법 자체가 엄청난 진통을 겪게 된다. 하지만 강우의 개입으로 과거사 진상규명법은 빠르게 통과될 것이었다.

    ‘법이 통과되어야 정당한 명분이 생기는 거니까.’

    법이 통과되고 나면 강우가 가진 힘을 모두 쏟아부을 생각이었다. 힘들고 어려운 싸움이겠지만, 강우는 절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띵-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안에서 내린 강우가 문 앞에 섰다. 조금 처져 있던 강우의 기분이 대번에 좋아졌다. 문 너머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아내라는 존재를 떠올린 것이다.

    덜컥.

    “나은아~”

    현관문을 열고 강우가 반갑게 이나은을 불렀다. 하지만 이내 움찔했다. 집 안쪽에서 왁자지껄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거실을 확인한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거실에는 이나은과 이재원 그리고 미나가 모여 있었다.

    “저기요. 저 왔거든요?”

    강우가 자신의 존재를 어필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웃음이 만발이던 세 사람의 고개가 강우를 향했다.

    “어? 왔냐?”

    이재원이 손을 들어 강우를 반겼다. 미나는 역시나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를 했다.

    “오빠, 오셨어요.”

    “둘이 웬일이에요?”

    강우의 질문에 이재원이 상 위를 가리켰다. 거실에 펼쳐진 상 위에는 맛있는 음식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우리 미나가 음식을 좀 했는데 여기서 같이 먹자고 해서 왔지.”

    “잘 왔어요.”

    이나은은 강우에게 다가와 손에 들린 짐을 받아주었다. 강우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잘 갔다 왔어?”

    “응, 엄마는 잘 만나고 왔어?”

    오늘 이나은은 어머니와 만나 데이트를 하기로 했었다. 이나은이 싱긋 웃었다.

    “응, 어머님이 저녁에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하셔서 점심에 만났어.”

    “잘했네.”

    부드럽게 웃어준 강우가 이재원을 향해 씻고 옷도 갈아입고 나온다고 했다. 방으로 들어간 강우는 간단히 샤워하고 옷도 편하게 갈아입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이나은의 옆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배고프지?”

    이나은이 강우의 앞쪽으로 수저를 놓아주었다. 강우가 배를 문지르며 씩 웃었다. 사실 회사에서 저녁을 먹고 왔지만, 맛있는 음식을 보니 또 군침이 돌았다. 더군다나 이나은과 미나의 음식 솜씨도 남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딸칵.

    이재원이 캔맥주를 뜯어서는 강우에게 내밀었다. 강우가 캔맥주를 받았다. 손안으로 맥주캔의 차가운 냉기가 느껴지며 피로감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고마워요.”

    “오늘 좀 지쳐 보인다?”

    이재원이 강우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이재원 역시 강우를 잘 알고 있었다. 강우가 캔맥주를 한 모금 벌컥 마셨다. 그리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 청와대 갔다 왔어요.”

    “아. 청…. 어? 거긴 왜?”

    이재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청와대라니 공식적인 행사도 없이 갈만한 곳은 아니지 않던가. 더군다나 이재원 역시 청와대의 분위기가 좋지 못함을 알고 있었다.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4개 개혁법이 있어요. 그중 하나가 바로 과거사 진상규명법이고요. 제가 하는 일들을 마무리 지으려면 꼭 필요한 법이죠.”

    “음….”

    이재원이 자세를 고쳐잡으며 강우의 말에 집중했다. 이나은과 미나도 강우를 바라보았다.

    “대통령하고 거래를 하나 하고 왔어요. 저는 떨어지는 대통령의 지지율을 회복할 방법을 주고 대통령은 4대 개혁법 중 과거사 진상규명법을 가장 먼저 통과시켜 주는 거로요.”

    “와…. 박강우.”

    이재원이 입을 떡하니 벌렸다. 대통령과 거래라니 자신은 상상도 못 할 스케일이었다. 강우가 이재원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형.”

    강우의 묵직한 목소리에 이재원이 침을 꿀꺽 삼켰다. 강우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빛을 내고 있었다.

    “어…. 말해라.”

    “법이 통과되고 나면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전쟁이 시작될 거예요. 아마…. 동양 그룹뿐이 아니고 제 주변은 모두 공격을 하겠죠.”

    이재원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이제야 무거워 보이던 강우의 표정이 이해됐다. 강우는 주변 사람들이 혹시나 피해를 볼까 걱정한 것이었다.

    “야! 언제 우리가 그런 거 무서워했냐? 그리고 이미 예전부터 말했잖아. 우린 함께라고.”

    이재원이 강우의 등을 팡팡 두들겨 주었다. 그리고는 말을 이어갔다.

    “까짓거 다 덤비라고 해. 대진이랑 동양 그룹이 만만해? 어림도 없지. 그리고 SJ 그룹도 우리랑 함께라고. 뭐가 무서워? 그리고 언제나 정의는 승리하는 법이라고.”

    “무섭지는 않아요. 조금 걱정은 됐죠. 그래도 형이랑 이야기하니까 기분은 좋아지네요.”

    강우가 씩 웃었다. 이나은이 기다렸다는 듯 강우를 향해 음식을 덜어주었다.

    “그래, 강우야. 우린 다 함께야. 이렇게 똘똘 뭉쳐있으니까 어떤 어려움이 와도 이겨 낼 수 있어.”

    미나도 주먹을 불끈 쥐며 입을 열었다.

    “오빠, 할 수 있어요.”

    이나은과 이재원 그리고 미나의 격려에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든든한 사람들과 함께하니 조금이나마 가졌던 걱정이 훌훌 날아가 버렸다.

    “일단 배가 고파서 좀 먹을게요.”

    식사는 다시 이어졌다. 강우는 역시나 정말 잘 먹었다. 미나가 준비한 일식과 이나은이 준비한 한식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아니 종일 굶었냐?”

    이재원이 진공청소기처럼 음식을 흡입하는 강우를 향해 말했다. 강우의 먹성이야 알고 있었지만, 정말 볼 때마다 혀를 내둘렀다.

    “부족할 거 같은데.”

    강우가 남은 음식을 보며 말했다. 이재원이 픽 웃었다.

    “그럴 줄 알고 이미 배달도 시켜놨다.”

    “역시 형이네요.”

    강우가 씩 웃었다. 강우가 미소를 짓기 시작하자 분위기는 점점 흥에 차올랐다.

    “그런데 우리 아이는 언제 가질까?”

    이재원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이나은과 미나가 동시에 얼굴을 붉혔다.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으며 이재원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훅 들어오는 질문은 이재원다웠다. 이재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왜? 우리 2세는 친구 만들어주기로 약속했잖아.”

    “아니 그래도….”

    강우가 결국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재원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는 언제든지 준비됐다. 너희도 준비 끝나면 말만 해줘.”

    “하아….”

    강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나은과 미나는 입을 가린 채 웃음을 터트렸다.

    * * *

    다음 날, 점심시간. 강우는 직접 차를 몰고 서초동으로 향했다. 오늘은 강우가 연정호와 만나는 날이었다. 연정호는 엄청 바쁘다며 강우에게 중앙지검 앞으로 와달라고 했다.

    부우웅-

    달리는 차 안에는 라디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혹시나 어제 청와대 방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까 싶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언론은 잠잠했다.

    ‘그래도 청와대는 청와대라 이건가.’

    철저한 보안을 약속했던 대통령이었다. 이윽고 강우가 운전하는 차량이 서초동 중앙지검에 도착했다. 강우는 민원인 주차장에 주차했다. 그리고 검찰 건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제 만났던 국제훈의 말을 떠올렸다.

    ‘......’

    검찰과 정치권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결코 좋지 못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유착관계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어져 오던 것이었다. 그리고 연정호는 그런 조직의 성향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었다.

    ‘정호 성격에 그런 걸 참을 리가 없긴 하지.’

    평소 검사로서의 공평함과 중립성을 생명처럼 여기는 연정호였다. 그런 연정호에게 검찰조직의 문화는 참기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연정호는 강우를 돕기 위해 참고 또 참았다. 강우는 그런 연정호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물론, 위법한 도움은 절대 없었다.

    ‘어디더라….’

    강우가 연정호가 찾아오라고 한 건물에 도착했다. 자유롭게 출입할 수는 없기에 강우는 로비에서 연정호를 기다렸다.

    “박강우!”

    이윽고 연정호가 나타났다. 강우가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의 얼굴이 반가웠다.

    “잘 지냈냐?”

    “뭐…. 그럭저럭. 그보다 배고프지? 밥 먹으러 가자.”

    강우가 연정호의 어깨를 툭 하고 치며 좋다고 했다. 그때였다.

    “어이! 연 검사.”

    누군가가 연정호를 불렀다. 목소리를 들은 연정호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강우가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하…. 저 사람이 지금 서울에 있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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