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대가 없이 말이에요?
강우를 중심으로 여러 명의 할머니가 앉아계셨다. 강우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여러 감정이 담겨있었다. 오늘 강우가 초대한 분들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었다.
“어려운 발길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우가 다시 한번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인사를 했다. 커다란 회의실에 모인 할머니들의 숫자는 약 열 명가량이었다. 현재 생존해 계신 위안부 할머니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반도 오지 않은 인원이었다. 하지만 오늘 참석한 할머니들도 정말 정성을 들여 다가간 덕분에 초대할 수 있었다.
‘그만큼 할머님들의 마음은 굳게 닫혀있다.’
한국 정부가 파악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숫자는 총 240명 정도였다. 하지만 할머니 대부분이 돌아가시고 현재 남은 인원은 40명 안팎이었다. 나머지 할머님들은 피해에 대한 어떤 보상도 그리고 위로도 받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셨다.
“오늘 불러줘서 고마워요.”
할머니 중 한 분이 강우를 보며 말했다. 강우를 향해 말한 할머니는 김씨 성을 가진 할머니였다. 1992년 위안부 피해 증언을 시작으로 인권운동도 활발히 하고 계시는 분이었다. 입을 닫은 채 알 수 없는 표정의 다른 할머니들과는 달리 강우에게 호의적인 표정을 짓고 계셨다.
“아닙니다. 제가 한 분 한 분 찾아뵀어야 했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강우가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하지만 김 씨 할머니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바쁜 몸이니 이해해요. 대신 재단 직원들이 참 고생을 많이 했어요. 오늘 모인 우리 할머니들도 모두 직원들의 정성에 감동하여 자리한 거니까요. 안 그래요. 다들?”
김 씨 할머니가 주변 할머니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할머니들이 그 부분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직원들이 어찌나 예의 바르고 배려가 있는지 거기에 마음이 움직인 건 사실이지.”
“재단이 평소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말문이 트이기 시작하자 할머님들이 하나둘씩 자기 생각을 이야기했다. 강우는 그런 할머님들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오늘 제가 할머님들을 모신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먼저 할머님들에 대해 지원을 하기 전에 많은 대화를 나누어 보고 싶었습니다. 제가 독립유공자의 손자이기는 하지만 솔직히 할머님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강우의 말에 할머님들이 작게 탄성을 뱉어냈다. 강우를 바라보며 감동한 표정을 짓는 할머님들도 있었다. 사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할머님들은 비슷한 생각을 했다. 또 누군가에게 이용당하기 싫었고, 상처를 받기 싫다는 마음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묘하게도 강우의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저희는 할머님들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물심양면으로요. 그러기 위해서 할머님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지 아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약속은 드릴 수 있습니다. 저희는 절대 할머님들을 이용하지 않고 묵묵히 할머님들이 하시는 일을 지원하고 돕겠습니다.”
강우의 말에 할머니들의 얼었던 마음이 스르륵 녹아내렸다. 몇 년 전인 2000년에는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법정’이 있었다. 그리고 다음 해인 2001년에 인류 범죄에 해당하는 총 10명의 피고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그 이후로 할머님들의 이야기가 세상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일본은 여전히 배상을 거부하고 있고, 할머님들은 어려운 싸움을 하고 계시지.’
강우가 할머니들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연세가 많은 할머니의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다. 하지만 한 분 한 분의 눈빛은 살아있었다. 강우는 그런 할머니들을 보며 생각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의 주체는 할머님들이어야 한다. 우리는 뒤에서 할머님들을 전폭적으로 도울 뿐.’
생각에 빠진 강우를 향해 김 씨 할머니가 물었다.
“그래요. 그럼 사단법인 광복에서는 우리를 어떻게 돕겠다는 건가요?”
“필요하신 부분을 말씀해 주시면 전폭적으로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할머님들이 원하는 그 어떤 것에도 이익을 위한 판단이나 우리 재단의 명예를 위한 판단도 들어가지 않을 겁니다.”
할머니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지금껏 이렇게까지 자신들을 돕겠다는 단체는 없었다. 그리고 강우의 말에서는 굳은 신뢰감이 느껴졌다.
“아무런 대가 없이 말이에요?”
김 씨 할머니가 강우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님들이 이 일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할머님들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인지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재단을 세운 것은 바로 할머님들 같은 분들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할머니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독립유공자의 후손으로 그동안 강우가 보여온 행보는 할머니들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 행동 하나하나가 지금 할머니들에게 신뢰를 심어준 것이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한 분 한 분 제 할머니라고 생각하고 모시겠습니다. 오늘은…. 복잡한 이야기보다 정겹게 대화를 나누고 맛있는 것도 드시고 속에 있는 말도 다 하고 가세요.”
강우의 말에 할머니들이 활짝 웃었다. 손자 같은 강우의 말에 푸근한 마음을 느꼈다. 이윽고 회의장 안이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다. 마음을 연 할머니들은 곁에 있는 직원들에게 끝없이 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직원들은 마음을 다해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래, 상처받은 분들에게 마음으로 먼저 다가가는 게 우선이지. 다른 것들은 그 이후에 생각하자.’
그런 강우를 향해 김 씨 할머니가 다가왔다.
“강우…. 강우라고 편하게 불러도 될까?”
“네, 할머니. 손자처럼 생각해주세요.”
김 씨 할머니의 눈시울을 붉어졌다. 깊은 상처를 안고 평생 외롭게 싸워왔던 할머니들이었다. 이렇게 마음으로 먼저 보듬어 주는 강우를 만나니 그동안 쌓였던 응어리가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할머님들 다들 시간 괜찮으시죠?”
어느새 강우도 할머니들을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할머니들도 강우를 손자처럼 생각하며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럼, 오늘은 우리 강우가 사주는 밥 얻어먹고 가야지.”
“그래, 이런 기회가 언제 오겠어.”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솔직히 자주는 약속 못 해 드려요. 하지만 시간 나는 대로 찾아뵐게요.”
강우의 말에 할머니들의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강우는 할머니들을 모시고 근처의 식당으로 향했다. 연세가 있으신 할머니들을 배려해 메뉴 선정도 자극적이지 않은 건강식 삼계탕으로 골랐다.
“아이고~ 우리 강우가 늙은이들 편하게 먹으라고 메뉴도 좋은 걸 선택했네.”
“잘 먹을게 강우야.”
마음을 연 할머니들은 강우의 메뉴 선택까지 마음에 들었나 보다. 연신 강우를 칭찬하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로 들어간 강우와 할머니들은 예약한 자리로 안내를 받았다.
“그래, 할아버지는 잘 계시고?”
할머니들이 할아버지에 관해 물었다. 독립운동가인 할아버지 역시 잘 알려져 있었다. 할머니들의 질문에 강우가 씩 웃었다. 그리고는 시계를 힐끗 보고는 가게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오실 때가 됐는데….’
그때였다. 가게 문이 열리고 할아버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옆에는 최 비서도 함께였다. 강우를 발견한 할아버지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테이블로 다가왔다. 할머니들이 깜짝 놀라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할머니들에게 다가온 할아버지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들 하십니까? 강우 할아버지 박재봉입니다. 갑자기 찾아와 부담을 드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꼭 만나고 싶었습니다.”
할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할머니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할아버지를 향해 마주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전혀 부담스럽지 않아요.”
할머니들을 할아버지를 보며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 가족의 이야기는 드라마를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었다. 강우와 최 비서 그리고 동석한 재단 직원들이 숨을 죽였다. 독립운동가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만남은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해주었다.
“오늘 제가 이렇게 온 것은 모든 독립운동가를 대신해 사과와 위로를 전해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을 지켜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할아버지가 쓰고 온 중절모를 벗은 후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나라가 지켜주지 못한 할머니들을 보며 가슴 아파하던 할아버지였다. 그런 할아버지를 보며 할머니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할머니들이 일제히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잘못한 게 없다며 다독여 주었다. 할아버지가 긴 숨을 뱉어냈다.
“이제 우리 강우에게 다 맡겨 주세요. 강우가 다 해결해 줄 겁니다.”
할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말했다. 할머니들도 강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식사를 마치고 할머니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셨다. 재단으로 돌아온 강우는 이사장실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일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역시나 한일 협정으로 인해 국가 간의 배상책임은 끝난 상태였고,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개인 간의 배상 문제는 남아있다는 의견 정도가 나온 상태였다.
‘즉, 강제 징용자 소송 건과 같이 개인의 자격으로 일본 정부와 법정소송을 해야 한다는 거지.’
그 외에도 문제는 산적해 있었다. 일단 위안부 할머니들은 현재 여러 단체로 나뉘어 소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각 단체는 갈등을 빚고 있었다. 강우는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의 본질이 크게 왜곡되어 있어. 일본 정부에게서 진정성 어린 사과를 받는 것. 그것이 진정 할머니들이 원하시는 걸 텐데….’
하지만 할머니들 역시 열악한 형편에서 지내고 계셨다.
‘그런 할머니들의 어려운 상황을 이용해 일본은 정부 차원이 아닌 아시아 여성기금이라는 사설 단체를 통해 배상이 아닌 위문금 지급을 시도했다.’
그런 위문금을 놓고도 할머니들 사이에서 갈등이 있었다. 어떤 할머니들은 위문금을 받았고, 또 어떤 할머니들은 국가 차원이 아닌 배상을 거부하며 일본 정부를 비판했다. 강우는 그런 할머니들 모두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할머니들이 그렇게 된 것에는 정부의 무관심과 사람들의 무관심이 컸다고 생각했다.
‘하나씩 바꿔나가야지.’
일단 오늘 만남을 계기로 강우는 다른 할머니들도 한 분씩 접촉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할머니들의 뜻을 하나로 모아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전에 들어갈 것이었다. 할머니들에 대한 생계지원과 주거 지원 그리고 국민의 관심을 끌어내는 것도 병행할 생각이었다.
‘나 개인의 힘으로는 벅찰 수도 있다. 이 일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관심이 가장 중요해.’
물론, 강우는 자신이 있었다. 옳은 일을 하는 데 있어서 거리낄 것도 없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할머니들이 더 상처받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강우는 할머니들의 뒤에서 묵묵히 지원할 생각이었지만, 또한 적극적으로 할머니들을 지킬 생각이었다.
‘일단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하나씩.’
강우가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똑똑.
이사장실 문을 노크하고 직원 한 명이 들어왔다. 강우를 향해 꾸벅 인사한 직원이 입을 열었다.
“할머님들 모두 무사히 집에 도착하셨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아…. 고마워요.”
할머니들의 귀가 소식을 기다리던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잘못되었던 역사를 바로잡는 일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강우는 모든 힘을 쏟아부어 역사를 바로잡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