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9화 (339/402)

명심하겠습니다.

사단법인 광복이 맡기로 한 소송은 결코 쉬운 것들이 아니었다. 나라와 나라 간의 외교 문제와 개인이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건다는 문제도 걸려있었다. 그런 이유로 강우는 최고의 변호인단을 꾸리기를 원했다. 유능한 변호인을 모으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자본이야 충분했고, 내 능력이라면 그 사람의 유능함과 진실성을 알아보는 건 충분하다.’

강우는 법무법인 광복을 세우고 최고의 변호인단을 꾸렸다. 국제 소송을 위해 엘리트 중의 엘리트들을 고용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법무법인 광복을 이끌 수장이 필요했다. 강우가 법무법인의 주인이라고는 하지만 수장의 역할까지 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정호한테 좋은 분이 있으면 소개를 부탁했지.’

그리고 연정호의 소개로 영입한 인물이 바로 검사장 출신의 국재훈이었다. 연정호는 국재훈을 정말 어렵게 소개해주었다고 했다. 현재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내고 운영 중인 국재훈이었다. 맡은 소송도 대부분 인권 문제나 억울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을 변호해주고 있다고 했다.

‘검사장 출신이면 어느 법무법인에서든 거액을 들여 모시고 가려고 할 텐데….’

그런 국재훈은 자신의 이익은 모두 버리고 억울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연정호는 현직검사일 때도 정의감이 넘치고 검소한 국재훈이었다고 했다. 정말 특별한 경우라고 볼 수 있었다.

‘법무법인이라고 하니까 굉장히 거부감을 보였다고 했었지.’

연정호가 처음 스카우트 제의를 했을 때 엄청 혼이 났다고 했었다. 하지만 강우가 만든 법무법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한참의 고민 후 제안을 수락했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은 강우를 직접 만나보겠다며 사단법인 광복에 찾아온 것이었다.

“제안을 수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각을 마친 강우가 국재훈을 향해 감사를 표했다. 우리나라 현실상 커다란 소송에서는 국재훈 같은 위치에 있던 전관이 꼭 필요했다. 물론, 강우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현실은 현실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

“연 검사가 하도 간곡히 부탁해서 허락하기는 했습니다만. 직접 만나보고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다시 결정하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재단에 먼저 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듣고 보니 제 선택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국재훈이 강우를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재단에서 진행하는 많은 일을 보며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사단법인 광복은 그야말로 아무런 대가 없이 많은 사람을 위해 봉사하고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곳이었다. 그리고 이제 이곳에서 힘없고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나선다고 했다. 시작은 일본 강점기 때부터 이어져 온 길고 긴 피해를 보상받는 것이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국민분도 도움을 주시고 계시고요.”

강우의 말처럼 사단법인 광복으로는 많은 국민의 후원이 쏟아지고 있었다. 강우는 그 후원을 투명하고 공정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시작은 독립유공자와 후손으로 시작해 한국전쟁 유공자들과 후손들 그리고 상이군인들과 민주화 운동 유공자들까지. 그리고 지금은 사회 취약계층을 위한 봉사도 활발히 벌이고 있었다.

“그렇군요. 하지만 모든 사람이 쉽게 가질 수 있는 마음은 아닙니다. 돈 많은 사람이 이사장님처럼만 생각한다면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될 텐데요.”

국재훈이 강우를 보며 눈을 빛냈다. 강우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누군가가 앞장서서 하다 보면 점점 따라오는 사람도 늘어날 겁니다.”

“맞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강우와 국재훈이 서로를 보며 흐뭇함을 느꼈다. 특히 국재훈은 강우와 만나 짧은 시간 만에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강우와 함께 힘든 싸움을 이어가겠다 다짐했다.

“이사장님의 지시대로 강제노역 피해자 두 분과 접촉을 끝마쳤습니다. 두 분은 우리 법무법인이 돕겠다는 말에 정말 기뻐하셨습니다.”

현재 법무법인 광복의 첫 번째 목표는 바로 강제 징용노역자들의 소송이었다. 1997년 두 명의 강제 징용자가 일본의 철강 회사를 상대로 낸 소송이 있었다. 그 소송은 2001년 1심 원고 패소 판결이 났었다. 그리고 얼마 전인 2002년 11월 일본 오사카 고등재판소의 항소 기각 판결까지 난 상황이었다.

“현재 상황은 어떤지 알 수 있을까요?”

“기존에 원고분들의 변호를 담당했던 변호사들에게 소송을 인수하고 일본 최고 재판소에 상고를 준비 중이긴 합니다만.”

국재훈이 말끝을 흐렸다. 이미 오사카 고등법원에서까지 패소한 상황이었다. 그런 국재훈의 표정에 강우가 미래 기억을 떠올렸다. 최고 재판소까지 올라간 상고는 결국 기각이 될 것이었다. 강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역시 상고가 될 거로 생각하시는군요.”

“네, 일본은 조선을 강제로 합병한 것을 부인하고 지배의 불법성도 인정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더군다나 살펴본 결과 강제노역의 피해를 보신 원고분들이 징용되었던 것은 현 소송대상인 제철 회사의 전신이었고 말입니다. 일본 법원은 두 법인을 별개의 법인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 소송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1965년 한일 양국이 맺었던 청구권협정과 일본의 재산권 조치법입니다.”

강우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미래의 기억에 의하면 강제노역 피해자분들의 긴 싸움은 이어진다. 일본에서의 패소했으니 마지막 희망으로 한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강우가 미래의 기억을 떠올리며 눈을 빛냈다.

“그렇다면 강제노역으로 인한 임금 미지급이 아닌 강제노역에 대한 위자료를 청구하는 쪽으로 접근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아….”

국재훈이 감탄을 뱉어냈다. 분명 강우는 법조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내다니 놀라울 뿐이었다.

“제가 법률 쪽 지식은 전혀 없어서 괜한 말을 한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소송을 지켜보며 이사장님의 말도 검토해보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특히 피해자분들의 상처를 잘 보듬으며 소송을 부탁드립니다.”

강우의 진심 어린 부탁에 국재훈이 감탄성을 뱉어냈다. 그리고 강우를 향해 호감이 점점 짙어짐을 느꼈다.

“법무법인에서 맡을 소송들은 제가 남은 인생을 걸고 마무리 짓겠습니다.”

국재훈이 강우를 보며 굳은 의지를 밝혔다. 강우가 국재훈을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국 변호사님만 믿겠습니다.”

말을 마친 강우가 이번에는 재단 직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현재 소송을 시작한 강제노역 피해자분들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다른 피해자분들은 소송을 걸 생각도 엄두도 못 내는 상황이고요. 그러니 우리가 먼저 나서서 도움의 손길을 드려야 합니다. 제가 확보하라던 강제노역 피해 생존자분들의 명단은 확보했나요?”

강우의 질문에 직원 중 한 명이 답했다.

“네, 이사장님. 지속적인 홍보로 계속해서 명단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다만 대부분의 피해자분께서 연로하신 탓에 선뜻 소송에 참여하기를 망설이고 계십니다.”

강우는 피해자분들의 그런 마음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던 분들이었다. 갑자기 찾아온 도움의 손길에 선뜻 손을 내밀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그래서 더욱 신경을 쓰고 다가가야만 했다.

“소송을 원하지 않는 분이더라도 도움을 드릴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드리도록 하세요. 명심하셔야 합니다. 상처가 많은 분이니 절대 실망하게 해드리지 않게 조심히 다가가야 합니다.”

강우의 말에 명단 확보를 담당하는 직원이 책임감을 느끼며 눈을 빛냈다.

“명심하겠습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는 다음 직원을 바라보았다.

“위안부 할머님들과는 연락이 된 겁니까?”

현재 한국에는 위안부 할머님들을 위한 대표적인 단체가 두 군데 있었다. 하지만 아직 그 규모가 미미한 관계로 위안부 할머니들이 받은 피해를 알리고 일본이 왜곡하고 있는 진실을 밝히는 정도만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강우는 이런 위안부 할머님들의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릴 생각이었다.

“현재 관련 단체 두 곳과 접촉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할머님들의 성향이 너무 폐쇄적이라 다른 방식으로 접근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할머님들에 대해서는 특히 더욱더 신경을 써야 합니다. 아시겠죠?”

강우는 그런 위안부 피해 할머님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아픔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었다. 강우는 그분들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아주 조심히 다가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강우는 재단 직원들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럼, 다들 계속해서 수고해 주세요. 그리고 여러분들의 노력과 열정에 항상 감사하고 있다는 것 잊지 말아 주시고요.”

회의를 마친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를 했다. 직원들도 황급히 일어나 강우와 마주 인사를 했다. 마지막으로 강우는 끝까지 자리를 지킨 국재훈 변호사를 바라보았다.

“언제 제가 식사 한번 대접하겠습니다.”

“좋지요. 술도 한잔 사주십시오.”

국재훈 변호사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강우도 흐뭇하게 웃으며 답했다.

“네, 그때는 정호도 함께 보는 거로 하시죠.”

“그러면 좋겠지만, 검사랑 변호사가 한자리에 만나는 건 별로 좋은 모양새는 아닐 겁니다.”

국재훈 변호사의 말에 강우가 작게 탄성을 뱉어냈다. 이 한마디로도 그동안 국재훈이 걸어온 길을 알음 직했다. 강우는 다시 한번 국재훈 변호사가 마음에 들었다.

“그럼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강우와 국재훈 변호사가 악수하였다. 마주 잡은 두 손에는 서로에 대한 진한 호감이 담겨있었다.

* * *

스르륵.

국가 보훈처 서울지방보훈청에 강우와 진남규 모자를 태운 차량이 도착했다. 그리 많지 않은 여러 유공자의 숫자만큼이나 보훈청은 한산했다. 강우는 곧장 주차장으로 들어가 차를 세웠다.

탁.

강우가 내리고 뒤를 이어 진남규 모자도 내렸다. 한겨울의 바람은 차가웠지만, 강우와 진남규 모자를 비추는 햇살은 따듯했다. 그 따듯한 햇살에 강우와 진남규 모자의 입가 옅은 미소가 번져나갔다.

“강우야, 한국 날씨는 정말 좋네.”

진남규 어머니가 강우를 보며 말했다. 진남규 어머니는 이제 강우를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마음속에서는 강우를 아들처럼 아끼고 있었으니 말이다. 강우가 씩 웃었다.

“한국에 오래 머물다 가셔도 좋습니다. 관광도 실컷 하시고요.”

“아휴~ 아니야. 우리 아들 밥해 먹여야지.”

진남규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저었다.

“엄마, 나 어른이야. 이제 혼자 다 할 수 있다고.”

“네가 일만 잘했지. 뭘 할 줄 안다고 그래? 빨리 결혼을 하든지 해야지.”

진남규 어머니의 날카로운 지적에 진남규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진남규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형, 빨리 장가가서 손주 안겨드려요.”

“아…. 회장님까지….”

진남규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강우가 진남규 모자를 보며 말했다.

“들어가시죠.”

강우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강우의 손에는 두툼한 서류 뭉치가 들려있었다. 모두 오늘 있을 유공자 가족 등록을 위한 서류들이었다. 강우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잔뜩 긴장한 진남규 모자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 남규 형과 어머님의 유족 인정을 시작으로 더 많은 분의 제자리를 찾아드리는 거다. 할 수 있다. 박강우.’

강우가 의지를 불태우며 보훈청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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