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1화 (371/402)
  • 결정은 제가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오랜 대화를 끝낸 강우와 대통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통령은 강우를 향해 손을 내밀며 부드럽게 웃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박 사장님 덕분에 제가 큰 고비를 넘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동북공정을 막아주신 것은 대한민국의 한 국민으로서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강우가 대통령의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대통령은 강우를 향해 진한 호감을 표현했다.

    “오늘 있었던 일은 당분간 비밀에 부쳐야겠지요?”

    “네, 미리 알려지면 효과가 크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대통령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대통령은 평소에도 언론을 이용하고 상대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언론이었지만 말이다. 항상 모든 논란이나 사건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편이었다.

    “알겠습니다. 식사라도 함께하고 가면 좋겠지만, 아시다시피 당분간은 제가 정신이 없을 것 같습니다.”

    “괜찮습니다. 나중에 더 좋은 자리에서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계속되는 호감 표시에도 강우는 담담히 대통령을 대했다. 대통령이 아쉬운 표정으로 강우를 배웅했다.

    “그럼,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조만간 기업 총수들 모임을 가질 예정입니다. 그때,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네, 건강히 지내십시오.”

    강우가 대기하고 있던 권 비서의 안내를 받아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강우는 청와대를 벗어났다. 권 비서가 강우를 향해 정중히 인사했다.

    “그럼,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청와대를 벗어난 강우는 대기하고 있던 고급 세단에 올라탔다. 차 안에는 최 비서와 정 기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강우의 지시로 차 안에서 내리지 않고 있었다.

    “사장님. 다녀오셨습니까.”

    강우가 창밖을 살짝 살피며 물었다.

    “기자들은요?”

    “어떻게 알고 왔는지 청와대 출입 기자들이 몇몇이 출입하는 걸 확인했습니다.”

    “그렇군요. 일단 출발하세요.”

    강우의 말에 정 기사가 고급 세단을 출발시켰다. 청와대 주차장을 벗어나자 밖에는 기자들 몇몇이 대기하고 있었다. 기자들이 못 보던 차를 발견하고는 다가왔지만, 고급 세단은 그대로 기자들을 지나쳐버렸다. 기자들이 황급히 고급 세단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사장님, 괜찮을까요?”

    오늘 청와대에 강우가 온 것이 알려지면 분명 조용히 지나갈 리가 없었다. 강우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통령은 현재 일거수일투족이 주목을 받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강우가 단독으로 청와대를 방문한 것이었다. 최 비서는 분명 온갖 추측이 난무할 것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괜찮을 겁니다. 제가 가서 작당 모의를 한 것도 아니고요.”

    “네, 사장님.”

    최 비서가 안도의 숨을 뱉어냈다. 강우가 그런 최 비서를 보며 속으로 미안한 마음을 느꼈다. 오늘 대통령과 나눈 이야기는 당분간 절대적인 비밀엄수가 필요한 것이었다. 평소 최 비서에게는 숨기는 것이 없는 강우였다.

    ‘나중에 자연스럽게 알게 되겠지.’

    강우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부디 대통령이 자신의 말대로 일을 잘 해결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법무법인으로 가주세요.”

    “네, 사장님.”

    강우의 말에 정 기사가 차량을 종로 쪽으로 향했다. 법무법인의 건물이 있는 곳이었다. 청와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법무법인이었다. 강우는 금세 목적지에 도착했다.

    “잠깐 대기해주세요.”

    “네, 사장님.”

    최 비서가 알겠다고 답했다. 강우는 고급 세단에서 내려 법무법인 광복의 건물로 들어섰다. 건물 로비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사…. 사장님?”

    로비의 보안을 지키고 있던 보안 요원들이 강우를 알아보았다.

    “사람들이 많네요.”

    “네, 모두 법률상담을 받으러 온 분들입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법무법인 광복은 점점 규모를 늘려가 이제는 종로에 있는 빌딩 한 곳을 모두 사용하고 있었다. 현재는 기존에 담당하던 소송 말고도 사정이 안 돼 법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돕고 있었다. 강우는 보안 요원의 안내를 받아 출입 게이트를 지나쳤다.

    “그럼 수고하세요.”

    보안요원에게 수고했다고 말한 강우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리고 곧장 국재훈 변호사의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 문 앞에는 국재훈 변호사가 서 있었다. 로비에서 강우가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었다.

    “사장님, 오셨습니까?”

    “안녕하세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강우와 국재훈 변호사가 사무실로 들어갔다. 강우와 국재훈 변호사가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았다. 강우가 사무실 문을 걸어 잠갔다. 국재훈 변호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청와대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청와대 말입니까?”

    국재훈 변호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한쪽에 있는 인터폰을 들었다.

    “사무실로 아무도 들이지 마세요.”

    직원들에게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지시한 후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네, 대통령을 만나서 과거사 진상규명법의 입법을 약속받고 오는 길입니다.”

    “으음.”

    국재훈 변호사가 침음성을 흘렸다. 현재 정부의 상황이 어떤지는 전 국민이 잘 알고 있었다. 그나마 지난 총선에서 여당이 승리를 거둔 것이 다행이지만 말이다. 국재훈 변호사가 강우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그런 약속을 받아내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강우는 국재훈 변호사가 질문을 던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국재훈 변호사는 강우가 어떤 대가를 치렀을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 대가가 어떤 방식인지 알고 싶은 것이었다. 강우가 국재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국 변호사님이라면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강우가 차분히 청와대에서의 일을 설명했다. 강우의 설명을 듣는 국재훈 변호사의 표정이 점점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그런 계획을 미리 준비하실 수가….”

    놀랍고도 놀라울 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걱정했던 그런 대가가 아닌 것이 기분 좋았다. 강우가 그런 국재훈 변호사의 마음을 눈치챘다.

    “설마 제가 뇌물이라도 바쳤을까 봐 걱정하셨습니까?”

    “아…. 아닙니다! 사장님이 그럴 분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현 정부의 상황이 좋지 않으니 너무 깊숙이 엮이는 일은 없었으면 해서….”

    정치권과 깊숙이 연결될수록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지 국재훈 변호사는 잘 알고 있었다. 강우가 걱정하지 말라며 국재훈 변호사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오직 제가 가진 사명을 완수할 생각뿐이니까요.”

    강우의 말에 국재훈 변호사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검사 생활을 하며 필연적으로 정치권과 엮여 생활할 수밖에 없던 국재훈 변호사였다. 수사기관인 검찰이 정치권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니 아이러니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대한민국 검사의 현실이었다.

    “사장님께서 두각을 나타낼수록 정치권에서 가만히 두지 않을 겁니다. 그게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말이죠.”

    “결정은 제가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강우의 말에 국재훈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어떤 일이든 결정은 자신이 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국재훈 변호사는 오랜 경험으로 직감했다.

    ‘국민이 결코 사장님을 가만히 두지 않을 거 같군요.’

    국재훈 변호사가 강우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강우가 어떤 선택을 하던 자신은 옆에서 묵묵히 도움을 주겠다 다짐했다. 강우가 국재훈 변호사를 향해 말했다.

    “늦어도 내년에는 법이 시행될 겁니다. 그때까지 준비에 신경을 많이 써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국재훈 변호사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법무법인에서 진행되고 대표적인 소송은 위안부 피해 소송과 강제 노역 소송이었다. 법무법인 광복이 소송을 맡으면 점점 상황이 호전되고 있었지만, 결정적인 전환점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전환점이 바로 과거사 진상규명법이라고 강우와 국재훈 변호사는 생각하고 있었다.

    “법이 통과되기 전까지 소송을 최대한 유리한 쪽으로 끌고 가주세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소송 쪽은 저를 믿고 맡겨 주십시오.”

    국재훈 변호사의 말에 강우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국재훈 변호사가 법무법인에 합류한 이후 강우는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다. 동양 그룹을 향한 악의적인 기사들이나 허무맹랑한 소송들이 있었다. 모두 강우가 친일명부를 발표한 이후부터 있던 견제 세력들이었다.

    ‘국 변호사님의 적절한 대응이 아니었다면 제법 곤란을 겪을 법도 했지.’

    법무법인은 동양 그룹의 든든한 방패가 되어 주었다. 법무법인의 지원을 받으며 강우는 항상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저야 항상 믿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네, 사장님. 아…. 그리고….”

    국재훈 변호사가 살짝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이내 고민을 끝내고 말을 이어갔다.

    “요즘 연 검사가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습니다.”

    “정호가요?”

    강우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국재훈 변호사가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주변 사람들의 일에는 항상 민감하게 반응하는 강우였다. 절친인 연정호의 사정을 듣는다면 크게 화를 내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하지만 숨길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연 검사가 조직 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정호가 왜 그렇죠? 일도 항상 공정하게 처리하고 정말 좋은 검사 아닙니까?”

    국재훈 변호사의 얼굴에 부끄러움이 떠올랐다.

    “검찰은 그런 사람들이 힘들어지는 곳입니다. 더군다나 사장님의 친구라는 것이 알려지고 나서 압력이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

    강우의 표정이 대번에 분노를 띄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는 화를 억눌렀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제가 연락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말했다고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연 검사 그 친구가 사장님이 알게 될까 봐 엄청나게 걱정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동양 그룹이 견제 속에서도 성장할수록 저들의 손길은 강우 주변으로 넓혀지고 있었다. 강우는 국재훈 변호사와 한참이나 더 대화를 나누었다.

    “로비에 사람들이 많더군요.”

    “법률 조언을 받으러 온 사람들입니다. 그중에서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무료 변호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가능하면 많은 사람을 도와주세요.”

    “네, 사장님.”

    대화를 끝낸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또 오겠습니다.”

    “주차장까지 배웅하겠습니다.”

    강우가 고개를 저었다. 누구보다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는 국재훈 변호사였다. 당장 책상 위에도 엄청난 양의 서류들이 쌓여있었다. 국재훈 변호사는 중요한 소송 건들은 모두 직접 검토해야만 직성에 풀리는 스타일이었다.

    “괜찮습니다. 일도 바쁘신데요.”

    “그래도 같이 가시죠.”

    그런데 또 고집하면 국재훈 변호사였다. 강우가 결국 어깨를 으쓱하며 앞장섰다. 국재훈 변호사는 강우를 주차장까지 배웅했다. 강우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신뢰 이상의 것이 담겨있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강우가 고급 세단에 올라탔다. 정 기사가 차를 출발시켰다. 국재훈 변호사에게 손을 흔들어준 강우가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익숙하게 번호를 입력했다.

    뚜르르- 뚜르르-

    몇 번의 신호가 가고 통화가 연결됐다. 강우가 입을 열었다.

    “나다. 바쁘냐?”

    -어, 강우야. 나 지금 현장이야.-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너는 검사가 현장은 왜 그렇게 자주 나가는 거야.”

    -눈으로 봐야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거라고.-

    “오늘 저녁이나 같이하려고 했더니.”

    강우의 말을 들은 연정호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오늘은 힘들 거 같고. 내일 점심 먹자.-

    “그래, 알겠다. 그런데 정호야.”

    -어?-

    강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번에 내 제안 아직 유효하다.”

    -뭐…. 알겠어. 내일 보자.-

    강우와 연정호의 통화가 끝났다. 통화를 마친 강우가 좌석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왠지 모르게 피로감이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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