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3화 (363/402)
  •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다음 날 아침. 강우가 번쩍 눈을 떴다. 옆을 바라보니 이나은이 팔베개를 한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강우가 조심히 팔을 빼냈다. 그리고는 잠든 이나은을 내려다보았다. 곤히 잠든 이나은은 참 예뻤다. 강우가 이나은의 머리를 조심히 쓰다듬어 주었다.

    “으음….”

    이나은이 옅은 신음을 내며 몸을 뒤척였다. 하지만 잠에서 깨어나지는 않았다. 어젯밤 밤새 이어진 파티 때문에 술도 많이 먹었고, 잠도 늦게 잤기 때문이었다. 강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보자 비행기 시간이….’

    오늘은 강우와 이나은이 신혼여행을 출발하는 날이었다. 강우가 시간을 계산해보니 아직 시간 여유가 있었다. 강우는 먼저 씻고 나왔다. 그리고 호텔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간단한 조식 서비스를 시켰다.

    “나은아.”

    준비를 끝낸 강우가 이나은을 깨웠다. 이나은이 화들짝 놀라더니 벌떡 일어났다.

    “가…. 강우야! 나 설마 잠들었어?”

    이나은이 울상을 지었다. 어젯밤을 떠올린 강우가 살짝 헛기침했다.

    “흠흠…. 많이 피곤했지?”

    친구들과의 파티를 끝낸 강우와 이나은은 같은 호텔에 있는 스위트룸으로 향했다. 방에 도착한 두 사람 사이에는 정말 어색한 기운이 돌았었다. 두 사람이 사귄 게 한두 해가 아니었지만, 그렇게 한 방에서 밤을 같이 보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 미안해.”

    이나은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어젯밤은 강우와 이나은의 신혼 첫날밤이 아니었던가. 그냥 잠들어 버린 것이 아쉽고 미안할 뿐이었다. 하지만 강우는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괜찮아. 어제만 날인가?”

    “으응….”

    이나은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강우가 이나은을 번쩍 일으켜 주었다.

    “자~ 씻을 시간입니다. 공주님.”

    “응.”

    이나은이 여전히 부끄러워하며 씻으러 들어갔다. 그사이 강우가 주문한 조식 룸서비스도 도착했다. 강우는 이나은이 먹기 좋게 세팅을 했다. 그리고 조식을 먹고 난 후 바로 체크아웃을 할 수 있게 준비도 끝마쳤다.

    “밥이다.”

    씻고 나온 이나은이 조식을 보며 싱긋 웃었다.

    “간단히 먹고 바로 체크아웃해야 할 거 같아.”

    “비행기 시간 안 늦겠지?”

    이나은이 살짝 걱정스럽게 물었다. 신혼여행을 앞둔 이나은의 얼굴에는 설렘이 가득했다. 강우가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간 충분해.”

    “응.”

    강우와 이나은은 마주 앉아 조식을 먹기 시작했다. 과음한 이나은을 위해 강우는 한식으로 조식을 주문했다.

    “아~”

    이나은이 강우의 입에 반찬을 먹여 주었다. 강우는 헤벌쭉 웃으며 반찬을 받아먹었다. 이나은의 얼굴이 행복함으로 물들었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알콩달콩 대며 조식을 먹었다. 이윽고 조식을 모두 먹은 강우가 핸드폰으로 신원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일어났냐?”

    신원주와 친구들은 모두 같은 호텔에서 머물렀다. 어젯밤 밤새 이어진 파티에 강우가 방을 잡아주었다. 남자들은 그대로 파티룸에서 잤고, 여자들은 숙소를 따로 잡아주었다.

    -어?! 늦었냐?-

    신원주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어, 너희 때문에 우리 비행기 놓칠 거 같은데?”

    강우의 장난에 신원주가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야야! 다 일어나! 빨리 난리 났어! 강우야, 일단 끊어.-

    신원주의 당황한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끊어졌다. 강우가 씩 웃었다. 어제의 복수는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잠시 후, 호텔 로비에 모두가 모였다. 신원주는 강우를 보며 정말 놀랐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박강우. 진짜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아라.”

    “그걸 속냐?”

    강우가 픽 웃으며 말했다. 남자들이 분하다는 듯 침음성을 흘렸다.

    “그럼 나는 차 빼 올게.”

    “그래, 부탁해.”

    신원주는 주차장으로 차를 가지러 갔다. 오늘 공항까지 데려다줄 사람은 신원주와 채보라였다.

    “잘 다녀와. 선물 꼭 사 와라.”

    “한 달이나 못 본다니 아쉽다.”

    친구들이 강우와 이나은을 보며 말했다. 아직 잠이 덜 깬 모습들에 강우와 이나은이 웃음을 터트렸다.

    “잘 다녀올 테니까 다들 한국 잘 지키고 있어라.”

    강우의 말에 친구들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신원주가 차를 가지고 로비에 도착했다. 강우와 이나은이 짐을 싣고는 차에 올라탔다.

    지이잉-

    강우와 이나은이 창문을 내렸다. 친구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간다.”

    “다녀올게.”

    친구들이 손을 마주 흔들며 두 사람의 신혼여행을 배웅했다.

    * * *

    유럽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 강우와 이나은이 있었다. 두 사람은 일등석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강우가 슬쩍 옆을 바라보았다. 이나은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피곤할 만하지.’

    첫날밤을 다시 떠올린 강우가 실소를 흘렸다. 첫날밤이 허무하게 흘러갔지만, 그래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제 두 사람이 함께할 시간이 더 많지 않던가.

    “으음….”

    이나은이 몸을 살짝 비틀었다. 유럽까지 가는 비행길은 멀고 멀었다. 강우가 슬쩍 이나은의 자세를 바로잡아주었다. 그리고 강우는 준비된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신문에는 온통 강우의 결혼식이 대서특필 되어 있었다.

    -동양 그룹 신사옥 별관에서 치러진 세기의 결혼식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박강우 동양 그룹 부사장이 맞이한 하객들은 그날의 결혼식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보여주었다. 또한, 결혼식이 치러진 별관은 재단장을 거쳐 독립운동 역사박물관으로….-

    기사를 읽어내려가는 강우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 다른 신문들도 확인했다.

    -동양 그룹이 신사옥에서 정식으로 출범했다. 동양 그룹은 대대적인 사원 확충을 시작으로 대기업으로서의 면모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동양 그룹은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의 성장세를 보이며 현재 경제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기사는 모두 강우의 결혼식과 동양 그룹을 집중 조명하고 있었다. 특히 결혼식에 참석한 독립유공자분들과 일제 치하 피해자분들의 이야기도 심층 조명됐다. 강우가 의도한 대로였다.

    ‘음?’

    다른 신문을 확인하던 강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국제선 비행기답게 외국 신문 역시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외신들 역시 강우의 결혼식 이야기를 크게 다루고 있었다. 강우가 외신들을 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

    -한국 동양 그룹의 박강우 부사장의 결혼식이 지난 14일 성대하게 치러졌다. 한국 독립운동사를 재조명하는 콘셉트로 진행된 결혼식은 참석한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특히 일제에 의해 피해를 본 위안부 할머니들을 기리는 신부 이나은 양의 드레스는 많은 사람의 감동을 끌어냈다….-

    외신들 역시 난리가 난 상태였다. 사실 대부분의 외신은 강우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수많은 유명인을 취재하기 위해 몰려들었었다. 중국은 물론이고 일본에서 찾아온 하객 중에는 정치, 경제를 아우르는 거물급 인사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우의 결혼식이 끝난 후 외신들이 집중한 것은 강우가 의도한 대로였다.

    ‘외국에도 이 사실들이 널리 알려지면 좋지.’

    유명 외신들에 실린 기사를 보며 강우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신문을 모두 확인한 강우가 좌석에 몸을 깊게 묻었다. 어지간하면 피로감을 못 느끼는 강우였지만, 한숨 자야만 했다. 곧 있을 이나은과의 신혼여행을 위해서 말이다.

    * * *

    프랑스 파리 샤를 드 골 국제 공항에 강우와 이나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아침 일찍 탄 비행기는 12시간이 넘는 비행시간을 거쳐 파리 현지 시간으로 오후에 도착했다.

    “괜찮아?”

    강우가 이나은을 향해 물었다. 비행 내내 깨었다 잠들기를 반복한 이나은은 살짝 얼굴이 부어 있었다. 물론, 살짝 부은 얼굴도 아름다웠지만 말이다.

    “응, 푹 자서 좋아.”

    이나은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강우와 이나은은 유럽으로 신혼여행지를 정하고 루트를 정하기 위해 한동안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유럽을 보기에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오랜 상의 끝에 두 사람은 일정을 최대한 넉넉하게 잡았다.

    “일단 호텔에 가서 짐부터 풀자.”

    “응.”

    두 사람은 먼저 프랑스 파리를 첫 목적지로 정했다. 파리는 이나은이 꼭 와보고 싶다고 한 곳이었다. 감수성이 풍부한 이나은은 파리의 풍경을 꼭 눈에 담고 싶어 했다. 두 사람은 공항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한국과는 달리 두 사람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 자유로운 시선에 강우도 이나은도 마치 평범한 신혼부부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택시를 잡아야겠는데.”

    공항 택시 승차장에 도착한 강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한 명의 택시 기사와 눈을 마주쳤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택시 기사가 강우를 보고는 어색한 영어로 물었다.

    “F 호텔까지 갑니다.”

    강우가 능숙한 프랑스어로 입을 열었다. 택시 기사가 조금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여행 가방을 실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분명 여행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강우의 입에서 나온 프랑스어는 너무 능숙했다. 택시 기사가 강우에게 요금을 말했다.

    “네, 좋습니다.”

    “짐까지 실으려면 추가 요금이 붙습니다.”

    “네, 그러시죠.”

    트렁크가 열리고 강우가 여행 가방을 차에 실었다. 강우와 이나은이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여행하러 오신 게 아닌가 봅니다?”

    택시 기사가 차를 출발시키며 물었다. 강우가 씩 웃었다.

    “저희 사실 신혼여행입니다.”

    “오? 그렇습니까? 파리를 선택하시다니 아주 탁월하신 선택입니다.”

    강우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택시는 공항을 벗어났다. 달리는 차 안에서 보이는 파리의 풍경에 이나은이 작게 탄성을 뱉어냈다. 강우도 아름다운 풍경이라 생각하며 창밖을 주시했다. 이윽고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고맙습니다.”

    강우가 요금을 계산하고 팁까지 얹어 주었다. 택시 기사의 얼굴이 밝아졌다. 트렁크에서 짐을 꺼내자 택시는 바로 떠나갔다. 두 사람이 각자의 여행 가방을 들고 호텔을 바라보았다.

    “와~ 호텔 예쁘다.”

    “그러네.”

    1928년에 개관한 F 호텔은 최고급 호텔로서의 명성도 자자했다. 한눈에 보아도 고풍스러운 외관은 파리가 어떤 곳인지를 단번에 알려주고 있었다. 강우와 이나은은 이곳에서 파리에서의 일정을 전부 묵기로 했다.

    드르륵.

    강우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여행 가방이 바닥을 긁는 소리를 내며 강우를 열심히 뒤따랐다. 이나은도 강우와 함께 나란히 걸었다.

    “강우야, 그런데 너 프랑스어도 할 줄 알았어?”

    “어? 아…. 신혼여행 때문에 공부 좀 했거든.”

    강우의 말에 이나은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공부하는 것으로 프랑스어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강우였다. 강우도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강우가 구사하는 언어들 대부분은 할아버지의 기억과 함께 얻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다른 언어들을 공부하면서 느꼈다.’

    강우는 이제 언어 능력 자체가 만개한 듯했다. 신혼여행을 위해 간단히 하려던 언어 공부가 너무 쉬웠다. 강우는 유럽 여행을 위해 시작한 언어 공부에서 뜻밖의 능력을 깨달은 것이다. 호텔 입구에 도착하자 멋들어진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다가왔다.

    “예약했습니다. 이름은 박강우입니다.”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강우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프런트에 도착했다. 강우가 능숙한 프랑스어로 체크인을 끝마쳤다. 강우가 오늘 예약한 방은 F 호텔 디럭스 스위트룸이었다. 체크인을 끝낸 강우와 이나은의 짐을 직원이 들어주었다. 강우와 이나은은 안내를 받아 예약한 방까지 도착했다.

    “고맙습니다.”

    강우가 팁을 건네주었다. 호텔 직원이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떠나갔다. 강우가 키를 이용해 호텔 방문을 열었다.

    “와~”

    방 안을 확인한 이나은이 감탄성을 터트렸다. 영화에서나 보던 고풍스러운 실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강우가 씩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일단 짐부터 풀자.”

    “응.”

    두 사람은 여행 가방을 적당한 위치에 놓았다. 그리고는 대번에 한쪽에 있는 테라스로 향했다. 파리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나은이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강우야, 우리 빨리 구경 나가자.”

    “배는 안 고파?”

    “응, 아직 괜찮아. 밥도 나가서 먹자.”

    기내식을 든든히 먹은 이나은이 아직 배는 고프지 않은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곧장 호텔을 벗어났다. 거리로 나오자 서서히 노을이 지고 있었다. 은은한 조명들이 거리를 아름답게 비추고 있었다.

    “그럼 처음 목적지는요?”

    강우가 손을 내밀며 물었다. 이나은이 싱긋 웃으며 강우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강우가 이나은을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냥 걸으실까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좋지.”

    강우와 이나은이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 파리의 풍경이 정해주는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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