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6화 (326/402)
  • 제가 오지랖이 좀 넓습니다.

    강우의 머리가 지끈 아파져 오며 영상이 바람처럼 흩어져 버렸다. 순식간에 땀에 젖어버린 강우를 보며 박희라가 화들짝 놀랐다.

    “회장님, 괜찮으세요?”

    강우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그리고는 박희라를 안심시켰다.

    “아…. 네. 괜찮습니다. 제가 가끔 이럴 때가 있습니다.”

    “네….”

    박희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강우가 슬쩍 미소를 지어준 후 일기장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오늘 딸아이가 결혼한다. 사연 많은 아이를 따듯한 마음으로 보듬어줄 사돈과 사위에게 고마울 뿐이다…….-

    일기장은 목지영의 결혼식이 있는 날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딸아이가 임신했다. 딸아이의 건강이 좋지 못해 걱정이다. 두 사람이 계속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사라락. 사라락.

    강우는 작은 수첩에 적힌 일기를 묵묵히 읽어내려갔다. 수첩에는 둘째 할아버지의 심경이 담긴 필체들이 담겨있었다. 일기장에는 매일매일의 이야기가 담겨있지는 않았다. 어떨 때는 한 달 만에 쓰기도 하셨고, 계절이 바뀌어 쓴 적도 있었다. 하지만 둘째 할아버지의 일생 중 일부분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건강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 하루하루 내 몸이 병들어가고 있다. 그날 입은 상처 때문인 것 같아. 아직 딸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게 남았는데….-

    강우의 표정에 안타까움이 떠올랐다. 나빠진 건강만큼이나 둘째 할아버지의 필체도 힘이 빠져있었다. 이윽고 일기장의 마지막 부분에 다다랐다.

    -그리운 내 금수강산이 가고 싶다. 하지만 내가 지은 죄로 인해 고통받은 많은 사람이 있다. 나는 죄인이다. 평생 속죄해야 했지만, 비겁하게 숨어 살았다. 보고 싶은 내 형제여…. 나는 이제 여기서 한 줌 모래가 되어 흩어진다. 미안하다. 너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긴 나를 용서해다오. 이제 눈을 감으면 나를 기다리는 부모님과 형님 그리고 누이들을 만나러 갈 수 있겠구나…….-

    마지막 일기를 끝으로 더 이상의 이야기는 없었다. 사라락 넘어가는 수첩에는 공백만이 모습을 드러낼 뿐이었다. 덩달아 강우의 가슴도 공허해졌다. 마지막 일기에서 느껴진 둘째 할아버지의 그리움이 강우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하아….”

    강우가 긴 숨을 뱉어냈다. 이제는 돌아가셔서 볼 수 없는 둘째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강우를 보며 박희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강우에게서 전해지는 진한 슬픔이 박희라에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강우가 박희라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일기의 마지막에 남기신 이야기를 유언이라 생각하시는군요.”

    “네, 맞아요. 둘째, 할아버지는 항상 만나지 못할 가족들을 그리워하셨어요. 하지만 그 사연에 대해서는 절대 말해주지도 않으셨어요.”

    강우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한국 전쟁으로 분단된 한국과 북한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로 갈라졌다. 둘째 할아버지는 북한군에 협력한 과거 탓에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더군다나 세월이 흐를수록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죄책감에도 시달렸다.

    ‘한국에 있는 할아버지에게 연락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리워만 하셨구나….’

    강우가 박희라를 바라보았다.

    “희라 씨, 우리 가족도 비슷한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할아버지의 가족을 찾는 일은 제가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아….”

    박희라가 탄성을 뱉어냈다. 여태껏 그 누구도 이렇게 돕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정치외교학과를 선택한 이유도 공산주의 국가에서 자유롭게 외국을 다니며 운신할 수 있는 폭이 넓었기 때문이었다. 박희라의 친할아버지인 박명구는 박재립과 목지영이 조선말을 썼다는 것을 알려주었었다. 그것을 토대로 박희라는 박재립이 중국인이 아님을 유추했다.

    “일단 희라 씨가 연예인이 되려는 것이 정말 하고 싶어서입니까. 아니면 단지 유명해지기 위해서입니까?”

    “네?”

    강우의 질문에 박희라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한국에 왔다는 이야기를 쌍둥이 남매를 통해 알게 되었다. 다른 친구들이 강우를 만나게 해달라고 조를 때 문득 박희라는 생각했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강우를 만나면 무언가 방법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막연한 생각이었지만, 박희라의 생각을 맞았다. 지금 눈앞의 강우는 자신을 돕겠다고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리고 박희라가 가진 꿈에 관해서 묻고 있었다. 박희라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

    유명해지겠다는 일념으로 공부를 열심히 했었다. 결국, 명문 중의 명문 북경대를 들어갔다. 그곳에서 많은 인맥을 만났다. 잘나가는 공산당 고위 간부의 자식도 있었고, 시장이 개방된 이후로 급부상한 부자들의 자식도 있었다. 그 속에서 공부 하나로 올라온 박희라는 초라함을 느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꿋꿋이 버텨야 했다. 하지만 지금 강우는 박희라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희라 씨가 유명해지지 않아도 저는 충분히 외할아버지의 가족을 찾아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희라 씨가 정말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원한다면 유명해지게 만들어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유명해지기 위해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는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아…….”

    강우의 말에 박희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렇게 따듯한 말을 들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북경대에 진학한 이후 고향에 있는 아버지조차 만나기 힘들지 않았던가. 대도시에 와 혼자 생활하기는 참 힘들고 외로웠었다.

    “지금 답을 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천천히 생각해보세요. 오늘만 기회가 아니니까요. 저는 언제나 희라 씨를 도울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왜 저를 이렇게까지 도와주시는 거죠? 왜 이렇게 따듯하게 대해주시는 거죠?”

    박희라가 강우를 보며 물었다. 분명 이성적인 감정은 아닐 것이었다. 담담한 강우의 눈빛이 말해주고 있었다. 더군다나 강우에게는 이나은이라는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도 알고있었다. 이나은이 한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끄는 연예인이라는 것도 알고있었다. 분명 이성적인 감정은 아닐 것이라 확신했다.

    “음….”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확실히 박희라로서는 너무 친절하다고 생각할만했다. 오해할 만도 했고 말이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우리 가족도 가족을 잃은 적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 간신히 만날 수 있었고요. 가족을 그리워하는 그 심정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강이와 단향이의 친구시잖아요. 제가 오지랖이 좀 넓습니다.”

    “.....”

    박희라가 강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엄청난 재산을 가진 재벌 총수에 중국에서도 화제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왜인지 친한 오빠를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박희라는 정말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감사해요. 정말 신중하게 그리고 깊이 생각해볼게요.”

    “네, 그러도록 하세요. 아…. 일단 오늘 간단하게 체험을 한번 해보실래요?”

    “체험이요?”

    박희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강우가 씩 웃더니 인터폰을 들었다. 밖에 있는 비서와 곧장 연결됐다.

    “엔터 사업부 캐스팅 담당자를 지금 회장실로 올라오라고 해주세요.”

    -네, 회장님. 바로 호출하겠습니다.-

    비서진의 최고 책임자인 곽 비서가 깍듯이 알겠다고 했다. 강우가 박희라를 보며 말했다.

    “일단 오늘 엔터 사업부에 내려가서 카메라 테스트도 받아보세요. 그리고 관계자들도 만나보시고요. 연예인이 하고 싶은 건지 아닌지는 직접 경험해 보면 알 수 있지 않겠어요?”

    박희라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그저 평범한 대학생일 뿐이었다. 이런 과분한 대접이 맞는 건가 싶었다. 어질어질한 정신을 붙잡으며 박희라가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그런 과분한 대우는 받을 수 없어요. 저도 바닥부터 천천히 하나씩 배우고 싶어요. 오디션을 봐서 정정당당하게 붙고 싶어요.”

    박희라의 말에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아까 희라 씨도 말했죠? 제가 예비 스타 보는 눈이 있어서요. 제가 보기에 희라 씨는 연예인으로 성공할 충분할 능력이 보입니다. 제 말 듣고 일단 경험해 보세요. 인생이 걸린 중요한 문제니까요.”

    “네…. 감사합니다.”

    박희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를 했다. 그와 동시에 회장실 문을 노크하고 곽 비서가 나타났다. 곽 비서의 옆에는 엔터 사업부 담당 부장이 있었다.

    “회…. 회장님! 부르셨습니까?”

    강우를 보고는 잔뜩 얼어버린 부장이었다. 그룹 총수를 이렇게 만나니 그럴 만도 했다. 강우가 엔터 사업부 캐스팅 담당 부장에게 말했다.

    “여기 있는 분을 모시고 가서 카메라 테스트부터 시작해서 오디션과 똑같은 일정으로 진행해주세요.”

    “네, 회장님.”

    캐스팅 담당 부장이 눈을 빛내며 박희라를 바라보았다. 회장실에서 회장과 독대하고 있는 박희라가 분명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 생각했다.

    “모시겠습니다. 같이 가시죠.”

    캐스팅 부장의 깍듯한 태도에 박희라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캐스팅 부장을 따라나섰다. 다시 한번 강우를 향해 고마움을 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회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세요.”

    강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박희라를 배웅했다. 이윽고 박희라와 캐스팅 부장이 회장실을 나갔다. 혼자남은 강우가 슬쩍 창밖을 바라보았다. 높은 빌딩 숲 사이로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강우가 문득 쓸쓸함을 느꼈다. 일기장에서 보았던 둘째 할아버지의 감정을 공유한 탓이었다.

    ‘재식이는 뭐 하고 있으려나….’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장실을 나서자 비서들이 벌떡 일어났다. 강우가 비서들을 향해 말했다.

    “차량 대기 시켜줘요.”

    비서들이 크게 대답하고는 곧장 대기하고 있는 기사에게 연락을 넣었다. 잠시 후, 강우를 태운 고급세단이 광복 그룹 건물을 벗어났다. 강우가 힐끗 벽면을 바라보았다. 강우의 전신이 박힌 현수막이 노을을 받아 펄럭이고 있었다.

    ‘하아…. 저거 때라고 하는 거 깜빡했네.’

    강우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 * *

    북경 시내의 중식 레스토랑에 남재식과 기술팀 직원들이 모여 있었다. 남재식과 기술팀 직원들은 간단한 관광을 마치고 저녁을 먹으러 온 것이었다. 커다란 독실을 빌린 탓에 왁자지껄한 분위기였다.

    “자자! 오늘이 지나면 또 일거리가 엄청나게 쌓였습니다. 오늘 먹고 죽읍시다!”

    남재식이 술잔을 들며 호탕하게 소리쳤다. 한 잔만 먹어도 시체가 된 듯하던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진 남재식이었다. 남재식의 선창에 기술팀 직원들이 크게 호응했다.

    “네! 사장님!”

    “오늘 끝까지 가는 겁니다!”

    남재식이 벌컥 단숨에 술을 마셨다. 기술팀 직원들이 질세라 술을 벌컥 마셨다. 한쪽에서는 진남규가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 술을 즐기는 진남규는 남재식과 기술팀 직원들이 화끈해서 좋다고 생각했다.

    “형님, 한잔하시죠.”

    남재식이 진남규를 향해 잔을 내밀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두 사람은 금세 친해졌다. 강우라는 공통점이 있었기에 어색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한잔하자.”

    남재식과 진남규가 술잔을 나누기 시작했다. 정말 작정을 한 듯 뜨거운 술자리가 이어졌다. 두 사람은 강우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형님, 강우 그놈이요…….”

    주로 진남규가 강우에 대한 궁금증을 물었고, 남재식은 자세히 이야기해주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인 남재식은 강우에 대한 많은 것을 알고있었다.

    “진짜? 와…. 회장님 진짜 대단하시네.”

    “괴물이에요 괴물. 강우 그놈을 일반적인 인간의 범주에서 생각하면 안 된다니까요?”

    그렇게 강우에 관한 이야기가 오고 갈 때였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강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쪽 손으로 귀를 만지며 강우가 씩 웃었다.

    “아니 귀가 왜 이렇게 간지러운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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