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3화 (353/402)

하지만 저희는 포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대한민국이 강우와 이나은의 이야기로 연신 시끄러울 때. 강우는 법무법인 광복을 방문했다. 아직 많은 사람이 모르는 치열한 싸움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강제노역 소송을 개인이 감당하면서 많이 힘드셨을 거로 생각합니다.”

강우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강우의 앞에는 두 명의 남성이 앉아있었다. 수년간 일본 법정과 강제노역 소송을 힘겹게 이어오고 있는 피해자분들이었다.

“나라를 상대로 개인의 힘이 얼마나 미약한지….”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년의 남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노년의 남성은 여운철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성이었다. 1997년 일본 철강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낸 두 명의 피해자분 중 한 명이었다.

“여러 단체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그나마도 불가능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저희도 지쳐가던 차였습니다.”

여운철의 옆에 앉아있던 또 한 명의 남성이 입을 열었다. 여운철과 함께 길고 긴 소송을 같이해온 신경섭이었다.

“이제 저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건강부터 챙기세요.”

강우의 말에 여운철과 신경섭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법무법인 광복에서 연락을 받던 순간을 떠올렸다. 조건 없는 지원과 협력을 약속한다는 그 말에 가슴에 쌓였던 묵직한 감정이 쓸려 내려가는 것 같았다.

“솔직히 우리에게까지 도움의 손길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여운철이 긴 숨을 뱉어냈다. 일제에 의해 피해를 본 많은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정부의 외면을 받아왔다. 나라를 위해 싸운 독립운동가들마저 소외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사단법인 광복이 나타났다.

“너무 늦게 도움을 드려 죄송합니다.”

강우가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러자 여운철과 신경섭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이렇게 도움을 주신 것만으로도 정말 힘이 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강우를 보며 고맙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국재훈 변호사가 입을 열었다.

“먼저 일본최고재판소에 올라가 있는 상고심부터 저희가 법무 대리를 맡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두 분께서 모아온 자료들도 모두 인수하였습니다.”

“우리 쪽에서 그동안 수집한 자료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두 개를 잘 활용해서 최대한 노력해 주세요.”

강우의 말에 국재훈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최고재판소에서의 법정 싸움은 솔직히 승산이 희박하다고 보고 있었다. 국재훈 변호사가 여운철과 신경섭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국재훈 변호사의 말에 여운철과 신경섭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사실 두 사람 역시 이미 상고가 기각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여운철과 신경섭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번 재판은 상고기각 될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두 사람의 얼굴에 커다란 실망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국재훈 변호사가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저희는 포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강제노역 재판은 한국에서 새로운 소송으로 시작할 예정입니다.”

국재훈 변호사가 잘 정리된 프린트물을 여운철과 신경섭에게 내밀었다. 그 프린트물에는 법무법인 광복이 앞으로 진행할 소송의 방법과 과정들이 자세히 적혀있었다. 물론, 두 사람이 알기 쉽게 정리한 것이었다. 프린트물을 차분히 읽어내려간 두 사람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이렇게까지 준비를….”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강우와 국재훈 변호사를 향해 고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강우가 입을 열었다.

“재단에서 백방으로 조사해 모은 자료들의 양이 엄청납니다. 그리고 일본에 있는 조력자분들 역시 자료들을 모아 주셨습니다. 그동안 일본 법원에서 가장 문제 삼았던 일본 철강 회사의 개별 법인 문제는 이 자료들이라면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알아내려 해도 못 구했던 자료들입니다.”

여운철이 감탄을 하며 말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일본 내에 있는 자료들은 모두 하루오의 도움으로 수집할 수 있었다. 역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 중인 하루오는 강우의 부탁에 발을 벗고 나서 자료를 모아주었다. 일본 내에서 인맥이 넓고 유력한 가문의 주인이 하루오였다. 이 정도 자료를 수집하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이 자료들을 바탕으로 서울중앙지법에 손해배상 청구를 제기할 생각입니다. 시기는 일본최고재판소의 상고기각이 나오는 순간부터입니다. 법무법인 광복의 모든 역량을 집중해서 두 분의 소송을 승리로 이끌겠습니다. 아니 이 나라에 있는 수많은 강제노역 피해자분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강우의 말에 여운철과 신경섭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강우의 강렬한 눈빛과 말투에는 승리에 대한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여운철과 신경섭이 입을 벌리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나이는 어렸지만, 역시 알려진 대로 엄청난 인물이었다. 그리고 강우가 지금껏 벌이고 있는 일들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독립투사분들은 물론이고 위안부 피해자분들까지 돕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강제노역 피해자들을 대표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두를 대신해서 감사합니다.”

여운철과 신경섭이 강우를 향해 정중히 감사를 표했다. 나이가 지긋한 두 사람의 그런 행동에 강우가 재빨리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저희 사단법인과 법무법인은 두 분뿐만이 아니라 강제노역 피해자분들 모두가 정당한 사과와 합당한 배상을 받으실 때까지 최선을 다해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재단에서 두 분에 대한 지원도 시작할 예정입니다. 너무 늦게 시작해서 죄송할 뿐입니다.”

강우가 두 사람을 향해 정중히 인사를 했다. 그런 강우의 모습을 보며 국재훈 변호사가 속으로 감탄을 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했다. 박강우 이사장님은 정말 겸손하고 따듯한 사람이구나.’

그렇게 강우와 국재훈 변호사는 한참이나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 여운철과 신경섭은 그동안 쌓였던 많은 이야기를 강우와 국재훈 변호사에게 털어놓았다. 어쩌면 두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렇게 이야기를 들어주고 같이 공감해줄 사람이었는지도 몰랐다.

* * *

여운철과 신경섭은 마지막 돌아서는 순간까지 강우와 국재훈 변호사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두 사람을 배웅하고 강우와 국재훈 변호사는 사무실로 돌아와 마주 앉았다.

“강제노역 피해자분들의 명단은 확인하셨나요?”

강우의 질문에 국재훈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단법인 광복에서 총력을 다해 조사한 명단이었다. 물론, 과거부터 강제노역 피해자 명단은 존재했다. 일본 정부가 1971~1993년까지 한국 정부에 이관한 문서에 기재된 48만 명 그리고 한국 정부가 1957~1958년에 작성한 피징용자 명단 약 26만 명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두 명단 모두 피해자를 특정하기가 힘든 자료라는 게 문제지.’

그런 이유로 피해자 대부분이 제대로 된 보상은커녕 강제노역 피해자로 인정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네, 하지만 피해자분들의 강제노역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죠.”

강우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미래의 기억을 떠올렸다.

‘2013년 주일 대사관에서 발견된 강제노역 명단이 있었지.’

그 명단으로 인해 피해 사실이 입증된 강제노역 피해자분들의 숫자가 16만 명이나 되었다. 강우가 눈을 빛내며 하루오를 떠올렸다. 하루오의 인맥과 힘이라면 주일 대사관에 있는 자료를 얻을 방법이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하루오는 강우의 부탁이라면 언제든지 발 벗고 나설 것이었다.

“그 부분은 제가 해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강우의 말에 국재훈 변호사가 눈을 빛냈다. 현재까지 수집한 자료들만 하더라도 엄청난 양이었다.

“알겠습니다. 저희는 일단 전달받은 자료를 토대로 최대한 피해 사실을 입증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 소송은 단기간에 끝날 문제가 아니니까 천천히 한 걸음씩 나가도록 하죠.”

“네, 이사장님.”

강우가 여운철과 신경섭을 떠올렸다.

“일단 여운철 님과 신경섭 님의 소송에서 이겨야 유리한 판례를 확보할 수 있을 거고요.”

“우리 변호인단의 능력을 믿어주십시오.”

강우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가 심혈을 기울여 영입한 법무법인 광복의 변호인단이었다. 능력은 물론이고 인품까지 두루 갖춘 최강의 변호인단이었다. 강우는 법무법인 광복의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럼, 앞으로 고생 많이 해주십시오.”

강우가 국재훈 변호사를 향해 말했다. 국재훈 변호사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시작입니다. 앞으로 이사장님께서도 많이 도와주십시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물심양면으로 항상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강우가 힐끗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침부터 이어진 미팅은 어느새 점심시간까지 이어진 상태였다.

“다들 점심 식사하러 가시죠?”

“밥 사주시는 겁니까?”

“그럼요. 제가 밥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삽니다.”

“그럼 전부 불러도 되겠습니까?”

강우가 씩 웃었다.

“당연하죠. 지금 점심 가능하신 분들 전부 같이 가시죠.”

“네, 그럼 준비시키겠습니다.”

국재훈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강우는 핸드폰을 들어 최 비서에게 연락했다. 그리고 법무법인이 있는 종로 근처의 한식집 예약을 부탁했다. 통화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최 비서의 연락이 바로 왔다.

-부사장님, 예약 완료했습니다.-

“고마워요.”

역시 일 처리 하나는 끝내주는 최 비서였다. 그사이 국재훈 변호사가 돌아왔다.

“다들 같이 먹으러 간다고 합니다. 이거 인원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괜찮습니다.”

현재 법무법인 광복에 소속된 변호사는 스무 명이었다.

“그럼 출발하시죠.”

강우가 사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많은 변호사가 강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강우와는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강우가 면접을 보고 한 명 한 명 뽑았기 때문이었다.

“다들 잘 지내셨죠? 일단 식사하러 가시죠. 근처 한식집으로 예약해 놓았습니다.”

강우와 법무법인 광복 소속의 변호사들은 근처 한식집으로 향했다. 잠시 후, 강우 일행은 한식집에 도착했다. 강우 일행은 안내를 받아 예약석으로 향했다. 많은 인원이었지만, 최 비서가 예약해놓았기 때문에 모두가 들어가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이렇게 다 모인 건 처음이죠?”

국재훈 변호사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변호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답했다. 국재훈 변호사가 강우를 보며 말했다.

“이렇게 다 모이기도 힘든데 한마디 해주시죠.”

“아…. 그럴까요.”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면…. 정말 힘든 소송들일 수 있습니다. 일개 법무법인이 한 국가를 상대로 싸우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여러분의 뒤에 일제에 의해 피해를 본 수많은 피해자분이 계신다는 것만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분들을 위해 겁먹지 말고, 지치지 말고 최선을 다해주세요.”

강우의 말에 변호사들이 눈을 빛내며 손뼉을 쳤다. 강우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최 비서가 미리 주문한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메뉴는 정갈한 한정식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다음에는 더 맛있는 거로 사드리겠습니다.”

강우와 국재훈 변호사가 식사를 시작했다. 변호사들도 맛있게 점심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이사장님, 인원 보충은 더 하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인원이요?”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국재훈 변호사가 부드럽게 웃었다.

“지금 하는 소송들도 중요하지만, 세상에는 다른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음…. 그렇군요.”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인원이 다른 유명 법무법인에 비하면 인력이 적은 편이기는 했다.

‘생각해보면 나중에는 다른 소송들을 담당할 변호사들도 고용하기는 해야겠지.’

장기적으로 법무법인 광복은 대진 그룹은 물론이고 동양 무역의 여러 법무 쪽 일도 담당해줄 곳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국재훈 변호사의 말처럼 세상에는 변호사들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많았다.

“물론, 인력을 마구 늘려달라는 말은 아닙니다. 결정권은 이사장님에게 있으니까요.”

말을 마친 국재훈 변호사가 부드럽게 웃었다. 강우가 국재훈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역시 듣던 대로 참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네요. 제가 인복이 많은가 봅니다. 국 변호사님 같은 분을 만난 걸 보면요. 인력 충원은 바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새로 뽑을 인력 역시 제가 면접을 보겠습니다.”

강우의 말에 국재훈 변호사가 환하게 웃었다. 강우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호감이 가득했다.

“정호 덕분에 제가 뼈를 묻을 곳을 찾은 느낌입니다. 제 모든 힘을 쏟아부어 이사장님과 함께 나아가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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