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4화 (334/402)
  • 그냥 나한테 맡겨.

    북경 시내의 고급 호텔에 강우와 박종엽 그리고 박희라가 나타났다. 오늘 밤 강우는 박종엽과 박희라를 위해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을 잡아두었다. 강우 가족의 중국 아파트는 좁아서 모두가 잘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이고…. 아이고….”

    강우의 부축을 받는 박종엽이 연신 곡소리를 냈다. 그런 박종엽을 보며 박희라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아빠, 그러니까 적당히 마시지.”

    “장인어른이 주시는 술을 어떻게 거절해?”

    박종엽이 횡설수설했다. 술이 어느 정도 취한 박종엽은 할아버지를 붙잡고 오열하기도 했다. 연신 장인어른을 외치는 통에 할아버지가 곤란해하실 정도였다. 그런 박종엽을 말리느라 박희라가 진땀을 빼기도 했다.

    “오빠, 봤죠? 이래서 내가 아빠한테 금주령을 내린 거라니까요.”

    술이 그리 세지 못한 박종엽은 제법 주사가 있는듯했다. 그런 이유로 박희라가 금주령을 내린 것이었다. 특히 북경대로 진학해 북경으로 올라온 이후로는 절대 금주령을 내렸다고 했다. 딸바보 박종엽은 박희라의 금주령을 충실히 지켰다고 했다.

    “그래도 오늘 고모부 때문에 다들 즐거웠지.”

    “하아….”

    강우가 술자리에서의 박종엽을 떠올리며 씩 웃었다. 박희라는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강우가 박종엽을 부축한 채 물었다.

    “많이 취하신 거 같은데 정말 혼자 괜찮겠어?”

    “괜찮아요. 아마 침대에 눕히면 바로 주무실 거예요.”

    “그래? 그럼 내가 방까지 모셔다드릴게. 가자.”

    “네, 오빠.”

    강우가 박종엽을 단숨에 둘러업었다. 그런 강우를 보며 박희라가 작게 감탄했다. 술에 취한 성인 남성을 마치 어린아이 업듯이 업어 버리는 강우였다. 외할아버지도 그랬고 박씨 가문 남자들은 전부 힘이 장사인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박희라는 강우의 신체 능력이 이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났다는 것을 몰랐다.

    “박강우 회장님!”

    강우가 로비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호텔 총지배인이 달려왔다. 처음 방문하는 호텔이었지만, 강우는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모양이다. 이미 이런 일을 여러 번 겪은 강우가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호텔 총지배인 장수입니다. 오늘 저희 호텔에 모시게 되어서 정말 영광입니다.”

    공손히 허리까지 숙이는 총지배인의 모습에 강우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언제나 이런 과한 반응은 적응이 쉽지 않았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강우가 힐끗 업고 있는 박종엽을 바라보았다. 역시 총지배인은 눈치가 빨랐다. 재빨리 앞장을 섰다.

    “체크인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바로 객실로 모시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강우가 박희라를 향해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박희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강우를 따라나섰다. 강우는 VIP 전용 엘리베이터에 탔다.

    “오늘 숙소는 스위트룸 중에서도 가장 좋은 곳으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불편함이 없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총지배인은 강우를 정말 어려워했다. 행동 하나하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 쓰이는 게 보일 정도였다. 그만큼 강우가 중국 내에서 가지는 영향력은 엄청났다.

    “오늘은 제 고모부님과 육촌 여동생이 머물 예정입니다. 숙박 기간은 제가 별도의 말이 있을 때까지 부탁드립니다.”

    “네, 회장님.”

    총지배인이 박종엽과 박희라를 번갈아 바라보며 눈에 담았다. 강우의 가족이라 하니 꼭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띵.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호텔 최상층에 도착했다. 총지배인이 빠르게 내려 앞장섰다. 방 앞에 도착한 총지배인이 카드키를 강우에게 내밀었다.

    “이 방입니다. 좋은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아…. 제가 지금 손이.”

    박종엽을 업고 있는 강우의 말에 박희라가 대신 카드키를 받았다. 박희라가 카드키를 받으며 싱긋 웃었다.

    “고맙습니다.”

    “그럼 이만.”

    총지배인이 공손히 인사를 하고는 돌아갔다. 박희라가 방문 앞에 섰다. 생전 처음 묵어보는 스위트룸에 조금 두근거림을 느꼈다.

    띠릭. 딸칵.

    카드키를 가져다 대자 방문이 열렸다. 박희라가 슬쩍 문을 밀었다. 그리고는 이내 크게 감탄성을 뱉어냈다.

    “우와….”

    고풍스럽고 널찍한 스위트룸이 박희라의 눈동자에 온전히 담겼다. 박희라가 조금씩 상기되기 시작했다.

    “오빠! 여기 너무 좋아요.”

    “그래? 일단 들어가자.”

    박희라가 날 듯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장 널찍한 스위트룸 어디론가 사라졌다. 강우는 곧장 한쪽에 있는 침실문을 열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침대가 보였고, 호텔 침구 특유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강우가 눈처럼 흰 침대 시트 위에 박종엽을 조심스럽게 눕혔다.

    “으음…. 구름 위인가….”

    잠들었던 박종엽이 잠꼬대를 하며 중얼거렸다. 강우가 픽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재밌는 주사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라고 생각했다. 강우가 박종엽의 신발을 벗기고 이불을 잘 덮어주었다. 그리고 침실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희라야.”

    박희라는 한쪽에 있는 통유리로 북경의 야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강우의 목소리가 들리자 박희라가 빙글 몸을 돌렸다. 잔뜩 상기된 박희라의 얼굴을 보며 강우가 흐뭇하게 웃었다.

    “오빠, 이런 곳은 하룻밤에 얼마나 해요?”

    “글쎄? 나도 잘 몰라. 회사에서 처리하는 거라.”

    강우가 모른 척 말을 해주지 않았다. 이곳의 하룻밤 가격을 알게 되면 박희라도 박종엽도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서였다.

    “와…. 진짜 너무 좋아요. 특히 저 야경이요.”

    박희라가 다시 창밖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강우가 박희라의 옆쪽으로 다가가 같이 야경을 바라보았다. 이곳으로 오는 차 안에서도 호텔에 묵는 것은 처음이라며 상기된 표정을 짓던 박희라였다. 박종엽과 박희라는 물론이고 박가보촌의 사람들 역시 부유한 삶을 살지는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지금 지내는 곳이 기숙사라고 했지?”

    “네….”

    박희라는 북경대의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었다. 넉넉지 못한 형편에 1인실도 아닌 4인실을 쓰고 있다고 했다.

    “일단 당분간은 여기서 묵고 집을 하나 얻어줄게.”

    “네에?!”

    박희라가 화들짝 놀라며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고모부도 함께 올라와서 지내시라고 하면 싫어하실까?”

    “오빠…. 그러지 않아도 돼요. 우리는 그냥….”

    강우가 박희라의 말을 단숨에 잘랐다. 분명 거절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강우는 둘째 할아버지의 가족들에게 많은 것을 해주리라 다짐한 상태였다. 그것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돌아가신 둘째 할아버지의 한을 조금이라도 풀어드릴 방법이라 생각했다.

    “희라야, 오빠 돈 많아. 그리고 이러려고 번 돈이야. 가족들을 위해서 쓰는 돈이니 거절하지 마.”

    “아….”

    박희라가 탄성을 뱉어냈다. 가족들을 위한다는 말에 가슴 깊은 울림을 받았다. 수십 년의 세월을 따로 지낸 강우였지만, 그 누구보다 금세 의지가 되는 것이 느껴졌다. 강우가 박희라를 보며 씩 웃었다.

    “고모부랑 너는 그냥 가만히만 있어. 내가 다 알아서 해줄 테니까.”

    “.....”

    박희라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일단 고모부는 북경에서 큰 음식점을 내어드릴 거야. 아니 기계 쪽에 관심이 많으셨다고 했으니까. 하시고 싶은 게 따로 있는지 여쭤봐야겠네. 그리고 박가보촌도 내가 바꾸어 놓을 거야. 이번에 가보니까 마을이 너무 낡고 필요한 게 많더라고.”

    “마…. 마을까지요?”

    박희라가 입을 떡하니 벌렸다. 마을 전체를 바꾸어 놓겠다는 강우의 스케일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박가보촌은 강우 가족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정처 없이 떠돌던 둘째 할아버지와 박지영을 보듬어준 고마운 곳이 아니던가.

    “둘째 할아버지랑 고모님을 받아준 고마운 곳이고 고모부랑 희라 너의 고향이기도 하니까. 그냥 그렇게 놔둘 수는 없지.”

    “오빠….”

    박희라가 눈시울을 붉혔다. 자신이 가족을 찾은 것은 둘째 할아버지를 위해서였다. 그런 노력이 운명처럼 강우에게로 인도했다. 그리고 이렇게 만난 가족은 자신과 박종엽의 인생에 거대한 변화를 몰고 오고 있었다.

    “이런 경험이 처음은 아니니까. 그냥 나한테 맡겨.”

    강우는 이미 광주에 있는 고향 마을을 그야말로 환골탈태시킨 경험이 있었다. 그 경험을 살려 시골 마을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국가는 달라도 사람 사는 것은 비슷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박희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강우가 가진 재력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박희라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내가 오빠 돈 많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

    박희라가 싱긋 웃었다.

    “알겠어요. 가족이니까…. 더 거절하지는 않을게요. 대신 평생 감사하며 살게요.”

    “그래, 그거면 돼. 그리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만 하고.”

    박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다시 야경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강우가 방을 나섰다.

    “그럼 잘 자고. 뭐든지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프런트에 말하고.”

    “네, 오빠. 조심히 가세요.”

    강우가 손을 흔들어 주었다. 박희라도 싱긋 웃으며 손을 마주 흔들었다.

    탈칵.

    강우가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고는 호텔을 벗어났다. 쌀쌀한 북경 날씨였지만, 가슴 한편이 유난히 따듯한 하루였다.

    “하…. 이게 꿈일까?”

    혼자 남은 박희라가 꿈을 꾸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내 환한 표정을 지으며 새로운 환경에서의 첫날밤을 만끽했다.

    * * *

    다음 날.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박종엽은 곧장 박가보촌으로 떠났다. 할아버지는 둘째 할아버지의 묘를 방문하는 것을 하루도 기다릴 수 없다고 했다. 강우도 같이 가고는 싶었지만, 밀린 일이 너무 많아 함께하지 못했다.

    똑똑.

    회장실 문을 노크하고 곽 비서가 들어왔다. 곽 비서는 회장실 부속 비서실에서 가장 직급이 높은 인물이었다.

    “회장님, 지시하신 박가보촌 보수작업 담당자가 출발했다고 합니다.”

    “수고했어요.”

    강우는 오늘 출발한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박종엽의 일행에 보수 담당자를 함께 보냈다. 마을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마을 보수를 위한 준비 단계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건 각부에서 올라온 사업 진행 현황 보고서입니다. 보시기 편한 순서대로 깔끔히 정리했습니다.”

    강우가 곽 비서를 힐끗 바라보았다. 진남규가 뽑은 인물이었는데 비서로만 일하기에는 아까운 인재였다. 그런 이유로 진남규도 몇 번이고 타 부서 이동을 권했지만, 회장실의 비서직 유지를 원했다고 했다.

    “수고 많았어요. 확인하고 필요한 게 있으면 호출할게요.”

    “네, 회장님. 그리고 보고서를 확인하시면서 드실 다과를 준비할까요?”

    곽 비서는 강우가 자주 허기를 느낀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이왕이면 맛있는 거로 많이 부탁해요.”

    “네, 회장님.”

    곽 비서가 회장실을 나갔다. 강우가 사업 진행 보고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사라락. 사라락.

    강우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져나갔다. 중국에서 준비하고 있는 사업들 모두가 순풍에 돛을 단 듯 척척 준비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중국 정벌은 시간 문제겠군.’

    강우가 씩 웃었다. 강우가 중국에서 영향력을 키워갈수록 미래 기억과는 다른 중국이 되어 갈 것이 분명했다.

    ‘이 정도면 나라에서 상이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살짝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생각에 강우가 픽 웃었다. 이윽고 곽 비서가 준비한 풍성한 다과가 준비되었다. 둘째 할아버지의 일을 해결한 강우는 정말 홀가분한 마음으로 업무에 집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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