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0화 (340/402)

잘 부탁드립니다. 회장님.

보훈처 안에 들어간 강우와 진남규 모자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서울지방보훈처의 보훈심사위원회의 위원장이었다.

“박강우 이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심사위원회 정훈희 위원장입니다.”

“아…. 반갑습니다. 박강우입니다.”

강우가 정훈희 위원장과 악수를 하였다. 의도하지 않자 정훈희 위원장의 과거와 미래는 밀려들지 않았다. 강우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는 원하는 순간만 능력을 쓸 수 있을 만큼 익숙해진 상태였다.

“이분들이 진병호 유공자님들의 가족들이시군요.”

정훈희 위원장이 진남규 모자를 보며 물었다. 진남규가 앞으로 나서며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진남규입니다. 이쪽은 제 어머니인 정선주입니다.”

진남규 어머니의 이름은 정선주였다. 고운 심성만큼 참 기품 있는 이름이었다. 강우와 진남규 모자는 사무국으로 안내를 받았다.

“등록 절차를 위한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필요한 서류는 모두 가지고 오신 겁니까?”

“여기 있습니다.”

강우가 서류를 내밀었다. 정훈희 위원장이 서류를 받더니 사무국에 있는 직원 중 누군가를 불렀다. 그리고는 서류를 건네며 말했다.

“이미 심사도 모두 통과된 상태니까 빠르게 등록 절차를 마무리하도록 해.”

“네, 위원장님.”

직원이 긴장된 표정으로 답했다. 유가족 등록에 심사위원회의 위원장이 직접 나설 정도니 말이다. 직원이 돌아가고 정훈희 위원장이 강우를 바라보았다.

“요즘 이사장님 덕분에 저희가 아주 일이 편해졌습니다.”

“그런가요?”

사단법인 광복은 아직 유공자 인정을 받지 못한 많은 사람을 돕고 있었다. 재단에서 너무 완벽히 일 처리를 하는 바람에 오히려 보훈청의 심사가 직관적으로 쉬워진 상황이 생긴 것이었다.

“네, 그리고 접수를 하시는 분들은 전부 유공자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정말 광복 재단의 일 처리는 정말 깔끔하고 완벽한 것 같습니다.”

“그분들에게 두 번의 상처를 드릴 수는 없으니까요. 이미 상처가 많으신 분들입니다. 그러니 완벽하게 자료를 모으고 소송에서 이기고 서훈 절차까지 신중하게 접근을 하는 것뿐입니다.”

“아….”

정훈희 위원장의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단순히 보훈처의 일을 업무로만 생각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강우는 자신들이 생각한 것보다 더 대단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앞으로 저희 쪽에서 법적 절차를 마무리 짓는 분들이 많아질 겁니다. 그분들은 제가 일일이 함께 오지는 못할 겁니다. 하지만 제가 왔다고 생각해주시고 따듯이 대해주시기 바랍니다.”

“네, 이사장님.”

정훈희가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강우의 진심을 느끼고 나니 무언가 책임감이 생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속으로 감탄했다. 나이는 어리지만, 지금의 위치를 이룰만한 강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유가족 등록은 일사천리로 끝났다. 이미 법적 절차는 모두 끝났고 서류 접수만 하면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축하드립니다. 이제 진남규 님과 정선주 님은 정식으로 독립유공자의 가족으로 인정받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진남규가 떨리는 기분으로 관련 서류를 받았다. 정훈희 위원장이 진남규를 보며 말했다.

“국적 회복도 진행하시면 절차를 밟아 바로 회복이 될 겁니다.”

“그 부분은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진남규는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염원을 이루었을 뿐 한국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순간이었다.

“혹시 한국에 아버님의 가족들이 있나요?”

진남규의 어머니 정선주가 정훈희를 향해 물었다.

“당연히 있습니다. 돌아가신 진병호 유공자분의 친척이 계십니다. 명단을 알려드릴까요?”

“그게 가능합니까?”

정훈희 위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정선주가 크게 심호흡을 하며 명단을 받아 확인했다. 명단을 확인한 정선주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엄마, 저도 좀 볼게요.”

진남규가 정선주의 손에서 명단을 가져와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침음성을 뱉어냈다.

“정말 단 한 분밖에 남아있지 않은 겁니까?”

명단에 적혀있는 친척들은 그야말로 딱 한 명이 남아있었다. 물론, 유가족으로 인정받은 것은 진병호의 손자녀까지만이었다. 진병호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중국으로 넘어가기 전 한국에도 가족이 있었다.

“네, 진병호 유공자분의 손녀 한 분만이 살아 계십니다.”

“그랬군요….”

진남규가 강우에게 명단을 보여주었다. 강우가 명단에 적힌 이름을 확인하고는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진기주라….’

강우의 머리에 담겨있는 사단법인 광복 소속의 후손들 명단이 빠르게 지나갔다. 하지만 그 명단에도 진기주라는 이름은 없었다. 강우가 이번에는 광복회 소속의 유공자들과 후손들의 명단도 떠올렸다.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명단에 없네.’

현재 사단법인 광복과 광복회는 하나의 단체와 같은 상황이었다. 강우의 도움을 받은 광복회는 예전의 모습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나는 중이었다. 그런 이유로 강우는 한국에 존재하는 유공자 대부분과 후손들의 인적 사항을 기억하고 있었다. 강우가 가진 놀라운 기억력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즉, 강우가 모르는 사람이라면 두 단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 말은 어떤 도움을 받고 계시지 않다는 말이겠지.’

2002년 보훈법의 현행법상 손녀가 받을 수 있는 혜택의 범위는 대학 등록금과 취업 지원이 전부였다. 마흔한 살의 나이라면 보훈처에서 받을 수 있는 혜택은 전혀 없었다. 유공자들에 대한 대우가 아쉽다고 느낀 강우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이것도 하나씩 바꾸어 나가면 좋겠는데.’

하지만 정부의 정책이었으니 강우가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강우가 다시 명단을 확인했다. 간단한 생년월일과 현재 사는 주소만이 적혀있었다.

‘현재 거주지는 제주도로 되어있군.’

강우가 진남규를 바라보았다. 진남규와 정선주는 생각이 많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남규가 정훈희 위원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진남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 이제 가요.”

“그래, 알겠어.”

진남규가 강우를 향해서도 가자고 말했다. 강우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훈희 위원장이 세 사람을 배웅했다.

“이사장님, 앞으로도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

정훈희가 강우를 향해 말했다. 강우도 정훈희 심사위원장을 향해 말했다.

“최대한 많은 분의 서훈이 이루어지도록 정확한 심사 부탁드립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윽고 강우와 진남규 모자가 보훈청의 입구로 나왔다.

“하아….”

손에 들린 유가족 등록 서류를 바라보는 진남규가 긴 숨을 뱉어냈다. 이 몇 장의 증명서를 받기 위해 수많은 일을 겪은 세월이 있었다. 진남규의 아버지는 이 증명서를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심지어 사기를 당하기 일쑤라 남아있던 가산마저 탕진했었다. 강우를 만나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아버지의 염원도 풀었고, 나도 엄마도 이렇게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어.’

진남규가 정선주를 힐끗 바라보았다. 정선주 역시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엄마,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지금 너무 기뻐서 그래.”

정선주가 눈가를 훔쳤다. 가슴속에 간직하던 응어리가 지금, 이 순간 눈 녹듯 녹아내림을 느꼈다. 정선주가 강우의 손을 잡았다.

“강우야, 정말 고마워. 이 은혜를 어찌 갚을까?”

“아니에요. 당연한 일이 제자리로 돌아온 거죠.”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정선주의 얼굴은 정말 홀가분해 보였다. 오랜 염원을 풀고 나니 긴장감이 풀리는 것이었다. 진남규가 강우를 보며 말했다.

“회장님, 우리 가족을 위해 신경 써주신 것 더 열심히 일해서 보답하겠습니다.”

“지금도 충분해요. 대신 앞으로 죽을 때까지 어디 갈 생각은 하지 마세요.”

진남규가 감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강우를 만나고는 하루하루가 달라지는 삶이었다. 강우가 진남규를 향해 물었다.

“오늘은 두 분을 위해서 제가 저녁 시간은 비워놨습니다. 어디 가시고 싶은 곳이 있으면 말하세요.”

강우의 말에 정선주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바쁠 텐데…. 우리 때문에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아니에요. 중국으로 돌아가시면 한국에서 못 해본 게 아쉬우실걸요? 오늘은 제가 완벽한 일일 가이드가 되어드리겠습니다.”

강우의 말에 정선주가 환하게 웃었다. 정말이지 겸손하고 배려심이 넘치는 강우였다. 그때, 진남규가 진지한 표정으로 정선주를 바라보았다.

“엄마.”

진남규의 진지한 표정에 정선주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진남규의 저런 표정은 강우를 만나기 전 방황하던 그때의 얼굴이었다.

“왜 아들.”

“그분을 만나러 가고 싶어요.”

진남규의 말에 정선주가 흠칫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긴 숨을 뱉어냈다.

“우리의 존재도 모르고 있던 분일 거야. 우리가 그 앞에 가는 게 옳은 일일까?”

“하지만, 제게는 누나…. 누나인 거잖아요.”

진남규의 말에 정선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진병호의 배다른 아들이 바로 진기주의 아버지였다. 진남규와 진기주는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애매한 관계였다. 굳이 서로의 인생에 갑작스럽게 나타날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그냥…. 중국으로 돌아가자. 그리고 우리 둘이 행복하게 살고. 엄마는 지금 이렇게 죽은 네 아버지의 염원을 푼 것만으로 충분해. 그 일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아.”

“음….”

진남규가 침음성을 흘렸다. 정선주의 말을 듣고 보니 자신의 욕심인가 싶었다. 하지만 진남규는 강우를 옆에서 지켜봐 왔다. 가족을 찾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 필연적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던 강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마 그분도 두 분의 존재를 알고 있을 겁니다.”

강우의 말에 진남규와 정선주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유가족 등록을 위한 소송을 진행한 지 제법 됐을 겁니다. 그 과정에서 자료 조사를 위해 진기주 님에게도 연락이 갔을 거고요. 두 분의 존재를 모를 리가 없을 겁니다.”

강우의 말에 진남규와 정선주가 탄성을 뱉어냈다. 차마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나 보다.

“회장님,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진남규가 강우를 향해 물었다. 나이는 어렸지만, 자신이 항상 의지하고 따르는 강우였다. 강우라면 가장 정확하고 올바른 답을 주리라 생각했다. 정선주 역시 같은 생각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잠시 고민하던 강우가 입을 열었다.

“역시 가족은 모른척한다고 잊고 지낼 존재는 아니겠죠. 오늘 바로 가시죠. 제주도 여행도 할 겸 말이죠.”

강우가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 최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제주도행 비행기와 호텔까지 금세 예약을 해버렸다. 그런 강우를 보며 진남규가 역시라는 생각을 했다. 중국에서도 한국에서도 강우의 추진력은 정말 대단했다. 이윽고 최 비서와의 통화를 끝낸 강우가 두 사람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모든 준비는 끝났어요. 이제 두 분 마음의 준비만 하시면 됩니다.”

강우의 말에 진남규와 정선주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진남규가 정선주를 바라보았다. 정선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남규가 입을 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회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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