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한 자세히요.
덜컥.
현관문이 열리고 강우가 아파트로 돌아왔다. 아버지와 마사토는 아직 위진오의 집에서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 깊은 적막이 흐르는 집으로 들어온 강우가 소파에 몸을 던졌다.
“후…….”
아직도 박희라를 통해 받아들인 기억의 조각이 너무 선명했다. 강우가 간단하게 씻고 나와 침대에 몸을 눕혔다. 기억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분명 둘째 할아버지는 북한을 탈출해 쫓기는 몸이었다. 그리고 둘째 할아버지의 아내분과 아들은 북한에서 무슨 일을 당한 것 같았고.’
강우는 그동안 보아온 기억을 통해 알고 있었다. 둘째 할아버지는 결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다만 친일파에 대한 분노로 잘못된 선택을 했을 뿐이었다. 강우는 그런 둘째 할아버지가 북한을 탈출한 것은 필연적이었을 거로 생각했다.
‘전쟁이 끝나고 독재정권으로 이어진 북한은 그야말로 생지옥으로 변해갔지.’
북한의 독재자는 전쟁이 끝난 후 피의 통치를 시작했다. 그 와중에 많은 사람이 감시의 대상이 되고 숙청을 당했다. 그 대상에는 독재자 본인의 위치를 위협할 사람들부터 제거를 시작했다. 그렇게 자신의 통치를 굳건히 하기 위해 독재자는 북한 사회를 피로 물들였다. 서로서로 감시하고 가족조차 서로를 믿지 못하는 지경까지도 이르렀다.
‘둘째 할아버지는 결코 그런 사회를 원한 게 아니었을 거야.’
만나본 적도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강우는 그리 믿었다. 기억 속 보았던 둘째 할아버지는 공평하지 못한 사회에 분노를 느꼈을 뿐이었다. 한때의 분노로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둘째 할아버지는 북한을 탈출한 걸까? 박희라는 둘째 할아버지와는 무슨 관계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강우가 몸을 뒤척였다. 워낙 잠도 적은 편이었는데, 오늘은 정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뒤척이던 때였다.
“아이쿠!”
“정식, 조심하라고.”
현관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쪽으로 향했다.
“아니 무슨 술을 이렇게 먹은 거야?”
“허? 나보다 자네가 더 마셨잖아?”
아버지와 마사토가 티격태격하며 신발을 벗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와 마사토의 뒤에는 위혁오가 서있었다.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위혁오가 강우를 발견했다.
“집에 있었구나.”
“네, 두 분 모시고 오느라 고생하셨죠?”
위혁오가 씩 웃었다.
“두 분 술에 많이 취하셨다. 일단 좀 도와드리자.”
“네.”
강우와 위혁오가 아버지와 마사토를 부축했다. 그리고 각자의 방에 눕혔다.
“고생했다.”
위혁오가 식은땀을 닦으며 말했다. 술에 취한 사람을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 한잔 드릴게요.”
“그래, 고마워.”
강우가 주방에 가서 물을 떠 왔다. 역시 술을 마신 위혁오가 목이 타는지 단숨에 마셨다. 강우가 위혁오를 보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그리고 형.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부탁?”
위혁오가 반색을 하며 강우를 바라보았다. 자신 역시 늘 도움만 받고 있다고 느낀 차였다. 그런 강우가 부탁할 게 있다고 하니 반가웠다. 무슨 부탁이든지 꼭 들어주겠다고 생각했다.
“네, 그…. 이게 좀 민감한 부탁일 수도 있는데요.”
“괜찮아. 내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줄게.”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혹시 사람 한 명에 대해 조사를 좀 해주실 수 있나요?”
“조사?”
위혁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군가가 강우의 심기를 건드렸나 싶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단숨에 찾아내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위혁오의 표정에서 위험함을 느낀 강우였다.
“아…. 그게요. 밖으로 나가서 이야기해요.”
아버지와 마사토가 잠에 들은 상태였다. 자세한 이야기를 위해 강우가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위혁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가 방으로 들어가 점퍼를 입고 나왔다. 강우와 위혁오가 아파트 밖으로 나왔다. 늦은 새벽 북경의 밤바람은 차가웠다.
“담배 한 대 피울게.”
흡연하는 위혁오가 담배를 꺼내며 물었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딸칵. 칙. 치익.
라이터에서 불꽃이 솟아오르며 위혁오의 입에 물린 담배 끝을 붉게 물들였다. 위혁오가 담배를 크게 한 모금 빨더니 ‘후~’ 연기를 내뿜었다. 캄캄한 밤하늘로 담배 연기가 흩어지듯 사라졌다.
“오늘 이강이랑 단향이랑 친구들 만나러 가서 사람을 한 명 만났어요.”
“그래?”
위혁오가 담배를 피우며 강우의 말에 집중했다. 강우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간단한 설명이 끝나고 강우가 박희라를 언급했다. 강우의 설명을 들은 위혁오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그 박희라라는 여자를 조사해 달라는 거지?”
“네, 최대한 자세히요.”
위혁오가 맡겨만 달라는 듯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는 나한테 일도 아니다. 맡겨만 줘. 며칠 내로 박희라에 관한 전부를 알게 될 거다.”
“감사합니다. 아…. 혹시 박희라 씨가 불편하지는 않게 부탁드려요.”
위혁오가 강우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항상 상대방을 배려하는 강우의 이런 행동은 익숙했다.
“그래, 걱정하지 말고. 본인은 눈치채지 못하게 일 처리하마.”
“고마워요. 형.”
“우리 사이에 고맙기는 난 오히려 네가 나한테 이런 부탁을 해줘서 고맙다. 앞으로도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만 해.”
“네.”
위혁오가 기다리고 있던 고급 세단에 탑승했다.
지이잉-
창문이 내려오고 위혁오가 강우에게 손을 흔들었다.
“날씨 춥다. 어서 들어가.”
“가는 거 보고요.”
위혁오가 고개를 끄덕이고 기사에게 차를 출발시키라 했다. 고급 세단이 조용한 엔진음을 내며 강우에게서 멀어져 갔다. 잠시 고급 세단의 뒷모습을 보던 강우가 슬쩍 땅바닥을 바라보았다. 위혁오가 피웠던 꽁초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강우가 꽁초를 주워서는 집으로 돌아갔다.
* * *
다음 날 아침. 중국 아파트에는 아버지와 마사토의 앓는 소리로 가득했다.
“으으….”
“아이고…. 머리야.”
어젯밤 벌어진 술자리에서 과음한 아버지와 마사토였다. 그만큼 오랜만에 만난 위진오였고, 좋은 술자리였다.
보글보글.
주방에서는 강우가 요리하는 중이었다. 아버지와 마사토를 위해 간단한 콩나물국을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강우가 아버지와 마사토의 앞에 뜨끈한 콩나물국을 놓아드렸다.
“고맙다 아들.”
“강우야, 고맙다.”
아버지와 마사토가 국을 후루룩 마시더니 ‘으어~’하는 소리를 냈다. 아버지와 마사토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지난밤 마신 술기운이 다시 올라오는 모양이다. 강우가 그 모습을 보며 씩 웃었다.
“오늘은 저 먼저 나갈 테니까 천천히 오세요.”
아버지와 마사토가 멋쩍게 웃었다.
“그래도 될까?”
“그럼요. 제가 일 보고 있을게요.”
강우가 씩 웃고는 반대편에 앉았다. 그리고는 아버지를 향해 슬쩍 물었다.
“그런데 아버지. 둘째 할아버지요.”
“어?”
콩나물국의 해장 능력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던 아버지가 강우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레 나온 할아버지의 쌍둥이 형님에 관한 질문이었다.
“혹시 북한으로 가신 이후 특별한 소식 같은 건 없었죠?”
아버지가 짧게 침음성을 흘렸다. 강우가 갑작스럽게 이야기를 꺼낸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한동안은 수소문도 해보고 이산가족 상봉 신청도 해보았는데…. 아무런 소식도 없었지. 그리고서는 할아버지도 형님을 찾는 건 포기하셨고. 아마 북한에서 돌아가신 게 아닐까 생각 중이다.”
“네.”
강우가 말을 아꼈다. 아직 확실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윽고 강우가 출근 준비를 마쳤다.
“그럼 먼저 나갈게요.”
거실에 축 늘어져 있는 아버지와 마사토가 강우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래, 잘 다녀와.”
강우가 아파트 밖으로 나갔다. 대기하고 있던 고급 세단이 강우 앞으로 다가왔다.
“회장님!”
고급 세단에는 진남규가 타고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마중을 나온 진남규를 보며 강우가 물었다.
“어? 여기까지 웬일이세요?”
“일단 타시죠. 날씨가 춥습니다.”
강우가 뒷좌석에 올라탔다. 진남규가 강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늘 중요한 약속이 잡혔습니다.”
“약속이요?”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 관다 그룹 회장님이 오늘 점심을 같이 먹는 게 어떠냐고 물으셨습니다.”
“관다 그룹이요?”
강우가 살짝 놀라며 물었다. 관다 그룹은 중국의 부동산과 미디어에 관련된 기업이었다. 1988년 창립 이후로 중국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엔터 사업에 투자해 크게 성공한 기업이었다. 현재 중국의 엔터 사업에 가장 영향력이 있다고 볼 수가 있었다.
“네, 저희 그룹에서 엔터 사업에 진출한다고 하니 만나보고 싶은 모양입니다.”
“음….”
강우가 생각에 잠겼다. 물론, 강우는 엔터 사업을 독자적으로 이끌어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관다 그룹이라는 기존의 기업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관다 그룹은 태자당 소속 보연래가 뒤를 봐주고 있는 곳이었다.
‘창업주인 왕건린의 아버지도 중국 공산당의 원로였다. 왕건린 본인도 군인 출신이었고.’
한번 만나볼 필요는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강우가 진남규를 보며 말했다.
“좋네요. 약속 진행해주세요.”
“네, 회장님.”
진남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 고급 세단이 미끄러지듯 아파트 앞을 떠나갔다.
* * *
관다 그룹의 본사 역시 북경에 있었다. 강우와 왕건린은 북경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약속을 잡았다.
스르륵.
고급 세단이 레스토랑이 있는 호텔 앞에 멈춰 섰다. 호텔 직원이 빠르게 다가와 뒷문을 열어주었다.
“고맙습니다.”
강우가 차에서 내리며 직원에게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강우를 확인한 호텔 직원이 잔뜩 긴장했다. 말로만 듣던 강우를 직접 보니 알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들어가시죠.”
뒤이어 내린 진남규가 강우를 향해 말했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강우는 곧장 약속 장소로 향했다. 호텔 안에 있는 레스토랑에 도착하자 대기하고 있던 관다 그룹의 직원이 다가왔다.
“박강우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관다 그룹의 장연 비서입니다.”
강우를 향해 깍듯이 인사하는 직원은 왕건린의 직속 비서였다.
“안녕하십니까. 왕 회장님이 먼저 도착하신 모양이군요.”
“네, 기다리고 계십니다.”
강우가 장연의 안내를 받아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장연은 미리 준비된 곳으로 강우를 안내했다. 레스토랑 안에 있는 단독 공간이었다. 주로 중요한 미팅이나 비밀스러운 만날 때 이용되는 곳이었다. 방음은 물론이고 안쪽이 보이지 않아 비밀유지가 가능한 곳이었다.
똑똑.
“회장님, 박강우 회장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장연의 말에 안쪽에서 반가운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그래? 어서 모시거라.”
드르륵.
문이 열리고 방 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방 안에는 한 명의 중년이 훌쩍 넘은 남성과 십 대로 보이는 한 명의 남자가 있었다. 강우가 십 대로 보이는 남자를 보며 눈을 빛냈다. 하지만 이내 안쪽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광복 그룹 박강우입니다.”
강우를 보며 왕건린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호의가 가득 담긴 눈빛은 강우도 의아할 정도였다.
“중국 재계의 기린아 박강우 회장을 만나게 돼서 매우 기쁘군요. 관다 그룹 왕건린입니다.”
강우와 왕건린이 인사를 나누었다. 강우가 다시 왕건린 옆을 슬쩍 바라보았다. 왕건린이 부드럽게 웃으며 옆에 있는 사람을 소개했다.
“아…. 여기는 내 아들인 왕사헌이라고 합니다. 박강우 회장을 만난다고 하니 꼭 따라오고 싶다고 해서 말입니다.”
강우가 왕사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완다 그룹의 차기 후계자 그리고 한류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인물.’
강우가 계획하고 있는 중국 내 프로게임리그 창단을 먼 나중에 주도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강우의 인사에 왕사헌이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왕사헌입니다. 오늘부터 큰형님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네?”
갑작스러운 왕사헌의 행동에 강우도 왕건린도 멍한 표정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