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2화 (332/402)
  • 그래, 어서들 오거라.

    북경 공항에 강우와 위혁오가 나타났다. 잘 차려입은 강우와 위혁오의 옆쪽에는 역시나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박종엽이 있었다.

    “흠흠…. 이거 영 어색하구만….”

    살아생전 이런 양복을 입은 적이 드문 박종엽이었다. 연신 옷매무새를 만지작거리며 어색해했다. 그런 박종엽을 보며 강우가 씩 웃었다.

    “잘 어울리시는데요.”

    “그래, 고맙다.”

    박종엽이 머쓱하게 웃었다. 강우와 함께 북경행을 결정지은 박종엽은 먼저 선양으로 갔다. 그곳에서 보연래를 만나고 있는 위혁오와 합류했다. 강우는 선양시에 도착하자 박종엽을 데리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야말로 환골탈태를 시켰다.

    “차가 대기 중입니다. 가시죠.”

    위혁오가 박종엽에게 깍듯이 대하며 말했다. 강우의 고모부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네, 그러시죠.”

    “편하게 대해주십시오. 강우의 고모부님이시면 제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박종엽이 위혁오를 보며 살짝 멍한 표정을 지었다. 중앙 정계에서도 잘나가는 위진오의 오른팔이라 알려진 위혁오였다.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자신의 삶에서 이런 고위급 인물을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 없었다.

    “아…. 그럼 편하게 대해도….”

    “네, 괜찮습니다. 가시죠.”

    강우가 두 사람을 보며 씩 웃었다. 세 사람은 공항 밖으로 나왔다. 대기하고 있던 고급 세단을 타고 북경 시내로 향하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광복 그룹 본사였다.

    “이번 일정에 정말 좋은 일이 많았어.”

    위혁오가 강우를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일단 위혁오는 보연래를 만나 위진오의 편지를 전해 주었다. 위혁오의 편지를 받은 보연래는 크게 기뻐하며 위진오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했다.

    “보연래가 양부님에게 힘을 실었으니 태자당의 세력은 온전히 양부님의 것이 된 거죠.”

    “그래, 그나마 남아있던 원로 후계의 지지를 받아냈으니 말이야.”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태자당에는 미래의 거물 습건형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아직 습건형은 크게 두각을 나타낼 시기는 아니었다. 이제 위진오의 기세를 꺾을 사람은 없다고 봐야 했다.

    “......”

    박종엽은 강우와 위혁오의 대화를 들으며 멍한 표정이었다. 일개 촌부로 살던 박종엽에게 권력의 세계에 관한 이야기는 낯설기만 했다. 그리고 자신을 믿고 거리낌 없이 대화하는 강우와 위혁오를 보며 묘한 기분도 느꼈다.

    “숙부님께서 아주 흡족해하셨다. 이게 모두 강우, 네 덕분이 아니겠어?”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전부 양부님의 능력이시죠.”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그리고는 박종엽을 바라보았다. 멍한 표정의 박종엽을 향해 강우가 말했다.

    “고모부, 마침 본사에 희라가 와있다고 하더라고요.”

    딸 이야기가 나오자 박종엽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희라가 나를 보고 많이 놀라는 게 아닐지 모르겠어.”

    “얼마 만에 만나시는 거예요?”

    박종엽이 상기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글쎄다…. 북경대로 진학하고 나서는 통 오지도 않아서….”

    정말이지 오랜만에 만나는 딸이었다. 그리고 예전과는 다른 상황이었다. 박희라가 강우와 친척이라는 것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가족이 아니던가.

    “오늘 축하 파티도 열어요. 아버지도 고모부 만나보고 싶다고 하세요.”

    강우는 아버지에게도 이 소식을 전한 상태였다. 강우에게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간신히 누른 아버지는 강우에게 정말 장하다고 몇 번이나 칭찬해주었다.

    “하…. 희라가 정말 많이 놀라겠어. 이렇게 가족이 순식간에 늘어났으니 말이야.”

    “이런 놀라움이라면 희라도 분명 좋아하지 않을까요?”

    강우의 말에 박종엽이 환하게 웃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확실히 좋아할 거야. 아주 많이.”

    “저도 기분이 좋네요. 빨리 희라 만나고 싶네요.”

    강우가 박희라를 떠올리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운명처럼 만난 친척 여동생이었다. 이윽고 차량은 광복 그룹 본사 건물에 다다랐다. 박종엽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본사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오오…. 여기구나.”

    박종엽이 크게 감탄을 했다. 사실 북경의 빌딩 숲만으로도 머리가 빙글빙글 돌던 차였다.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외관을 자랑하는 광복 그룹 본사였다. 박종엽은 중국에서 손꼽히는 신흥 재벌그룹다운 건물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아직도 그런 대단한 회사의 주인인 강우가 자신의 조카라는 것이 신기하고 어안이 벙벙했다. 이윽고 차량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고급 세단을 집어삼킨 주차장 입구가 정적에 휩싸였다.

    * * *

    커다란 연습실에 박희라가 있었다. 손에 들린 대본을 보며 연기연습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 박희라을 바라보는 두 명의 사람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이 한국어로 크게 소리쳤다.

    “희라야! 발성! 호흡부터 다시.”

    나머지 한 명이 중국어로 박희라에게 통역해주었다. 박가보촌의 새로운 세대들은 대부분 한국어를 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네, 선생님!”

    박희라가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배운 대로 복식호흡을 했다. 그리고 대본에 적힌 대사를 발성법을 이용해 뱉어냈다. 그런 박희라를 바라보는 한 명의 사람은 바로 대진 엔터에서 중국으로 날아온 연기 선생이었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연기 선생이었는데 대진 엔터에서 공을 들여 영입한 경우였다. 그런 연기 선생이 박희라를 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확실히 재능은 있어.’

    사실 맨 처음 박희라를 만났을 때는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오디션도 보기 전에 상부의 지시로 연기 테스트를 해보라고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박희라를 보자 일단 조금 사라졌다. 지금껏 봐온 한국 탤런트 중에서도 박희라만큼 출중한 외모를 가진 경우는 드물었다.

    ‘연기 실력도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고.’

    역시 소문에 듣던 대로 강우가 가진 연예인 발굴 능력이 사실인가 싶었다. 물론, 아직은 더 두고 봐야 할 일이지만 말이다. 박희라는 계속해서 연기연습에 매진했다. 온몸이 땀에 젖을 정도였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희…. 희라야!”

    커다란 연습실에 울려 퍼진 목소리에 박희라가 화들짝 놀랐다. 연습실에 있는 거대한 유리로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박희라의 눈에서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아빠!!”

    너무나도 오랜만에 보는 아빠의 모습이었다. 박희라가 몸을 빙글 돌려 박종엽에게 뛰어갔다. 그리고는 날 듯이 박종엽에게 안겼다. 장성한 딸이 안기자 박종엽이 살짝 휘청거렸다. 하지만 이내 박희라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잘 지냈어? 어디 보자. 우리 딸 더 이뻐졌네?”

    “아빠,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아빠가 여기까지 왔어?”

    박희라가 박종엽을 보며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 말했다. 박종엽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게 말이야….”

    박종엽의 고개가 연습실 입구 쪽으로 향했다. 박희라가 박종엽의 시선을 따라 연습실 입구를 바라보았다.

    “회장님?”

    연습실 입구에 강우가 있었다. 전보다 부드럽고 친근한 표정의 강우를 보니 박희라는 편안한 감정을 느꼈다.

    “연습하는 거 재밌나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왜 아빠랑 회장님이 같이….”

    박희라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박종엽이 강우를 바라보며 눈빛을 보냈다. 자신의 입으로 말을 해도 되겠냐는 뜻이었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박종엽이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희라야 놀라지 말고 들어. 강우가….”

    박종엽이 강우의 이름을 편하게 말하자 박희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이어지는 박종엽의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강우가 바로 네 외할아버지의 친척이라고 하는구나. 그러니까 강우의 할아버지가 외할아버지의 쌍둥이 동생이라는구나.”

    “네???”

    박희라가 입을 벌린 채 멍한 표정을 지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사실에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박종엽이 품에서 두 장의 사진을 꺼냈다.

    “이거 보아라. 여기가 네 외할아버지고 이쪽이 강우의 할아버지 즉 쌍둥이 동생분이시다.”

    “......”

    박희라가 사진을 번갈아 보며 확인했다. 그리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진 속 두 명의 남성은 똑같이 닮아있었다. 박희라가 강우를 바라보았다.

    “설마…. 회장님은 이걸 전부 알고…. 그래서 제게 그렇게 친절하게 대해주신 건가요?”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는 섭섭함이 조금 담긴 표정이었다.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저도 확신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으니까요.”

    “맞아요. 이건 기적이에요.”

    박희라도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박희라를 보며 씩 웃었다.

    “그보다 나를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오빠라고 해주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아….”

    박희라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갑자기 나타난 오빠라는 존재는 어색했다. 특히 박희라에게는 진짜 가족이라 불릴만한 사람들은 없었다. 물론, 박가보촌이 집성촌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오…. 오빠.”

    박희라가 강우를 나지막이 불렀다. 강우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강우에게도 여동생이라는 존재는 처음이었다. 물론 고종 육촌이라고는 해도 가족은 가족이었다. 강우가 슬쩍 옆을 바라보았다. 한국에서 온 연기 선생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 연기연습은 이 정도에서 끝내도 좋을까요?”

    “네, 회장님.”

    연기 선생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가 박종엽과 박희라를 향해 말했다.

    “희라야, 가서 준비하고 나와. 오늘 우리 집으로 가서 저녁 먹자.”

    “아…. 네.”

    박희라가 연기 선생님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오늘 수업 감사합니다.”

    “고생했어요.”

    박희라가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으러 떠났다. 강우가 연기 선생을 향해 물었다.

    “희라는 어떻습니까?”

    “연기에 대한 열정도 있고 무엇보다 재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역시 회장님의 안목이 대단하다는 게 사실이었습니다.”

    강우가 씩 웃었다. 사실 미래 기억으로 스타들을 수집하듯 대진 엔터로 끌어모으기는 했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달랐다. 미래 기억 속에서 박희라라는 중화권 스타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이번에는 오로지 강우가 그동안 키워온 감이 말해준 대로 행한 것이었다.

    “다행이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네, 회장님.”

    연기 선생이 알겠다고 하며 열의를 불태웠다. 조금 전 통역사에게 강우와 박희라의 대화를 전해 들은 탓이었다. 박희라가 강우의 친척이었다니 정말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문득 한국에서 촬영 중이라던 강우 가족사를 모티브로 한 드라마를 떠올렸다.

    ‘역시 드라마로 만들 만큼 범상치 않은 가족사이긴 하지.’

    강우는 박종엽과 함께 회장실로 올라갔다. 박희라가 준비하고 나올 동안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박종엽은 회장실로 오는 내내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말로만 듣던 재벌 회장의 모습을 보며 얼떨떨했다.

    “앉으세요. 차 한잔 내오라고 했어요.”

    “그래, 고맙다.”

    박종엽이 자리에 앉으며 회장실을 둘러보았다. 강우가 박종엽의 맞은편에 앉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경치가 좋죠?”

    “그래, 건물이 높아서 그런지 내려다보는 맛이 있구나.”

    이윽고 비서가 차를 내왔다. 강우와 박종엽이 차를 몇 모금 마셨을까.

    “저 왔어요!”

    머리에 물기도 말리지 않은 박희라가 회장실에 나타났다. 급하게 뛰어온 모양이었다. 강우가 그 모습을 보며 픽 웃었다. 성격 급한 건 외탁을 한 듯했다.

    “그럼, 출발하죠.”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는 중국 집으로 향했다.

    스르륵.

    고급 세단이 광복 그룹 본사를 빠져나갔다. 차 안에는 강우와 박종엽 그리고 박희라가 있었다. 박종엽과 박희라에게서는 옅은 긴장감이 느껴졌다. 이윽고 고급 세단이 강우 가족의 중국 아파트에 도착했다.

    “들어가시죠.”

    강우가 앞장서고 박종엽과 박희라가 뒤를 따랐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강우가 집 문 앞으로 걸어갔다.

    딩동.

    벨을 누르자 기다렸다는 듯 벌컥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나타난 얼굴에 강우의 뒤쪽에 있던 박종엽 그리고 박희라가 화들짝 놀랐다.

    “장…. 장인어른?”

    “할아버지?”

    열린 문으로 강우의 할아버지가 긴장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익숙해 박종엽과 박희라의 눈시울이 대번에 붉어졌다.

    “그래, 어서들 오거라.”

    박종엽과 박희라가 왈칵 눈물을 쏟았다. 쌍둥이 동생인 할아버지는 목소리마저 형님과 너무 닮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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