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9화 (329/402)
  • 계십니까?

    랴오닝성 번시시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 한 대의 차량이 나타났다. 비포장도로를 지나는 차량은 울컥울컥 대며 달렸다. 차가 지나간 뒤쪽으로는 자욱한 흙먼지가 여운을 남기듯 어지럽게 흩날렸다.

    끼이익-

    이윽고 차량이 한 마을의 입구 앞에 멈춰 섰다. 한쪽으로는 강물이 흐르고 반대쪽으로는 추수를 끝낸 밭이 부끄러운 듯 민낯을 드러내고 있었다.

    덜컥.

    차량 문이 열리고 두꺼운 점퍼를 입고 캐쥬얼한 복장을 한 강우가 내렸다. 강우가 차량의 운전석을 바라보며 유창한 중국어로 입을 열었다.

    “돌아가서 대기하고 계세요.”

    “네? 하지만….”

    운전기사 겸 수행원이 당황하며 강우를 바라보았다. 지금 돌아가서 대기하라니 이곳은 해가 지면 이동할 수단이 전혀 없는 곳이었다. 자신을 강우에게 딸려 보낸 상사는 분명 그림자처럼 강우를 모시라 했었다.

    “괜찮습니다. 금세 끝날 용무가 아니라서요. 선양으로 돌아가서 대기하고 계세요.”

    “그럼 마을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수행원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강우가 누구던가 자신을 보낸 상사 보연래가 버선발로 마중을 나올 정도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사실 혼자 길을 나선다고 할 때 경호원까지 잔뜩 붙이겠다고 난리였던 보연래가 아니던가.

    “음….”

    강우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 강우의 성격상 누군가를 기다리게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런 강우의 표정을 읽은 수행원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그럼 시내로 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혼자 돌아갔다가는 성장님에게 크게 혼이 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시내에서 대기해주세요.”

    강우의 말에 수행원이 살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시내를 향해 차를 몰고 사라져갔다. 차가 떠나가자 강우가 다시 마을 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긴 숨을 내뱉었다.

    “똑같네.”

    한적한 시골길의 한쪽에 아치형의 입구가 있었다. 그 옆쪽으로는 붉은색 간판에 흰 글씨로 ‘박가보촌’이라 적혀있었다. 분명 기억 속에서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세월이 제법 지났지만, 한적한 시골 마을은 아직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었다. 강우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들어가 볼까.”

    강우가 조심스럽게 마을로 발걸음을 옮겼다. 입구를 지나 조금 걸어가자 마을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졌다. 이윽고 강우가 마을로 들어서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대번에 쏠렸다. 마을 사람들과 달리 멀끔하고 피부도 하얀 강우는 누가 봐도 외지인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에 강우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마을 사람들은 담담한 표정을 짓거나 인사를 받아주거나 했다.

    ‘음…. 기억에서 본 것처럼 작은 마을이군….’

    강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박가보촌은 현재 수백 명의 박 씨들이 함께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다. 그러니 새로 나타난 강우가 외지인임을 한눈에 알 수밖에 없었다.

    “관광객이신가요?”

    강우를 향해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강우가 슬쩍 고개를 돌리니 작은 아이 한 명이 강우를 보며 싱긋 웃고 있었다. 강우가 시선을 내려 아이를 바라보았다. 추운 겨울 두꺼운 솜옷을 입고 얼굴에는 콧물 자국마저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그게 뭐예요. 관광객이면 관광객이고 아니면 아닌 거지.”

    여자아이가 강우를 보며 킥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이내 말을 이어갔다.

    “도시에서 왔어요? 우리 마을에는 무슨 일로 온 거예요?”

    아이다운 순수한 호기심에 강우가 씩 웃었다. 강우와 여자아이의 대화에 주변의 시선은 더욱 집중된 상태였다. 강우가 따끔거리는 볼을 손으로 쓱 쓰다듬었다.

    “그…. 박희라 씨의 아버지….”

    강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자아이가 화들짝 놀랐다.

    “희라 언니요?!!!”

    여자아이의 말과 동시에 강우를 바라보던 시선이 대번에 바뀌었다. 몇몇 사람들이 강우를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는 폭풍 같은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희라의 친구였어? 희라는 잘 지내나요?”

    “희라는 같이 안 온 겁니까?”

    갑자기 호의적으로 돌변한 사람들을 보며 강우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지금의 상황을 이해했다. 박가보촌은 번시 박씨들의 집성촌이었으니 대부분이 안면이 있는 것이었다. 분명 말을 걸어온 사람 중에는 박희라의 친척도 있을 것이었다.

    “그…. 희라 씨는 잘 지내고 계십니다.”

    강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어느새 사람들은 더 모여들었다. 그리고는 자기들끼리 강우에 대해 이야기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희라의 친구라는데?”

    “남자친구? 오~ 잘생겼는데?”

    “우리 희라도 엄청 예쁘지.”

    점점 왜곡되는 박희라와의 관계에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여자아이가 킥하고 웃으며 강우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다들 마을에서만 지내서 이야깃거리가 없어서 그래요. 희라 언니 친구분이면 종엽 삼촌 만나러 온 거 맞죠?”

    “어? 어어….”

    여자아이는 참 눈치가 빠르고 영민해 보였다.

    “따라오세요. 제가 가게로 안내해 드릴게요.”

    “그래, 고맙다.”

    여자아이가 앞장서고 강우가 뒤를 따라갔다. 가게로 향하는 길을 걸으며 강우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기억에서 보았던 길이 강우의 눈앞에 펼쳐졌다. 강우는 묵묵히 여자아이의 뒤를 따라갔다. 이윽고 강우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와 동시에 여자아이가 빙글 돌아 강우를 바라보았다.

    “여기가 종엽 삼촌이 운영하는 음식점이에요.”

    강우가 가게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작고 낡은 음식점은 오랜 세월을 간직한 채 있었다.

    “고마워. 내가 뭐라도 좀 주고 싶은데.”

    강우가 품에 손을 넣었다가 망설였다. 어린 여자아이기에 보답으로 뭐가 좋을까 싶었다. 품에 있는 지갑에는 돈이 두둑이 들어있기는 했다. 하지만 여자아이의 밝은 표정은 돈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 부탁이 있어요.”

    “부탁?”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여자아이가 싱긋 웃었다.

    “종엽 삼촌 만나고 나서 저한테 도시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도시에 대해서?”

    여자아이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네, 전 마을에서 낳고 자라서 도시는 가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어떤 곳인지 참 궁금해요. 그런데 도시로 나간 사람들은 마을로 돌아오지를 않아요.”

    “아…. 그랬구나. 알겠어. 그런데 내가 너를 어떻게 찾으면 될까?”

    강우의 질문에 여자아이가 답했다.

    “제 이름은 박희수예요. 희라 언니랑은 먼 사촌지간이고요. 우리 집은 저쪽이에요.”

    여자아이 박희수가 마을의 한쪽을 가리켰다. 하지만 이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박가보촌은 온통 비슷한 건물들로 가득했다. 지붕 색마저 통일되어 있어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그냥 마을 사람들한테 희수네 집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알려줄 거예요. 그럼 있다가 봐요!”

    박희수가 손을 흔들며 후다닥 달려갔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강우가 음식점 입구 앞에 섰다. 손을 들어 문을 열려던 강우가 멈칫했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드르륵.

    강우가 문을 열었다. 아직 점심시간이 한참이나 남은 이른 아침 가게 안은 고요했다. 가게에서는 옅은 고독의 냄새가 느껴졌다.

    “계십니까?”

    강우의 말에도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강우가 가게를 쓱 둘러보았다. 기억 속에서 보았던 그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기억 속 낡은 식탁과 의자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강우가 둘째 할아버지와 박지영이 앉았던 자리로 다가갔다. 그리고 식탁을 쓰다듬었다.

    ‘윽….’

    순간, 강우의 머리가 지끈거리며 또 하나의 기억이 밀려들었다. 그 기억은 둘째 할아버지와 박지영이 박가보촌에 막 정착했을 때의 기억이었다. 그 기억 속에서 둘째 할아버지와 박지영은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박지영은 음식점에서 열심히 일했다. 둘째 할아버지는 박가보촌에서 조금 떨어진 시내의 시장에서 짐을 나르는 일을 했다.

    -아빠! 드디어 우리 집이 생겼어요!-

    두 사람은 열심히 일해 박가보촌에 작은 집도 구했다. 물론, 도시로 떠난 주인 가족의 집에 대가를 지불하고 머무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환하게 웃는 박지영의 얼굴을 보며 강우도 행복했다. 둘째 할아버지는 회한에 찬 눈빛으로 집을 바라보았다.

    -그래 집이구나.-

    -앞으로 오래오래 건강하게 행복하게 지내요.-

    박지영이 둘째 할아버지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둘째 할아버지도 부드럽게 웃으며 박지영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아직 장사 전입니다.”

    그런 강우의 기억을 누군가의 목소리가 흐트러트렸다. 강우가 정신을 차리고는 앞을 바라보았다. 주방 쪽에서 박종엽이 나와 있었다. 기억에서 본 것보다 훨씬 나이가 든 박종엽은 아버지인 박명구를 많이 닮아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저…….”

    강우가 말을 머뭇거렸다. 박희라에게 말을 하고 오지 않은 탓에 함부로 지인이라 말해도 되나 싶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면 박종엽과 대화를 나눌 방법이 없었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저는 박강우라고 합니다. 박희라 씨의 직장 동료…. 입니다.”

    직장 동료라는 표현이 지금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한 강우였다. 하지만 박종엽의 반응은 달랐다.

    “박강우? 설마 광복 그룹 박강우 회장이십니까?”

    박종엽이 화들짝 놀라며 강우를 알아보았다. 강우도 흠칫하며 박종엽을 바라보았다. 설마 이런 시골 마을까지 자신의 이름이 알려져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아…. 네. 맞습니다.”

    “희라가 회장님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습니다. 희라를 도와준다고 하셨다고 말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박종엽이 강우를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강우도 깜짝 놀라며 같이 인사를 했다.

    “아닙니다. 제가 아직은 도움이 된 것이 없습니다.”

    “사실 딸아이를 도시로 보내고 걱정이 많았습니다. 워낙 똑똑한 아이라 알아서 하겠거니 싶어도 딸 가진 부모 마음이 그렇지 않겠습니까?”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험한 세상에 박희라처럼 예쁜 딸을 도시에 혼자 보내놓았으니 얼마나 걱정이 되었겠는가. 더군다나 박희라는 외할아버지의 가족을 찾는다며 동분서주했으니 더 걱정스러울 만했다.

    “네, 걱정이 많으셨겠습니다.”

    “그래도 인제 걱정 없습니다. 회장님과 같이 좋은 분께서 우리 희라를 도와주신다고 했으니 아무 걱정 없습니다.”

    박종엽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를 직접 보니 더 든든하고 참 올바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초면이었지만 박종엽이 쌓아온 세월의 무게가 그렇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박종엽이 순간 화들짝 놀랐다.

    “그…. 그런데 이런 시골 마을에는 어쩐 일로….”

    생각해보니 강우가 지금 이곳에 나타난 상황에 닭살이 돋았다. 중국에서 손가락 안에 든다는 대기업의 총수가 바로 강우였다.

    “아…. 선양시에 사업차 볼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희라 씨의 고향이 근처라는 생각에 잠시 들렀습니다.”

    강우의 말에 박종엽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자신의 딸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심장이 쿵쾅거리고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아! 그러셨군요. 그럼 제가 밥이라도 대접을….”

    박종엽이 허둥대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기억 속 젊었던 박종엽이나 지금의 중년의 박종엽이나 변함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에 마음이 편해지는 강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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