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참 좁아.
퉁. 퉁. 퉁.
도마에 칼이 내려쳐지는 경쾌한 소리가 가게 안에 울렸다. 하얀색 조리복을 입은 남성의 손이 도마 위를 경쾌하게 날아다닐 때마다 재료가 듬성듬성 잘려 나갔다.
“그래도 네가 나를 알아볼 줄 몰랐다.”
“일 학년 때 같은 반이었잖냐.”
요리를 하고 있는 남성의 바로 앞쪽으로는 강우가 앉아있었다. 요리하는 남성 즉 청춘 주점의 주인은 강우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그런가…. 그래도 일 학년 이후로는 접점이 별로 없었잖냐. 나는 이과였고 강우 너는 문과였으니까.”
“그랬지. 그래도 뭐…. 그게 중요한가 한 번 동창은 영원한 동창이지.”
요리하던 남성이 강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양서 고등학교 출신이라면 눈앞의 강우를 모를 수가 없었다. 학창 시절에도 유명했고 졸업을 하고 나서는 더욱더 유명해진 강우였다.
“그럼 너 내 이름은 기억하냐?”
남성이 기대 반 걱정 반의 심정으로 물었다. 그리 친하지 않았던 자신의 이름까지 기억할까 싶었다. 하지만 강우는 눈앞의 남성을 모를 수가 없었다.
“당연하지. 신익준.”
“어…. 기억하네.”
강우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미래 기억을 떠올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모를 수가 없지 익준아….’
신익준은 미래의 기억 속 강우와 신원주의 친구였다. 신원주가 친해지고 강우와도 친해진 양서고 친구였다. 하지만 강우와 신원주의 현재는 강우가 가진 미래 기억과는 달랐다. 일단 이과를 갔던 미래 기억과는 달리 문과를 선택했었다.
‘문과를 가고 나서 익준이와의 접점이 사라질 수밖에 없었지.’
그런 이유로 강우와 신원주는 미래 기억만큼 신익준과 친해질 수 없었다. 그렇다고 뜬금없이 신익준을 찾아가 친해지자고 하기도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바뀐 현재의 삶에 충실하느라 조금 잊고 지냈던 것도 맞았다.
“내가 기억력이 좀 좋아서 말이야.”
“어?”
칼질하던 신익준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씩 웃었다.
“장난이다 장난. 그나저나 나은이랑 같은 극단이었다며?”
“어, 극단 입단 동기.”
강우와 신익준이 이나은이 있는 테이블 쪽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을 받은 이나은이 싱긋 웃었다. 두 사람이 다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맙다. 네가 나은이 많이 도와줬다고도 들었다.”
“아…. 뭐….”
신익준이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가게에 들어오고 반가운 인사를 나눈 후 이나은은 강우에게 신익준에 대해 말해주었다. 극단 내에서 이나은에게 마음을 두었던 선배들이 한둘이 아니라고 했다. 강우라는 남자친구가 있었음에도 말이다.
“나은이가 곤란할 때마다 네가 나서서 많이 쳐내 주고 그랬다며.”
“선배라는 이유로 사람을 곤란하게 하니까. 그냥 지켜볼 수 없었지.”
신익준의 말에 강우가 입꼬리를 올렸다. 미래 기억 속 아는 신익준의 성격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극단은 왜 그만둔 거야?”
강우의 질문에 신익준이 말없이 웃었다. 강우가 미래 기억을 떠올렸다. 신익준은 2학년 때 이과를 선택했지만, 연극영화과를 갔었다. 생각해보면 대한민국의 많은 청춘이 비슷한 일을 겪고는 한다. 오직 입시를 위한 교육 환경에서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모른 채 대입을 위해 달려가는 일 말이다.
“연기가 좋아서 시작했는데…. 솔직히 미래가 안 보이더라.”
“......”
통. 통. 통.
신익준이 요리를 계속하며 말을 이어갔다. 아직 개업한 지 얼마 안 된 만큼 어딘지 모르게 익숙지 않은 손놀림이기는 했다. 신익준이 다져진 재료를 한쪽에 끓고 있는 뚝배기에 부었다.
“주변에 너무나 빛이 나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서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죽어도 성공을 못 할 거 같더라고. 그래서 틈틈이 배웠던 요리 솜씨로 작은 가게 하나 차렸지.”
“가게 오픈 한 지 얼마 안 됐구나?”
강우가 가게를 다시 둘러보았다. 곳곳에 신장개업한 티가 묻어났다.
“이제 일주일쯤 됐나? 그래서 아직 어설프다.”
“그랬구나….”
강우가 가진 미래 기억 속에서도 신익준은 크게 성공한 연예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늘 조연으로 출연해도 자신의 직업을 사랑하는 그런 친구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져 버린 현재였다. 강우가 신익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성 맨션 일 때도 느꼈지만…. 인연은 결국 돌고 돌아 만나게 되는 건가….’
강우가 묘한 기분을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미래 기억 속 친했던 친구들을 떠올렸다. 다들 무엇을 하고 살지 강우가 가진 미래 기억과 같을지 궁금했다.
치이익.
뚝배기에 불을 올린 신익준이 다음에는 커다란 불판에 요리를 시작했다. 강우가 신익준의 뒷모습 너머로 힐끗 불판을 바라보았다.
“그건 무슨 요리냐?”
“어? 아…. 이거 철판 돼지고기 숙주 볶음.”
“아직 서투르다고 그러더니 잘하네.”
“원래 요리하는 거 좋아했거든. 극단 생활하면서도 쭉 요리 학원도 다니고.”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 기억 속 친구들과 어디를 놀러 갔을 때 신익준이 요리 담당이기는 했다. 그리고 음식들은 언제나 맛이 있었던 기억도 있었다. 문득 이제는 다른 운명을 살고 있을 친구들이 보고 싶어졌다.
‘음…. 한 명씩 찾아볼까….’
미래 기억 속 강우가 친하게 지내던 친구는 같은 양서고의 신원주와 신익준 그리고 다른 고등학교에 다니던 친구 셋이 있었다. 그렇게 강우는 미래 기억 속 친구들을 떠올리며 신익준을 바라보았다. 신익준은 서툴지만, 열심히 요리했다. 요리하는 얼굴은 참 즐거워 보였다. 이윽고 요리를 완성한 신익준이 그릇에 정갈히 담았다.
“자~ 안주 완성. 이제 자리 가서 앉아라. 일행들 기다리겠다.”
신익준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완성된 안주를 쟁반에 담았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하고는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주문하신 안주 나왔습니다.”
테이블에 앉아있던 이나은과 미나가 안주를 보며 눈을 빛냈다. 향긋하게 풍겨오는 안주 냄새에 두 눈을 감고 기분이 좋은 소리를 냈다.
“와. 냄새 좋다.”
“번데기탕이랑 이건 돼지고기 숙주 볶음이네요.”
이재원도 배가 고팠는지 배를 쓰다듬었다. 오늘 첫 손님이자 유일한 손님인 강우 일행의 뜨거운 반응에 신익준이 멋쩍게 웃었다.
“맛은 장담합니다. 맛있게 드세요.”
“잘 먹을게.”
강우도 수저를 들며 말했다. 신익준이 다시 개방형 주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묵묵히 뒷정리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만나서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냐?”
이재원이 한참이나 있다가 돌아온 강우를 보며 말했다.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처음 보는 거라서요.”
“그래?”
이재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한 강우이기는 했다. 하지만 오늘은 유독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마치 오래된 친구 사이를 보는 듯 말이다.
“그런데 신기하네요. 강우 오빠 고등학교 동창이 또 나은 언니 극단 동기일 수가 있죠?”
미나도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나도 맨 처음에 깜짝 놀랐어. 물론, 내가 있던 극단이 대학로에서 제일 유명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람 인연이라는 게 참 신기해.”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뀌어 버린 운명 속에서도 인연의 고리는 이렇게 미약하게 연결되나 보다.
“빨리 먹어봐. 맛있어.”
생각에 잠긴 강우에게 이나은이 음식을 권했다.
“어? 어어….”
강우가 음식을 집어 먹었다. 그리고는 깜짝 놀라며 신익준을 바라보았다. 음식이 너무 맛이 있었다. 미래 기억 속 신익준이 요리를 잘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맛있지? 대박이지?”
“어? 어 맛있네.”
강우의 말에 반응을 살피던 신익준이 씩 웃었다. 강우가 엄지를 ‘척’ 하고 들어주었다.
“야…. 너 요리 잘하는데?”
“고맙다.”
즐거운 술자리가 이어졌다. 좋은 안주에 좋은 사람들이 모여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다만 아쉬운 것은 역시나 강우 일행이 계속해서 유일한 손님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술자리가 끝났다.
“오늘 계산은 내가 할게요.”
이나은이 계산을 하겠다며 나섰다. 극단 동기가 오픈한 가게에서 계산은 꼭 하고 싶었나 보다. 강우와 이재원도 그러라고 했다.
“익준아, 잘 먹었어. 음식 너무 맛있었어.”
“맛있었다니 다행이다.”
말을 마친 신익준이 조금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신익준이 내민 물건을 확인한 이나은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신익준이 씩 웃었다.
“싸인 좀….”
“당연하지. 사진도 한 장 찍자.”
신익준이 기다렸다는 듯 사진기를 꺼내왔다. 그사이 이나은이 사인을 마쳤다.
“고맙다. 그런데 저기….”
신익준이 이번에는 강우를 바라보았다. 이나은 뒤에 서 있던 강우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
“어…. 너도 사인 좀…. 그리고 재원 형님도….”
강우와 이재원이 씩 웃더니 사인을 남기고 사진까지 찍었다.
드르륵.
가게 문이 열리고 강우와 이재원 그리고 미나가 나왔다. 마지막으로 이나은이 계산을 마치고 나왔다. 신익준이 가게 밖으로 배웅을 나왔다.
“익준아, 장사 대박 날 거야!”
이나은이 신익준을 보며 파이팅을 외쳤다. 신익준이 픽하고 웃었다.
“대스타님께서 친필사인에 사진까지 남겨주셨으니 아주 좋은 기운이 들어오겠지.”
“나만 남겼나. 저기 강우랑 재원 오빠도 남겼으니까 더 대박 날걸?”
신익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인사를 마친 이나은이 강우 옆으로 왔다. 강우가 신익준을 향해 핸드폰을 쓱 내밀었다.
“번호 좀 알려줘라.”
“어? 아아…. 잠깐만.”
신익준이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찍었다. 강우가 통화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몇 번 가고 신익준이 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강우의 전화번호를 소중히 저장했다.
“종종 들를게. 장사 대박 나고.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하고.”
“어…. 고맙다. 신경 써줘서.”
신익준이 정말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동창이라고는 하지만 1학년 때 잠깐의 인연이었다. 하지만 강우는 정말이지 자신에게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강우가 씩 웃었다. 미래와는 달라진 인연이었지만, 이렇게 다시 이어졌다. 앞으로는 미래 기억 속 친구들도 조금 챙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래, 장사 대박 나라.”
신익준과 이재원도 인사를 나누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금세 친분을 튼 두 사람이었다. 신익준은 참 넉살이 좋은 성격이었다.
‘그것도 미래 기억이랑 다를 게 없고.’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네 사람이 가게에서 멀어졌다. 잠시 강우 일행을 바라보던 신익준이 이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 들어가요.”
“그래, 조심히 가라.”
이윽고 강우와 이나은 그리고 이재원과 미나가 헤어졌다. 이재원과 미나를 배웅한 강우와 이나은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참 신기하지? 익준이가 너랑 동창인 거.”
“세상이 참 좁아.”
강우가 씩 웃으며 답했다. 이나은이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이래서 사람은 죄짓고 살면 안 되나 봐.”
“우리 나은이는 법 없어도 살지.”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나은이 강우의 팔짱을 끼며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강우가 헤벌쭉 웃었다.
“익준이가 너 극단에 있을 때 힘들었다고 말해주더라.”
“응? 아….”
이나은이 강우를 보며 싱긋 웃었다. 강우가 이나은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앞으로는 그런 일 있으면 꼭 나한테 말해줘 알겠지?”
“응.”
두 사람이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어느덧 밤이 깊어진 밤거리는 한산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거리였지만, 역시 예전과 같은 정취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재원이 오빠랑 미나 약혼식 하는 거 정말 부럽다.”
“부러워? 우리도 할까?”
강우의 말에 이나은이 멈춰 섰다. 그리고는 강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강우가 움찔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나은이 양손을 허리에 ‘척’ 하고 올렸다. 익숙한 자세와 분위기에 강우가 속으로 망했다고 생각했다.
“박강우.”
“네!”
이나은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 강우가 바짝 군기 든 목소리를 냈다.
“설마 지금 이게 정식 프러포즈는 아니겠지?”
“아…. 아닙니다!”
이나은의 입꼬리가 실룩였다. 하지만 이내 표정 관리에 성공했다. 역시 배우는 배우였다.
“오늘 한 말은 못 들은 거로 하겠다. 알겠나?”
“네! 대장님.”
강우의 군기든 모습에 이나은이 결국 고개를 돌려버렸다. 참지 못한 미소를 지은 이나은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강우가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뱉으며 이나은의 뒤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