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5화 (305/402)

그걸 몰라서 물어요?

딸랑.

카페 문이 열리고 이재원이 나타났다. 역시나 어깨 위에 눈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이재원이 눈을 툭툭 털자 눈가루가 흩날리듯 사방에 날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페 안의 여성 손님들이 ‘꺅꺅~’ 작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이재원은 무심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미나야!”

그리고는 미나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에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이재원이 정말 좋을 때나 볼 수 있는 미소였다. 주변이 환해지는 미소에 또 여성 손님들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성큼성큼 걸은 이재원이 미나의 옆자리로 직진해 앉았다.

“뭐야? 둘이 먼저 만나서 뭐 하고 있었어?”

이재원이 강우를 보며 물었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형 이야기요?”

“나?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이재원이 흠칫하며 강우와 미나를 번갈아 보았다. 이재원 역시 강우가 미나에게는 친오빠 같은 존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걸 몰라서 물어요?”

강우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재원이 그대로 딱딱히 굳어버렸다. 그 모습에 미나는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참았다. 대기업 차기 회장 이재원도 강우에게는 늘 쩔쩔맸다.

“아니, 내가 요즘 바빠서 조금 신경 못 써준 건 있는데…. 그거 말고는…. 아 뭐지…?”

이재원이 머리를 박박 긁었다. 강우가 픽 웃었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친정 오빠랑 비밀 이야기?”

“아….”

이재원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미나가 강우를 보며 말했다.

“오빠, 그만해요 이러다가 재원 오빠 울겠어요.”

“그래? 그럴까?”

강우와 미나의 환상적인 호흡에 이재원이 궁지에 몰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 미나를 바라보았다.

“미나야, 밥 먹었어? 배 안 고파?”

“네, 아직 안 먹었어요. 나은 언니 기다렸다가 같이 밥 먹으러 가요.”

“그래? 나은이도 오기로 했어?”

이재원이 강우를 보며 물었다.

“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나은이가 바쁠 거 같아서 오늘 모이기로 했어요.”

“아…. 드라마 들어간 거 바쁜가 보네.”

“네, 크리스마스 때쯤부터 나은이 나오는 분량 촬영 들어가거든요.”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커플 데이트를 하는 두 커플이었다. 하지만 이번 크리스마스는 이나은의 스케줄이 있었다. 이나은은 강용이가 대본을 쓴 드라마의 여주인공이었다. 이나은과 강우의 만남은 극의 초중반에 해당했지만, 이나은의 이야기도 각색한 대본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이번 드라마 대본 진짜 잘 뽑혔다고 하더라. 우리 막내가 진짜 그런 재능이 있을 줄 누가 알았냐.”

이재원이 강용이를 떠올리며 흐뭇해했다. 강용이가 가진 재능이 놀라웠고, 기특했다. 어린 나이에 드라마 작가로 데뷔를 하다니 정말 범상치 않은 일이었다. 강용이의 이야기가 나오자 팔불출 강우가 가만히 있을 턱이 없었다.

“앞으로 더 기대할 만할걸요?”

“크…. 대진 엔터에서 빨리 강용이를 붙잡아야 하는 거 아닐지 몰라.”

이재원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강용이의 재능이라면 앞으로 어떤 대작들이 그 손에서 탄생할지 생각만 해도 기대가 됐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대진 엔터 전속 작가로 계약 준비 중이에요.”

현재 대진 엔터에서는 강용이와 정식 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마 국내 최연소 작가 계약이 아닐까 싶었다.

“좋네. 어리지만 꼭 능력에 맞는 대우를 해줘. 동생이라고 남의 시선 신경 쓰지 말고.”

“그럼요. 제가 언제 그런 거 신경 쓰는 거 봤어요? 그리고 딱 능력에 맞는 대우를 해줄 거예요.”

이재원이 씩 웃었다. 가족이라고 해서 특별히 대우해줄 강우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럼 나은이 오면 뭐 할 건데?”

“음…. 좋은 데 가서 밥 먹고 넷이 술도 한잔하고 그러죠?”

“오케이. 딱 좋아.”

이재원이 씩 웃으며 좋아했다. 금세 밝아진 이재원의 모습을 바라보며 미나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럼 나은이 오기 전에 나도 커피나 한잔하자.”

이재원의 말이 끝나자 미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자 이재원이 미나를 붙잡았다.

“내가 갔다 올게. 앉아있어.”

“네, 오빠.”

이재원이 미나를 사랑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계산대를 향해 걸어갔다. 주변 손님들의 시선이 대번에 이재원에게 쏠렸다.

“오빠는 가끔 보면 참 신기한 거 같아요.”

미나가 이재원을 보며 말했다. 강우는 물론이고 이재원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알려진 상태였다. 어디를 가든 항상 이목이 쏠렸다. 사람들은 이재원을 보며 신기해하기도 했고, 직접 다가와 말을 걸기도 했다. 다른 재벌 2세들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뭐가?”

“그냥 사람들 시선에 의식 안 하는 것도 그렇고…. 저기 봐요.”

강우가 계산대로 시선을 돌렸다. 주문하러 간 이재원의 주변으로 몇몇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사람들은 이재원에게 말을 걸어오거나 사인을 해 달라고 했다. 이재원은 그런 사람들의 요청을 유쾌하게 받아주었다.

“음…. 아까도 말했지만, 재원이 형은 다른 재벌 2세들이랑은 매우 다르지. 평범하게 살았던 시절이 더 길기도 하고. 워낙 성격이 좋으니까.”

“그렇긴 하죠.”

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는 그런 이재원을 보며 씩 웃었다. 이재원의 저런 모습은 대진 그룹의 친근한 이미지를 심어주는데 큰 효과를 보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든 마주칠 수 있는 재벌 2세라니. 재벌이라면 특별한 곳에 가고 특별한 것을 먹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는 일이었다. 물론, 다른 재벌 2세들을 일반 카페에서 마주칠 일이 없는 것은 사실이기는 했다.

“저…. 박강우 씨죠?”

물론, 그것은 강우에게도 해당하는 일이었다. 특히 강우는 이재원과 달리 남자들에게 인기가 만점이었다. 강우가 걸어온 길을 아는 남자들은 강우의 성공 이야기를 마치 자신의 성공처럼 여기고 동경했다.

“아…. 네.”

“팬입니다. 응원하고 있습니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우를 찾아온 사람은 강우보다 나이가 든 사십 대 남성이었다. 남성의 옆에는 아들로 보이는 꼬마도 있었다.

“감사합니다.”

“형, 우리 아빠가 광복에 후원도 하는 진짜 팬이에요.”

남자아이의 말에 강우가 더욱더 고마운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자신을 지지해주고 지원해주는 많은 사람 덕분에 강우는 더욱더 확신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보내주신 응원과 후원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네, 꼭 그래 주셔야 합니다. 저는 제 자식에게는 올바른 세상을 물려주고 싶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그런 대한민국을 만들어 주십시오.”

남성의 말에 강우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강우는 자신이 하는 일들을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강우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정의로운 세상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형, 파이팅이에요!”

남자아이가 강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남자아이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그래, 고맙다.”

그 말을 끝으로 남성과 남자아이가 자리로 돌아갔다. 남성이 돌아간 자리에는 만삭의 아내가 앉아있었다. 아내 역시 강우를 보며 주먹을 불끈 쥐며 응원해 주었다. 강우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감사함을 표했다.

“오렌지주스 한 잔 더 할 거지?”

마침 이재원이 돌아왔다. 이재원이 들고 온 쟁반에는 강우에게 줄 오렌지주스가 한 잔 더 있었다.

“네, 고마워요.”

세 사람은 다시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람들은 평범하지 않은 강우와 이재원의 대화에 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여느 이십 대의 이야기들이었다. 사람들은 두 사람에게 더욱더 친근감을 느꼈다.

딸랑.

이윽고 카페 문이 열리고 마지막으로 이나은이 나타났다. 이나은이 나타나자 혹시나 기대하던 사람들이 탄성을 뱉어냈다. 강우가 있는 곳에 이나은이 나타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

“강우야.”

이나은이 강우를 보고는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이재원과 미나도 반갑게 웃으며 이나은을 반겼다.

“나은아, 안녕.”

“언니.”

이나은이 두 사람과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강우 옆에 앉았다. 이나은이 비어있는 음료 잔들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다 마셨으면 나가요.”

“뭐 안 마셔도 돼?”

강우가 묻자 이나은이 배를 쓰다듬었다.

“응, 오늘 점심 먹고 지금까지 아무것도 못 먹었어.”

“그래? 그럼 나가자. 형, 나가요.”

강우의 말에 이재원과 미나도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우와 이재원이 주변 사람들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카페 안의 사람들이 모두 자신들을 주목하고 있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나은과 미나도 별일 아니라는 듯 인사를 꾸벅했다.

딸랑.

카페 문이 열리고 두 쌍의 커플이 밖으로 나왔다. 거리에는 하얀 눈이 쌓여있었다.

“어째, 우리는 크리스마스쯤에 모이면 꼭 눈이 오는 거 같더라?”

이재원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차가운 눈송이가 얼굴에 내려앉는 느낌이 제법 좋았다.

“그러게요. 참 신기하긴 해요.”

강우도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두컴컴한 하늘에서 내리는 하얀 눈은 참 보기도 예뻤다.

“오늘 메뉴는 우리가 정할게요.”

이나은이 강우와 이재원을 향해 말하고는 미나의 팔짱을 꼈다. 이나은과 미나가 앞으로 먼저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강우와 이재원은 각자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는 앞장서는 이나은과 미나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강우야, 미나한테 잘 말해줬냐?”

앞서가는 두 사람과 거리가 조금 떨어지자 이재원이 물었다. 강우가 이재원을 바라보았다. 역시 이재원이 미나의 고민을 모르고 있을 리 없었다.

“네, 걱정하지 마요. 제가 잘 말했어요. 그리고 형도 걱정하지 마요. 제가 다 알아서 처리할 거니까.”

“하…. 이럴 때 보면 정말 누가 형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고맙다. 난 진짜 네 덕분에 산다.”

이재원이 강우를 보며 고마움을 표했다. 남자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더 필요하겠는가. 강우는 그저 말없이 웃으며 이재원의 팔뚝을 툭 하고 쳐주었다.

사박. 사박.

이윽고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다다르자 눈 밟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걷지 않는 길에 쌓인 눈을 밟는 소리에 진한 겨울의 향기가 느껴졌다.

“여기예요.”

이윽고 이나은이 작은 가게 앞에 도착했다. 손님이 드문지 가게 입구에는 눈이 제법 쌓여있었다. 강우와 이재원이 이나은과 미나 곁에 도착했다.

“여긴 어디야?”

이재원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이나은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

“예전 극단 시절에 같이 연극을 하던 친구가 하는 술집이에요. 얼마 전에 오픈했다고 해서 오늘 들르기로 했어요.”

“아~ 그래? 추운데 어서 들어가자.”

드르륵.

문이 열리고 이나은과 미나가 안으로 먼저 들어섰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던 이재원이 뒤를 돌아보았다.

“뭐 해? 들어와. 춥다.”

“네.”

이재원이 잠시 강우를 보더니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은 강우가 묘한 표정으로 가게를 바라보았다.

-청춘 주점-

반듯한 한글로 쓰여 있는 간판이 왜인지 낯설지가 않았다. 강우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우렁찬 남성의 목소리가 강우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강우가 꾸벅 인사를 하고는 고개를 들어가게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멍한 표정으로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어…. 안녕?”

강우를 확인한 상대방이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왔다. 강우가 묘한 기분을 느끼며 손을 들었다.

“아…. 그래 안녕.”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