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옆에서 안 떨어지면 되겠지.
회장실에 강우와 위혁오가 마주 앉아있었다. 진남규는 업무를 보러 돌아간 상태였다. 강우의 설명을 들은 진남규가 멋쩍음에 얼굴을 붉히기도 했었다. 위혁오가 그런 진남규를 떠올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남규가 가끔 보면 참 엉뚱한 면이 있어.”
강우가 위혁오를 보며 씩 웃었다. 엉뚱한 면이 있는 진남규였지만, 날카로운 직관력을 가진 것은 사실이었다. 강우가 품에서 왕건린에게 전해 받은 편지를 꺼냈다. 그리고 위혁오를 향해 내밀었다.
“뭐…. 남규 형이 아주 틀린 건 아니죠.”
위혁오가 편지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뭐야?”
“오늘 만난 왕건린 회장이 전해준 편지에요.”
“왕건린 회장이? 너한테?”
강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양부님한테 전해달라더군요.”
“숙부님에게?”
위혁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대번에 편지를 집어 품에 넣었다. 역시나 내용은 확인하지 않은 채였다. 강우가 말을 보탰다.
“보연래가 양부님에게 선을 대려는 거 같아요.”
“음….”
위혁오가 짧게 침음성을 흘렸다. 위진오의 최측근인 만큼 권력 구도가 어찌 돌아가는지 자세히 알고있었다. 보연래가 위진오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대번에 눈치챘다.
“양부님에게 잘 전해주세요.”
“그래, 알겠다. 그나저나 네가 괜한 일에 휘말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위혁오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에요. 양부님 일인데요.”
“그래, 고맙다. 그나저나 박희라라는 여자는 도대체 왜 그렇게 조사를 하는 거야?”
위혁오가 궁금증을 드러냈다.
“그게…. 아무래도 제 둘째 할아버지의 후손인 거 같아서요.”
“뭐? 둘째 할아버지?”
강우가 둘째 할아버지와 관련된 사연들을 말해주었다. 한국전쟁 때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였다. 위혁오는 강우의 이야기를 들으며 깊은 탄식을 뱉어냈다. 강우 가족의 사연이 참 기구하고 슬프다고 생각했다.
“그랬구나…. 전쟁은 언제나 깊은 상처를 남기는 법이지.”
“그래서 뒷조사를 부탁했던 거예요.”
“그럼 박희라라는 아가씨가 네가 생각한 대로 둘째 할아버지의 외손녀인 거 같아?”
“제 직감은 그렇게 말해주고 있어요. 그런데 확실하지는 않네요.”
위혁오가 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박가보촌이 랴오닝성에 있으니 내가 한번 가서 알아볼까?”
“형님이요?”
위혁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분명 조만간 랴오닝성에 갈 일이 생길 테니까 말이야.”
“아….”
위진오에게 편지를 보낸 보연래는 현재 랴오닝성의 성장이었다. 위진오가 답장한다면 분명 가장 신임하는 위혁오를 보낼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위혁오가 박가보촌에 들리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만약 랴오닝성에 가신다면 부탁 좀 드릴게요.”
“그래, 알겠어.”
위혁오가 박가보촌 마을에 들러 목지영에 대한 사연을 알아봐 준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었다.
“고마워요.”
“혹시 못 가게 될 수도 있으니까.”
위혁오가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우가 힐끗 시계를 보니 어느새 퇴근 시간이었다.
“바쁘세요? 오신 김에 저녁 같이 먹어요.”
“그래, 좋지.”
강우와 위혁오가 같이 본사 건물을 벗어났다. 건물을 벗어난 두 사람은 여느 형, 동생과 다름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저녁 식사를 위해 이동했다. 노을이 지는 빌딩 사이사이로 걷는 두 사람의 모습은 정말 평온해 보였다.
* * *
북경 공항에 강우가 나와 있었다. 한쪽에 앉아있는 강우의 옆쪽에는 따듯한 커피가 놓여 있었다. 두 손으로는 여유롭게 신문을 보는 강우를 많은 사람이 힐끔거렸다. 주변의 웅성거림에도 강우는 여유로웠다. 이미 이런 관심은 한국에서부터 익숙하고, 단련 되어있었다.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 한없이 불편해진다는 것도 알았다.
후루룩.
강우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힐끗 공항 전광판을 확인했다. 작년부터 새롭게 국제선의 기능을 이어받은 인천국제공항에서 북경 공항으로 오는 항공편이 공항에 도착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제 착륙했으니까 아직 여유가 좀 있겠네.’
오늘 강우는 남재식과 기술팀을 마중 나온 상태였다. 사실 기업 회장인 강우가 직접 마중을 나오는 것은 이례적이었다. 하지만 다름 아닌 친구가 오는 길이었다. 강우가 남재식을 떠올리며 픽하고 웃었다.
‘첫 해외여행이라고 얼마나 호들갑을 떨던지.’
강우 보고 꼭 마중을 나와달라며 난리도 아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보내기에는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워낙 덤벙대고 허당인 남재식이 아니던가. 그리고 이렇게 공항에 누군가를 마중 나오는 것은 늘 설레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물론, 대상이 시커먼 남자 녀석이라도 말이다.
후루룩. 후루룩.
이윽고 강우가 조금은 식어버린 커피를 단숨에 마셔버렸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신문을 접은 강우가 옆구리에 신문을 끼고는 남재식과 기술팀이 나올 게이트 쪽으로 향했다. 얼마간의 기다림이 끝나고 게이트가 열렸다. 사람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며 공항이 일순 소란스러워졌다. 강우의 시야에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나오는 일단의 무리가 포착됐다.
“재식아!”
강우가 큰소리로 남재식을 불렀다. 들려오는 낯선 언어에 주변에 있던 중국인들이 강우를 힐끔 바라보았다. 강우의 목소리를 들은 남재식이 환한 표정을 지었다. 이국땅에서 들려오는 모국어만큼 반가운 일이 있을까.
“강우야!”
남재식이 강우를 향해 헐레벌떡 뛰어왔다. 뛰어오는 길에 옆으로 메고 있던 가방이 툭 하고 떨어졌다. 강우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야야! 가방!”
“어? 어어!”
남재식이 떨어진 가방을 주우려 몸을 숙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잠바에서 후두둑 지갑과 여권이 떨어졌다. 뒤를 따라오던 JG 소프트 기술팀 직원들이 슬쩍 고개를 돌리며 남재식을 외면했다.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주변 몇몇 사람들도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남재식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아…. 이 허당이 국제적으로 한국인 망신 주고 있네.”
강우가 남재식에게 다가가 땅에 떨어진 것을 같이 주웠다. 남재식이 슬쩍 얼굴을 붉혔다.
“미…. 미안.”
“너 그렇게 넋 놓고 다니다가 중국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된다?”
강우의 장난 섞인 협박에 남재식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시장을 개방했다고는 했지만, 사람들의 인식에 중국은 여전한 공산주의 국가였다. 또 사실이기도 했고 말이다.
“야…. 겁주지 마.”
“겁주는 거 아닌데? 너 밖에 나가서 어리바리하면 공안이 와서 잡아가.”
남재식이 흠칫하더니 강우의 옆에 바짝 붙었다.
“그럼 네 옆에서 안 떨어지면 되겠지.”
“아…. 남자 놈이 달라붙고 그래.”
강우가 질색하며 남재식을 밀어냈다. 그 모습을 보며 JG 소프트의 직원들이 웃음을 애써 참았다. 두 사람은 공동사업자이기 전에 정말 친한 친구가 맞구나 싶었다.
“다들 스케줄이 빡빡해서 고생들 했어요.”
강우가 직원들을 보며 말했다. 한국에서 튀니지 2 오픈을 끝내고 바로 넘어온 남재식과 기술팀이었다. 그만큼 이번 중국 시장 개척에 강우가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강우의 위로에 직원들이 괜찮다며 일제히 말했다. 몸은 조금 고됐지만, JG 소프트는 그만큼의 대우를 해주고 있었다.
“일단 밖으로 가자 차량 대기 중이야.”
“어어.”
강우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남재식이 캐리어를 드르륵 끌며 뒤를 빠르게 따랐다. 강우가 남재식을 향해 물었다.
“한국은 어때?”
“뭐…. 똑같지.”
“아니, 튀니지 2 서비스 오픈한 거 반응 어떠냐고.”
“당연히 대박이지.”
남재식의 말대로였다. JG 소프트가 새로 서비스를 시작한 튀니지 2는 오픈과 동시에 기록적인 성적을 내고 있었다. 한국 온라인 게임 역사상의 모든 기록을 갈아치우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유저들은 역대급 게임이라는 극찬을 쏟아내고 있었고, 유력 게임 잡지들도 극찬을 이어가고 있었다.
“고생했다.”
강우가 남재식을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튀니지 2의 성공적인 런칭으로 이제 JG 소프트는 세계적인 게임 개발사로 거듭날 초석을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세계화의 첫 타겟이 바로 중국 시장이었다.
“그래도 뿌듯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고, 이렇게 성과를 낼 수 있어서.”
남재식은 정말 기쁜 얼굴이었다.
“그래, 이번 중국 시장 공략도 잘해서 꼭 성공하자고.”
“강우, 너만 믿는다.”
이윽고 두 사람이 공항 밖으로 나왔다. 두 사람과 JG 소프트의 기술팀은 대기하고 있던 승합차에 나누어 타고 이동을 시작했다. 첫 목적지는 출장 기간 동안 남재식과 직원들이 머물 호텔이었다. 호텔로 이동하는 내내 남재식은 창밖을 보며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후딱 일 끝내고 관광할 시간도 있겠지?”
“글쎄?”
강우가 어깨를 으쓱하자 남재식의 실망한 표정이 되었다. 이윽고 승합차가 호텔에 도착했다. 강우와 남재식 그리고 직원들은 곧장 체크인하러 로비로 들어갔다. 강우가 남재식과 직원들을 위해 준비한 숙소는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이었다.
“대…. 대박.”
“이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기술팀 직원들이 때아닌 호사에 활짝 웃으며 좋아했다. 체크인을 끝낸 강우가 씩 웃었다.
“다들 고생했으니까 숙소라도 제일 좋은 곳으로 준비했습니다.”
직원들이 역시 강우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남재식도 강우를 보며 잔뜩 신난 표정을 지었다.
“강우야, 고맙다.”
“응? 너는 왜?”
강우의 말에 남재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숙소 좋은 곳으로 잡아줘서 고맙다는 말이지.”
“어차피 회삿돈인데?”
“어? 어어?”
남재식이 무슨 소리냐는 듯했다. 강우가 남재식의 어깨를 툭툭 쳤다.
“출장 왔으니까 당연히 회사경비처리지.”
“하하….”
JG 소프트의 예산이라는 말을 이제야 이해한 남재식이 실소를 흘렸다. 강우가 픽 웃었다.
“농담이다. 농담. 정색하기는.”
남재식이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같이 온 직원들의 숫자가 만만치 않았다. 물론 2인 1실을 쓰기로 했지만 말이다. 강우가 직원들을 보며 말했다.
“그럼 올라가서 짐 풀고 쉬고들 계세요. 전 남 사장이랑 같이 회사에 갔다가 저녁에 오겠습니다. 오늘은 첫날이니까 근사한 저녁 기대하세요.”
“감사합니다!”
직원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강우가 남재식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일단 회사부터 가자.”
“어.”
남재식이 직원들에게 짐을 맡겼다. 강우와 남재식이 밖으로 나와 승합차에 다시 탔다. 차량은 곧장 광복 그룹 본사 건물을 향해 달렸다. 이윽고 승합차가 광복 그룹 본사에 도착했다.
“와…. 대박.”
남재식 역시 광복 그룹의 본사 건물을 보며 탄성을 뱉어냈다. 그리고는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그 이유를 아는 강우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아….”
남재식이 강우를 보며 건수를 잡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야~ 우리 박강우가 이제 중국에서도 슈퍼스타였구나?”
남재식이 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는 연신 광복그룹 본사 건물의 외벽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강우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적당히 해라.”
“왜? 이런 진풍경을 나 혼자 볼 수는 없지.”
남재식이 다시 건물 외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멋들어진 미소를 짓고 있는 강우의 모습이 담긴 현수막이 펄럭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