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할 일은 없는 겁니까?
방 안에 깊은 정적이 흘렀다. 강우는 편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왕건린이 전해준 편지는 바로 태자당 소속의 보연래가 보낸 것이었다. 그 편지에는 위진오를 향한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보안을 위해 옛 방식이지만 편지로 보낸 것이었다.
‘편지의 내용도 직설적인 메시지보다는 에둘러 표현한 문장이 많다.’
하지만 당사자라면 이 편지가 품고 있는 뜻을 알 수 있었다. 현재 보연래는 랴오닝성 성장의 직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몇 년 후면 상무부 부장에 오른다. 그 후로도 한동안은 승승장구해 충칭시 당서기에 임명되고 습건형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한다.
‘보연래가 그런 성장을 할 수 있는 것에는 태자당과 현 주석인 강택민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지. 하지만 양부님의 등장으로 미래는 바뀌었다.’
태자당과 강택민 역시 위진오를 전폭적으로 밀어주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 되니 보연래가 위진오에게 선을 대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상황이라고 볼 수 있었다.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라는 건가….’
하지만 강우는 살짝 걱정됐다. 보연래가 가진 정치적 성향은 보수적이기로 유명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강우는 편지를 위진오에게 전할 생각이었다.
‘선택은 양부님께서 하는 거니까. 그리고 난 양부님의 선택을 믿는다.’
깊은 생각에 잠긴 강우를 보며 왕건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위원장님께 꼭 이야기를 잘 전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보 성장께서는 평소에도 위 위원장님을 크게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 회장님에게도 큰 관심이 있습니다.”
강우가 왕건린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역시 위진오가 가장 총애하는 강우에 대한 소문은 잘 알려진 모양이다.
“네, 편지는 전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왕건린이 강우를 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강우에게 이런 편지를 전해주는 것이 큰 부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회장님께 본의 아닌 부담을 드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방법이 아니었으면 어찌 전달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된 뜻을 전하는 방법도 역시 박 회장님을 통해 이야기가 들어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해합니다. 너무 염려치 마시죠.”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제야 왕건린이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왕건린이 생각하기에도 현재 가장 밀접한 관계해야 할 사람이 바로 위진오와 강우라고 생각했다. 이제 곧 강택민이 물러나고 호금도가 집권을 한다고는 하지만, 호금도와 보연래는 가까워질 수 없는 관계였으니까 말이다.
“그럼 차를 마저 하실까요?”
왕건린이 차를 권했다. 강우가 찻잔을 들어 차를 음미했다. 두 사람은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었다. 이윽고 차를 모두 마신 두 사람이 호텔 로비로 나왔다. 왕건린이 강우를 보며 말했다.
“앞으로 두 기업 간에 좋은 협력관계를 이어가기를 바랍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사이 로비의 한쪽에서 왕사헌이 달려왔다.
“형님!”
강우를 기다리고 있는 왕사헌의 모습에 왕건린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평소 누군가를 기다리는 법이 없는 왕사헌이였다. 제법 긴 시간 동안 로비에서 강우를 기다리고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어?”
“네, 형님. 가시는 거 보려고요.”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강용이와는 다른 느낌이었지만, 아직 순수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정에 많이 굶주려 있는 것이 보였다. 어쩌면 미래에 왕사헌이 보여주었던 기행들도 애정 결핍에 의한 행동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 고마워. 며칠 내로 연락할 테니까 둘이 꼭 밥 한번 먹자.”
“네! 형님!”
왕사헌이 잔뜩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왕건린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우리 아들이 박 회장님을 정말 좋아하는군요.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저도 한국에 사헌이 또래의 남동생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친근하고 좋습니다.”
“아…. 그렇군요. 형제가 있다니 부럽습니다.”
중국은 산아제한 정책으로 한 명의 자식만을 허용했다. 그런 이유로 왕사헌 역시 외동이었다. 생각해보면 중국 재벌들의 2세들은 전부 외동으로 자랐다. 중국인들은 하나뿐인 자식을 애지중지 키웠다. 오죽하면 소황제라는 이야기가 있겠는가.
‘특히 미래에 중국 재벌들의 2세 푸얼다이들은 많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지.’
강우가 왕사헌을 다시 바라보았다. 자신을 향한 호의적인 눈빛에 강우가 씩 웃었다. 그리고 수많은 푸얼다이 중 한 명쯤은 제대로 된 사람으로 만들어봐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사헌이를 동생처럼 챙겨보겠습니다.”
강우의 말에 왕건린이 화들짝 놀랐다. 강우가 누구던가 가진 능력은 젊은 사업가 중 천재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강우가 자기 아들을 챙긴다고 하니 너무 좋아서 놀라자빠질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평소 통제가 안 되던 왕사헌이였다. 그런데 오늘 처음 만난 강우의 말이라면 죽는시늉까지 할 기세였다.
“박 회장님, 정말 고맙습니다.”
“아…. 네.”
왕건린이 강우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왕사헌은 뭐가 그리 좋은지 그냥 싱글벙글하였다.
“그럼 또 뵙죠.”
마지막 인사를 하고 강우가 호텔 밖으로 나왔다. 대기하고 있던 고급 세단이 다가와 강우 앞에 섰다. 강우가 고급 세단에 올라탔다. 강우를 태운 고급 세단이 떠날 때까지 왕사헌은 계속 손을 흔들어주었다.
* * *
광복 그룹 본사 회장실에 강우와 진남규가 마주 앉아있었다. 왕건린과 헤어지고 본사로 돌아온 강우가 곧장 진남규를 호출한 것이다. 두 사람은 관다 그룹과의 업무 협력 범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강우는 중국 내에 세울 멀티플렉스 건설을 관다 그룹에 일정 부분 맡길 의사를 밝혔다.
“회장님,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렇게 한다면 중국 곳곳에 동시다발적으로 멀티플렉스 건설이 가능합니다.”
진남규도 강우의 생각에 동의하며 좋다고 했다. 강우가 씩 웃었다.
“만약 관다 그룹에서 멀티플렉스 건설에 필요한 자료들을 원하면 대가를 받고 알려주시고요.”
“정말 그래도 되는 겁니까?”
진남규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대진 그룹이 한국에서 지은 멀티플렉스들은 다른 기업보다 훨씬 미래 구조와 디자인으로 주목을 받고 있었다. 강우가 미래 기억을 토대로 구조를 설명해주면 전문가들이 구현해 낸 것이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알려질 것들이니까요. 그 전에 이익을 볼 수 있으면 최대한 봐야죠. 그리고 어차피 어떻게 짓느냐도 중요하지만, 핵심은 그 안에 들어갈 콘텐츠니까요.”
“네, 회장님.”
진남규가 강우의 자신감에 감탄하며 답했다. 강우는 사업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언제나 막힘이 없었다. 자신감은 넘쳤고, 그 자신감은 언제나 성공으로 이어지고는 했다.
“그 외에도 다른 사업 건수가 있으면 잘 이야기해 보세요.”
“네, 회장님.”
강우와 진남규는 계속해서 회의를 이어갔다. 광복에 산적한 일거리가 많았으니 한동안 두 사람은 계속 붙어있어야 할 정도였다.
똑똑.
한참이 지났을 때 누군가가 회장실 문을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비서가 모습을 나타냈다. 강우에게 꾸벅 인사를 한 비서가 입을 열었다.
“위혁오 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강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위혁오에게 부탁했지만, 이렇게 직접 찾아와줄 줄 몰랐다.
“빨리 모시세요.”
“네, 회장님.”
비서가 나가고 곧 위혁오가 들어왔다. 진남규가 벌떡 일어났다.
“혁오 형님, 오셨습니까.”
“진 부사장, 오랜만이네.”
두 사람 역시 형, 동생을 할 정도로 친해진 상태였다. 강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님, 오셨어요.”
“그래, 잠깐 앉을까.”
“네.”
위혁오가 자리에 앉았다. 강우와 진남규도 자리에 앉았다. 위혁오가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강우의 표정이 순간 진지해졌다. 위혁오가 진남규를 슬쩍 바라보았다. 진남규가 있는 곳에서 이야기해도 되겠냐는 뜻이었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규 형도 우리 식구니까 상관없어요.”
“그래, 우리 식구 맞지.”
진남규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있었던 강우와 왕건린의 독대는 분명 정치적 이유가 있을 거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바로 위혁오까지 찾아왔으니 더욱더 그런 생각할 만했다. 진남규가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자신도 중국 권력투쟁에 발을 들이나 싶었다.
“오늘 들은 일은 절대 아무 곳에서도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진남규의 사뭇 진지한 선언이었다. 강우와 위혁오가 진남규를 보며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강우가 서류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에는 강우가 부탁한 자료들이 들어있었다.
“이걸 하루 만에 알아내신 거예요?”
강우가 서류들을 뒤적이며 물었다. 한 사람에 대한 정보를 이리 빨리 알아내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중국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특히 위혁오라면 더욱더 가능한 일이었다.
“어렵지는 않았다. 한번 확인해봐.”
“형, 고마워요.”
강우의 진심이 담긴 고마움에 위혁오가 멋쩍게 웃었다. 강우가 서류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위혁오가 조사해온 서류에는 정말이지 박희라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있었다. 이 정도까지 조사할 수 있는가 싶을 정도였다.
‘이름은 알고 있는 것처럼 박희라 나이는 20살 고향은 랴오닝성 박가보촌…….’
강우가 박가보촌이라는 지명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역시 박희라는 박가보촌 출신이었고, 둘째 할아버지와 연결의 끈이 있는 게 분명했다. 강우가 짧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음 장을 확인했다. 다음 장에는 박희라의 가족 관계가 나와 있었다.
‘으음….’
강우가 침음성을 흘렸다. 서류 어디에도 둘째 할아버지의 딸 박지영의 이름은 없었다. 강우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분명 박희라와 악수를 하는 순간 둘째 할아버지의 기억이 떠올랐었다. 강우가 다시 서류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박희라의 할아버지는 분명 박명구가 맞아. 그리고 박명구라는 분이 박가보촌에서 작은 음식점을 운영했던 것도 맞다.’
그리고 박희라는 박명구의 아들의 딸이었다. 즉 박명구의 친손녀였다. 강우가 다시 박희라의 가족 관계도를 확인했다.
‘박명구라는 분의 아들은 박종엽 그리고 아내의 이름은 목지영.’
강우가 서류를 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름은 같았지만, 성은 달랐다. 강우가 턱을 쓰다듬었다.
‘성은 다르지만 이름은 같다. 분명 연관이 있겠지.’
강우가 나머지 서류를 확인했다. 현재 박명구는 세상을 떠난 상태였고, 박희라의 친모인 목지영도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오직 박희라의 아버지인 박종엽만이 생존해 고향에서 음식점을 이어받은 상태였다. 박희라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공부에 매진해 북경대에 진학까지 한 수재 중의 수재였다. 강우가 모든 서류를 확인하고는 서류 봉투에 넣었다.
“어때? 더 필요한 정보는 없어?”
위혁오가 강우를 보며 물었다. 강우가 위혁오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볼게요.”
“그래? 혹시 나중에 또 필요한 정보가 있으면 말해.”
“네, 형.”
강우와 위혁오의 대화가 끝나자 진남규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할 일은 없는 겁니까? 위 위원장님을 위해 무엇이라도 하겠습니다.”
순간, 강우와 위혁오가 무슨 소리냐는 듯 진남규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