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9화 (299/402)

제 생각이 짧았군요…….

깊은 정적이 흐르는 회의실을 보며 강우가 눈을 빛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의문과 경악스러움에도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최 비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된 자료들을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프린트된 자료들은 깔끔히 제본되어있었다.

-잠시 나누어 드린 자료를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강우는 잠시 회의실의 사람들이 자료를 확인할 시간을 주었다.

사라락. 사라락.

회의실에 자료를 넘기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자리로 돌아온 최 비서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강우를 바라보았다. 자료를 확인한 사람들이 놀라 마지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윽고 강우가 입을 열었다.

-보시는 것처럼 동양 무역은 올해 일본 김치시장의 절반이 넘는 25만 톤의 판매 실적을 올렸습니다. 이는 매출액 환산으로는 22억5천만 달러에 달하는 매출실적입니다.-

이태건의 얼굴에 경악이 짙어졌다. 동양 무역을 깔보던 몇몇 임원들도 멍한 표정을 지었다. SJ 푸드빌의 연간 매출실적을 가볍게 뛰어넘는 수치였다.

“맙소사…. 말도 안 돼 어찌 한 기업이 전체소비량의 반이 넘어가는 판매량을 달성할 수 있단 말이지?”

“믿을 수 없어….”

강우가 씩 웃었다. 일본 김치시장은 지금껏 폭발적으로 성장해왔다. 그리고 일본 김치시장에 적극적인 투자를 거듭한 동양 무역은 일본 김치시장을 장악한 상태였다. 특히 일본에 공장을 세우고 일본 지사까지 있는 동양 무역은 외국기업이라는 인식이 없었다.

‘자기들이 사 먹는 김치와 식품들의 수입이 대부분 한국으로 빠져나오고 있는걸 모르고 있지.’

물론, 언론에서는 동양 무역의 성장을 취재하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엄연히 일본에 자리하는 기업이었다. 뿌리가 한국에 있다고 해도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저희 동양 무역은 일본 현지화에 성공한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희는 일본 김치시장의 잠재력을 엿보고 3년 전부터 현지에 진출했습니다.-

강우의 말과 함께 화면으로 동양 무역이 일본 시장 공략을 하며 사용했던 방법들이 나열되기 시작했다.

-저희는 먼저 일본 현지에 생산 공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현지인들을 직원으로 고용해 관리했습니다. 무엇보다 타국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지 않는 데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인들의 기호에 맞는 맛으로 접근을 했습니다.-

강우의 말에 임원들의 눈이 호기심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던 임원들은 어느새 강우의 말에 잔뜩 집중하기 시작했다.

-다른 나라에 자국의 음식을 판매한다는 것. 그 시작은 판매 대상인 나라의 사람들 입맛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즉 현지화의 의미는 판매망을 현지인에게 맡긴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현지인들의 문화와 식습관 그리고 입맛을 분석하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 겁니다.-

강우가 SJ 푸드빌이 준비하던 중국진출 방식의 문제점을 꼬집었다. SJ 푸드빌 임원들 몇 명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모두 강우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자들이었다.

-저희 동양 무역은 이미 수년간 축적된 노하우로 중국 현지 공략에 마케팅적 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 시장을 성공적으로 공략한 것으로 증명할 수 있겠죠.-

강우가 최 비서를 힐끗 바라보았다. 최 비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료를 순서대로 넘기기 시작했다. 일본 시장을 공략한 동양 무역의 지난 3년간이 담긴 자료들이었다.

-지금 공개하는 자료들은 저희 동양 무역만의 노하우입니다. 이걸 공개하는 것은 SJ 그룹과 저희 동양 무역의 특별한 관계 때문입니다. 몇몇 임원분들의 오해와 달리 우리 동양 무역은 정당한 능력으로 이번 중국 시장 진출의 전권을 따낸 겁니다.-

부정적이던 임원들이 서서히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이태건은 연신 불편한 내색을 내비쳤다.

“그렇다고 한들 일본과 중국의 시장은 완전히 다르다고 볼 수 있네. 일본에서 성공했다고 꼭 중국 시장을 잘 공략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라는 거지.”

이태건의 말에 공감하는 임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한 국가 간의 관계와는 달리 일본은 오랜 시간 한국의 주요 무역 대상국이었다. 하지만 중국은 달랐다. 오랜 세월 공산국가였고, 특히 한국과 수교를 맺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또한, 중국 내에 무리한 투자나 진출을 했다가 고배를 마시고 철수한 외국기업들도 많았다.

‘그렇군…. 일부 임원들은 중국 시장 진출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기도 하는 거였어.’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맞습니다. 중국 시장은 굉장히 폐쇄적이고 기업을 운영하기도 까다로운 곳입니다. 공산당의 말이 곧 법이고, 무역 관례죠. 아무리 잘나가는 기업도 공산당의 말 한마디면 문을 닫아야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양 무역은 다릅니다.-

강우의 말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자료화면이 떠 올랐다. 이번에는 중국 현지 법인 광복에 대한 자료였다.

-저희 동양 무역의 중국 현지 법인 광복입니다.-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법인의 이름부터 범상치 않았다. 그리고 현재 강우가 진행하는 일들을 알고 있기에 더 큰 의미로 다가왔다. 하지만 놀라기에는 아직 일렀다.

-저희 중국 법인 광복은 현재 중국 내 기업순위 10위권에 있습니다. 자산가치는 약 150억 위안화입니다. 다루는 분야는 투자, IT, 건설, 식품입니다. 연 매출은 73억 위안화입니다.-

회의실에 탄성을 넘어서 경악이 다시 차올랐다. 누군가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이런 회사가 도대체 왜 우리 회사의 중국진출을 돕겠다는 거지?”

모두가 공감할 이야기였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애초에 저희는 SJ 그룹의 중국진출을 돕는 겁니다. 이 프로젝트로 인해 우리 회사가 남길 이윤은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강우의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송진태 회장과 송경호 사장 그리고 송경식 부사장은 이미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여태껏 듣고만 있던 송진태 회장이 입을 열었다.

“박강우 부사장의 말이 맞아. 우리 SJ 그룹의 중국 시장 진출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우리를 도와주는걸세. 지금까지처럼 우리가 부리는 상황이 아니란 말이지.”

송진태 회장이 이태건 이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태건 이사는 이제는 아예 넋이 나가 있었다. 동양 무역과 송진태 회장의 인연이 알려진 후였다. 이태건은 그 인연을 이용해 동양 무역이 이익을 얻으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능력도 한참 부족한 곳이라 생각했다.

“제 생각이 짧았군요…….”

이태건이 신음을 흘리듯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송진태 회장이 짧게 혀를 찼다.

“다른 임원들도 마찬가지야. 우리 SJ가 늘 갑의 위치일 거라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아. 이제 우리는 세계시장으로 뻗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어. 세계에는 우리 그룹 정도는 우습게 볼 기업들이 잔뜩 있지. 지금까지처럼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사고방식은 버리는 게 좋아.”

송태진 회장이 강우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정말 어디서 저런 복덩어리가 나타났는지 생각할수록 기뻤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자신을 지금의 위치에 있게 해준 강우의 증조할아버지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동양 무역이 한국 내에서 중견기업인 것은 아직 기업공개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조만간 대진 그룹과 우리 그룹의 세계시장 진출을 진두지휘할 박강우 부사장일세. 다들 많이 듣고 배워. 나이 어리다고 무시하다간 큰코다칠 줄 알고.”

송진태 회장의 말에 임원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송진태 회장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사실 대진 기업과 문화 사업 전쟁에서 밀리면서 그동안 오너가에 대한 불신들이 알게 모르게 생겨나던 차였다. 그런 이유로 SJ 푸드빌의 중국진출 사업 건은 일명 이태건 이사의 파벌이 전적으로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강우가 중국진출 사업 건에 대한 지적을 해왔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있지.’

송진태 회장은 강우의 제안을 사업적으로만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알게 모르게 불만을 품던 이태건 이사의 파벌에 일격을 날릴 기회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이태건 이사의 파벌을 짓누를 줄은 상상하지 않았다.

‘중국진출 사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 그때나 가능할 줄 알았건만….’

송진태 회장의 생각보다도 훨씬 더 강우는 유능하고 뛰어났다. 그리고 송진태 회장의 의도를 알아채고 오늘 이렇게 멋지게 이태건 이사의 파벌의 기를 눌러 주었다.

“그래, 박강우 부사장. 앞으로 중국진출에 대한 방식을 오늘 잠깐 설명해 줄 수 있을까?”

송진태 회장의 부탁에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원래 극비사항이기는 하지만 회장님의 말씀이시니 당연히 알려드리겠습니다. 자료화면 보시겠습니다.-

스크린 위로 자료화면이 떠 올랐다.

-동양 무역이 준비하고 있는 중국 시장 진출 프로젝트입니다. 저는 SJ 푸드빌의 중국 시장 진출 콘셉트를 현지화와 차별화에 중점을 둘 생각입니다. 흔히 여러분께서는 지금 자주 접하는 한국 음식들을 평범한 음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인에게는 다릅니다. 그들에게는 처음 접하는 생소한 것들일 테니까요. 저는 일단 현지 음식과 비슷한 맛을 내며 중국인들에게 친근한 맛으로 다가갈 생각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차별화입니다. 중국인들은 경제화 이후 점점 소득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즉 우리나라의 IMF 이전처럼 중산층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강우의 말에 임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강우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일만의 의심도 불만도 없었다.

-중국인들의 경제력이 늘어나며 점점 좋은 음식에 대한 수요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중국인들은 자국 음식 생산 업체와 재료들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편입니다. 저는 한국 식자재를 이용한다는 것을 일차적으로 강조할 생각입니다.-

두 번째 자료화면이 떠올랐다.

-둘째, 저희는 현지 법인 광복의 인적 인프라와 물적 인프라를 이용해 SJ 푸드빌이 가지고 있는 외식 브랜드들의 가맹점을 직영으로 운용할 생각입니다. 물론 안정이 되고 나면 가맹점 사업도 벌일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건 아주 나중 일이 될 거고, 가맹점주를 모집하는 것 또한 굉장히 까다로운 심사를 걸칠 생각입니다.-

이태건 이사가 이제는 거의 기어들어 가는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중국 시장에서 현지 기업들과의 협력 없이 홍보나 외형 확장에 문제가 있지 않겠는가?”

강우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이제는 간단한 판단조차 못 내릴 만큼 이태건은 당황한 상태였다.

-어지간한 현지 기업보다 저희 법인인 광복과 손을 잡는 게 좋을 겁니다. 그리고 홍보는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 법인이 보유한 검색 사이트는 현재 중국 검색엔진 시장 이용률의 80%를 장악하고 있으니까요.-

이태건이 헛숨을 들이 삼켰다. 들으면 들을수록 중국 법인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SJ 그룹은 횃불 앞의 반딧불 수준이었다.

-마지막 자료 보시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강우가 중국에서 준비하고 있는 거대 프로젝트의 자료가 떠올랐다.

-현재, 중국의 대형할인점 시장은 엄청난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국내의 모 대기업도 중국 상하이에 진출한 후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강우가 미래 기억을 떠올렸다. 지금 성공적으로 진출한 국산 대형할인점 브랜드는 미래에 엄청난 실패를 맛보고 중국 시장에서 전격 철수한다. 그 실패 요인은 몇몇 이유가 있었다.

-저희 중국 현지 법인 광복은 새로운 대형할인점 브랜드를 런칭 준비 중입니다. 이 대형할인점에 SJ 푸드빌의 제품들이 우선하여 공급될 예정입니다.-

강우가 말을 멈췄다. 더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 모두 공개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 공개한 것들만 해도 충분했다. 만족한 듯 환하게 웃고 있는 송진태 회장의 얼굴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그럼 혹시 이의나 질문 있으신 분 있으십니까?-

강우의 말에 회의실 안에 깊은 침묵이 흘렀다. 강우가 최 비서를 힐끗 바라보았다. 최 비서가 양손의 엄지를 ‘척’ 하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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