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5화 (325/402)

제가 이걸 읽을 자격이 있을까요?

“제가 찾는 사람은 돌아가신 제 어머니의 가족들이에요.”

박희라의 말에 강우의 표정이 상기되기 시작했다. 역시 목지영에 대한 자신의 추측이 맞다 싶었다. 강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머니의 가족이라면 외가일 텐데 소식이 끊긴 겁니까?”

“소식이 끊긴 게 아니라 저는 제 외가 쪽 가족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해요.”

박희라의 말에 강우는 더욱 확신하게 됐다. 분명 목지영은 강우가 기억에서 보았던 박지영이 맞았다. 바로 강우의 고모님이 되는 것이었다. 강우가 슬쩍 물었다.

“어머님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 겁니까?”

박희라의 표정이 슬퍼졌다. 강우가 깜짝 놀라 말했다.

“힘든 이야기이실 텐데 함부로 물어봐서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회장님에게는 다 말해야 할 거 같은 기분이 들어요.”

박희라가 희미하게 웃었다. 이상하리만큼 강우와의 대화는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때마침 비서가 차를 내왔다. 강우가 박희라에게 차를 권했다.

“차 좀 드세요. 몸이 따듯해질 겁니다.”

“네, 감사해요.”

박희라가 양손으로 찻잔을 감싸 쥐었다. 손끝을 타고 올라오는 따끈한 온기에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잠깐의 정적이 이어졌다. 박희라는 연신 강우를 힐끗거렸다. 선이 굵고 남자답게 잘생긴 강우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성적인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 아련한 기분이 들고 의지하고 싶은 기분만이 들 뿐이었다.

“.....”

강우는 박희라가 입을 열기를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생각을 한참이나 정리한 박희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 엄마는…. 우리 엄마의 가족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뿐이라고 했어요.”

외할아버지를 떠올린 박희라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어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강우가 이름을 묻자 박희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름을요?”

“혹시 가족분들을 찾는 것에 제가 도움이 될까 해서 그럽니다.”

박희라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강우가 도와주겠다고 하니 부담스러움이 느껴진 것이다.

“아니에요. 그런 부담까지 드릴 수는 없어요. 이렇게 저를 신경 써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괜찮습니다. 그 정도는 충분히 도와드릴 수 있어요. 대신 앞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스타가 돼 주시면 되죠.”

박희라가 싱긋 웃었다. 스타가 되어달라는 강우의 말이 왜인지 현실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강우의 말에는 그런 힘이 담겨있었다. 박희라가 숨을 가다듬고는 자신의 가족사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제 고향은 박가보촌이라는 곳이에요. 박가보촌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오래전 중국에 정착한 조선인들의 후손들이에요. 마을 대부분이 박 씨로 이루어진 집성촌이고요.”

“그렇군요. 저도 들어본 것 같습니다.”

이미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강우는 짐짓 모른척해 주었다. 박희라의 입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네, 저는 거기서 나고 자랐어요. 제 친할아버지는 박가보촌에서 작은 음식점을 운영하셨어요. 성함은 박명구세요. 아버지의 이름은 박종엽이세요.”

강우가 역시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틀릴 일도 없었겠지만, 위혁오가 전해준 자료는 정확했다.

“제 외할아버지의 성함은 박재립이세요. 어머니의 성함은 목지영이고요.”

“네에?!”

강우가 화들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박희라가 움찔하며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실례를 했군요.”

“아니에요. 대부분 같은 반응이에요. 사실 우리 엄마는 외할아버지가 입양한 양녀에요.”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박재립이라는 이름은 둘째 할아버지가 맞았다. 위혁오가 전해준 서류에서 목지영이라는 이름을 봤을 때도 둘째 할아버지의 딸이라 생각했다. 북한에서 탈출하고 추격을 따돌리고 숨어 살기 위해 성을 바꿨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박희라의 말에 따르면 둘째 할아버지는 여전히 박 씨를 썼었다.

‘그렇다는 것은 목지영이 내 고모님이 아니라는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박희라도 엄격히 따져서 강우의 핏줄은 아니었다. 하지만 강우는 이상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눈앞의 박희라는 기억 속 보았던 고모 박지영을 너무 닮아있었다. 강우가 생각을 정리했다. 위혁오가 랴오닝성에 간다면 이 부분을 자세히 조사해달라 할 생각이었다. 그전에 궁금한 것 중 가능한 것은 박희라에게 물어보고 말이다.

“그럼 외할아버지께서 어머님을 입양하셨으니 그 정보를 알고 있었지 않겠습니까?”

“제 외할아버지는 제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어요. 몸이 편치 않으셨거든요….”

박희라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강우도 안타까움에 탄식했다. 둘째 할아버지도 오랜 피난 생활로 건강이 제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셨군요…. 그럼 희라 씨의 어머님도….”

“제 어머니는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박희라의 얼굴이 더욱더 슬퍼졌다. 가족을 잃은 아픔이야 어찌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강우가 그런 박희라를 보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희라 씨의 아픈 기억을 들춰낸 셈이 돼버렸군요.”

“아니에요. 사실은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이제는 제법 씩씩해졌어요.”

박희라가 싱긋 웃었다. 강우가 그런 박희라를 보며 생각했다.

‘그래,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고 어찌 됐든 둘째 할아버지의 후손인 건 맞아. 천천히 알아보면 되겠지.’

강우가 생각을 정리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어머니의 가족을 찾는 것이라면 입양한 외할아버지의 가족이 아니라 어머님의 가족을 찾는다는 말씀이시군요?”

이번에도 박희라의 대답은 의외였다.

“아니요. 엄마는 자신은 고아이고 버려졌으니 가족이 없다고 하셨어요. 제가 찾고 싶은 건 외할아버지의 가족이에요.”

“왜죠?”

강우가 물었다. 이상하리만큼 궁금증이 많은 강우에 박희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인제 와서 감출 것도 없었다. 박희라가 품에서 작은 수첩을 하나 꺼냈다. 겉표지가 낡고 낡은 수첩이었다. 박희라가 강우에게 수첩을 내밀었다.

“여기요.”

“이건….”

“외할아버지의 일기장이에요.”

강우가 수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강우의 직감이 이 수첩을 잡는 순간 또 다른 실마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 말해주고 있었다. 강우가 박희라를 바라보았다.

“제가 이걸 읽을 자격이 있을까요?”

어딘지 모르게 진지한 강우의 말에 박희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를 도와주신다고 하셨고, 이건 그냥 일기장일 뿐이니까요.”

“그럼…. 잠시.”

강우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낡은 수첩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강우의 손끝에 수첩이 닿는 순간이었다. 강우의 머리가 깨질 듯 아파져 왔다.

‘윽….’

* * *

따듯한 봄 햇살이 쏟아지는 창가를 바라보며 박지영이 식탁 의자에 앉아있었다. 박지영의 얼굴로 쏟아지는 햇빛 덕분일까. 박지영의 얼굴에는 전과 달리 건강해 보이는 혈색이 돌았다.

“아차….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얼굴로 쏟아지는 따스한 햇볕에 잠시 하던 일을 잊은 박지영이었다. 박지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제 곧 점심시간이었고, 식당으로는 손님들이 몰려올 것이었다.

“지영아, 천천히 해라.”

때마침 주방 쪽에서 박명구가 나왔다. 박명구의 옆쪽으로는 박지영과 비슷한 또래의 젊은 남성이 있었다.

“그래, 천천히 해 지영아.”

“종엽 오빠, 이제 곧 점심시간이에요. 깨끗이 정리해야 손님들도 기분 좋게 식사하시고 가죠.”

박지영의 말에 박종엽이 슬쩍 얼굴을 붉혔다.

“아…. 알겠어. 그럼 나는 주방에 가서 음식 준비를….”

박종엽이 황급히 주방으로 들어가려다 한쪽에 걸린 냄비에 머리를 ‘쿵’하고 부딪혔다.

“억….”

박종엽이 머리를 감싸 쥐더니 박지영을 힐끗 바라보았다. 박지영은 그 모습이 웃겨 입을 가린 채 웃고 있었다. 박종엽이 ‘망했다.’라는 표정을 지으며 주방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박종엽을 바라보던 박명구가 혀를 찼다.

“쯧쯧…. 저 똑똑한 놈이 왜 네 앞에만 서면 저리 바보처럼 구는지 모르겠어.”

“오빠가 착해서 그러죠.”

박지영이 싱긋 웃었다. 박명구의 아들 박종엽은 박가보촌을 떠나 대련에 있는 대련 이공대를 다녔었다. 지금은 졸업하고 박가보촌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졸업하고 고향을 들러 다시 도시로 나가려 했지만, 이상하게 떠나지 않고 머무는 것이었다.

‘그게 다 지영이 때문인 게지.’

박명구는 아직도 박지영을 처음 만나던 날 박종엽의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먼저 사랑을 겪어본 박명구였기에 박종엽이 사랑에 빠진 것을 알았다. 박명구가 박지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외모에 심성도 착하고 어찌나 예의가 바른지 몰랐다.

‘에잉…. 숫기 없는 놈 같으니라고.’

하지만 아들 박종엽은 박지영 앞에만 서면 작아지고 또 작아졌다. 박명구가 박지영을 바라보며 인자하게 웃었다.

“저놈이 저렇게 실없어 보여도 공부도 잘하고 능력은 있는 놈이야.”

“네? 아…. 그럼요. 마을 아가씨 중에서도 종엽 오라버니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요.”

박지영의 말에 박명구가 속으로 아쉬움을 느꼈다. 박종엽이 저리 티를 내어도 박지영은 이상하리만큼 박종엽에게 곁을 주지 않았다. 아니 지난겨울 처음 만난 이후로부터 쭉 그런 느낌을 받았다. 가게에서 일하며 살뜰하게 자신을 대해주었지만, 전부를 보여주지는 않는 그런 느낌이었다. 박명구는 그게 박재립과 박지영 부녀가 가진 사연 탓이라 생각했다.

“그래, 내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인물도 훤하지.”

“네. 사장님, 인제 손님들 오겠어요.”

박지영이 짧게 대답했다. 박명구가 짧게 혀를 차고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박지영의 말처럼 곧 손님이 밀려올 것이었다. 박지영이 음식점에서 일하고 난 후로 가게에 손님도 몰리고 있었다. 정말 복덩이 그 자체였다.

“지영아, 몸도 좋지 않은데 쉬엄쉬엄하거라.”

“네, 사장님.”

박지영이 싱긋 웃으며 일을 시작했다. 기분이 좋은 작게 콧노래도 부르면서였다. 중국어가 아닌 한글로 부르는 노래였다. 박명구는 그 노래의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참 듣기 좋은 노래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가게에 평온함이 흐르던 때였다.

드르륵.

음식점 문이 열렸다. 안쪽에서 식당을 정리하던 박지영이 밝게 웃으며 입구를 바라보았다.

“어서 오세요.”

유창한 중국어로 인사를 한 박지영의 시야에 세 명의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세 명의 남성을 확인하는 순간 박지영이 본능적으로 흠칫하며 놀랐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

“자리에 앉으세요.”

박지영이 자리를 권했다. 세 명의 남성이 식당을 둘러보더니 자리에 앉았다. 박지영이 음식 종류가 적힌 메뉴판을 가져다주었다. 박명구가 하는 음식점은 작았기 때문에 파는 음식 종류가 다양하지는 않았다.

“음식 종류가 많지는 않아요. 하지만 맛은 정말 있어요. 주문 도와드릴까요?”

박지영의 질문에 세 명의 남성중 한 명이 박지영을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눈빛을 한 남성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마치 뱀이 떠오르는 흠칫한 미소였다. 그리고 박지영에게 익숙한 언어로 입을 열었다.

“박재립 동무는 어디 있습니까?”

박지영의 몸이 뱀 앞의 개구리처럼 그대로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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