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6화 (296/402)

여기가 내 집 같긴 해.

사라락. 사라락.

깊은 정적이 흐르는 서재 안으로 서류 넘어가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송진태 회장은 강우가 건네준 사업 계획서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으음….”

송진태 회장이 놀라움에 침음성을 흘렸다. 강우가 내민 사업 계획서에는 SJ 그룹 내 식품 사업부와의 중국진출에 대한 계획이 담겨있었다. SJ 그룹은 문화 산업은 물론이고 식품 사업부에도 강점이 있었다. 대진 그룹에게 문화 사업 분야에서 밀리자 SJ 그룹은 식품 사업부 쪽으로 돌파구를 찾고 있었다.

‘그 돌파구는 중국이었는데….’

SJ 그룹 산하에 가지고 있는 많은 식품 프랜차이즈들이 있었다. 한국에서 거둔 성공으로 중국진출 역시 성공적일 거로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과는 차원이 다른 인구수를 가진 중국. 얼마나 매력적인 시장이던가. 그룹 내 중국 해외 진출을 기획하고 있는 전략본부실도 장밋빛 전망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강우가 내민 사업 계획서는 기존의 계획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었다.

“지금 SJ 그룹에서는 중국 시장에 진출하는 방식으로 마스터 프랜차이즈 형식을 고려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허허….”

송진태 회장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년 하반기 중국 시장 진출을 목적으로 열심히 준비 중인 내용이었다. 그런데 강우가 단번에 그 사실을 꿰뚫어 본 것이다.

“중국진출 건은 어떻게 알고 있는 게냐? 경호가 말해주더냐? 아니면 경식이?”

“아닙니다. 제가 추측해본 겁니다. SJ 그룹 식품 사업부가 요즘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니까요.”

강우는 미래 기억으로 SJ 그룹의 중국진출이 어찌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SJ 그룹은 내년 하반기를 목표로 준비 중이지만, 결국 몇 년 후인 2005년쯤 중국 시장에 진출하게 된다. 그리고 현지화에 실패하고 매년 적자를 기록하게 된다.

“허…. 이것 참 난감하구만…. 그룹 사업 계획이 이리 노출되어 있다니.”

송진태 회장의 표정은 말과는 달리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강우의 능력이 뛰어남이 오히려 기쁘고 좋았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회장님, 중국을 다른 해외 시장과 같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마스터 프랜차이즈 방식으로는 품질관리 및 매장관리 그리고 브랜드 이미지 관리를 할 수 없습니다.”

MF(마스터 프랜차이즈).

이 방식은 프랜차이즈 사업 유형 중 하나로 중간가맹사업자가 가맹희망자에게 가맹점 운영권을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할 수 있었다. 중간가맹사업자는 가맹사업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가맹사업자를 상대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즉 중간가맹사업자가 가맹사업자에게 라이선싱을 부여하는 현지 업체에 중간 관리를 맡기는 형식이지.’

보통 기업들이 해외 시장에 진출할 때 현지화 방법으로 많이들 선택하는 방법이었다. 미래 기억 속 SJ 그룹은 고액의 수수료를 받는 이 방식으로 중국에 진출했다. 그리고 매년 쌓여가는 적자에 중국 시장에서 철수하기에 이른다.

“음….”

송진태 회장이 침음성을 흘렸다. 강우의 분석을 듣고 있으니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넓은 땅덩어리만큼 중국 시장은 자리를 잡기 힘든 곳이었다. 특히 근래 들어서는 외국 기업들에 예전만큼의 사업적 이점을 주는 정책도 사라진 상태였다. 중국은 내부적으로 충분히 경제 성장을 이루었고, 이제는 자국 기업을 육성하는데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SJ 그룹의 중국 시장 진출은 저희 동양 무역에서 맡아 보겠습니다.”

강우의 발언에 송진태 회장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의 능력이야 두말할 것 없이 뛰어났다. 하지만 동양 무역의 규모를 알고 있는 송진태 회장이었다. 중견기업 이상의 자금력과 역량이 있었지만, SJ 그룹과는 아직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송진태 회장의 생각은, 틀린 것이었다.

“저희 동양 무역이 중국 현지에 법인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음…. 얼핏 듣기는 했다.”

중국에 있는 법인 ‘광복’은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송진태 회장도 규모가 크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강우가 씩 웃으며 서재 서랍에서 다른 서류를 하나 꺼내 들었다.

“한번 확인해 보세요.”

송진태 회장이 살짝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받았다. 또 어떤 엄청난 내용이 있을지 궁금했다. 그리고 이내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맙소사….”

서류를 넘길수록 경악은 더욱더 짙어졌다. 중국에 있는 법인 광복의 규모는 상상 이상이었다. 중국에 있는 현지 법인의 자금력은 차고도 넘치는 상황이었다. 중국 법인이 중국 내에서 벌이고 있는 다양한 사업들 모두가 대박이 터졌기 때문이었다.

“SJ 그룹 식품 사업부의 중국진출은 중국 현지 법인 광복에서 담당하겠습니다.”

“조건은?”

송진태 회장의 눈빛이 돌변했다. 맨손으로 시작해 대기업 회장의 자리까지 오른 사업가적 기질이 발동한 것이다. 강우는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첫 번째 조건은 중국 내 모든 사업 권한은 저희 법인에 일임하시는 겁니다.”

“으음….”

송진태 회장이 침음성을 흘렸다. 하지만 이내 속으로는 수긍했다. 중국 현지에 강력한 인프라를 가진 법인 광복이었다. 애초에 마스터 프랜차이즈 방식을 택한 것도 현지에 인프라 구축을 하는 비용과 시간을 절감하기 위해서였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할 판이었다.

“좋아. 대신 우리 쪽에서도 내부 회의를 걸쳐 자세한 조건을 검토해보고 결정하자꾸나.”

강우가 씩 웃었다. 분명 송진태 회장은 강우에게 많은 양보를 할 것이었다. 어느새 부드럽게 웃고 있는 표정이 그 사실을 말해주었다.

“내부 회의 때 꼭 이 말을 전해주셔야 합니다. 중국 시장의 인구수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질보다 양을 우선시하는 사업 방식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중국 사람들에게 한국산 제품은 특별하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차별화 전략으로 간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습니다.”

미래의 기억이 말해주었다. 중국 사람들은 자국의 음식 사업을 신뢰하지 않았다. 중국 식품 사업을 하는 업체들이 위생적이지 못하고 심지어 가짜 재료를 이용해 음식을 만드는 경우도 허다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중국의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은 한국 식품을 선호했다.

‘물도 수입해 먹을 정도였으니까 말이지.’

강우는 시작부터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파고들 생각이었다. 그렇게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고 나면 거대한 중국 시장에 뿌리내리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중국 시장을 천천히 장악해나갈 수 있었다.

“허허…. 오늘 저녁을 얻어먹으러 가벼운 마음으로 왔는데 이리 좋은 선물을 받고 가는구나. 이거 내가 강우 너를 돕겠다는 말이 무색해질 정도야.”

송진태 회장이 진심으로 감탄했다. 강우의 사업적 능력을 처음 겪어보니 정말 대단했다. 과연 강우를 얻은 대진 그룹이 여의주를 물고 용이 되어 승천할만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러운 마음이 마구 솟아올랐다.

“사장님도 사업적 감각이 참 뛰어나신 분이었지. 정말 대단한 분이셨어. 강우 네가 그분의 핏줄인 게 확실하구나.”

이어지는 칭찬에 강우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송진태 회장이 슬쩍 강우에게 물었다.

“대진 그룹에서 우리 그룹으로 이직할 생각은 없더냐?”

“진심이신가요?”

강우가 씩 웃으며 되물었다. 송진태 회장이 껄껄 웃었다.

“농담이지. 농담. 강우 너를 빼 오려고 했다가 저기 앞집 사는 양반이 나를 죽이려고 들걸?”

송진태 회장은 강우 가족의 집에 오가며 이철금 회장과도 여러 번 자리를 같이했다. 사업적 동맹을 맺은 두 그룹의 회장은 금세 친분을 나누고 친해진 상태였다.

“그럼, 오늘 제안은 잘 검토해 주세요.”

“알겠다.”

송진태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한번 손에 들린 두 서류를 바라보았다. 젊었을 적 SJ 그룹을 일으키던 때의 설렘이 다시 일어났다. 강우와 함께라면 SJ 그룹이 한 번 더 성장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사장님, 이렇게 또 사장님의 가문에 은혜를 입게 되는군요. 감사합니다.’

송진태 회장이 강우의 증조할아버지에게 속으로 감사함을 표했다. 그리고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강우야, 사장님의 산소가 고향에 있다고 했지?”

“네.”

송진태 회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 언제 한번 시간을 내서 다녀오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을까?”

“당연하죠. 증조할아버지께서도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강우의 말에 송진태 회장이 밝게 웃었다.

* * *

다음 날 아침. 한남동 저택 앞에 고급 세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대문이 열리고 강우와 아버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 기사님, 좋은 아침입니다.”

아버지가 정 기사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정 기사도 아버지를 보며 반가워했다.

“네, 사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강우도 정 기사와 인사를 주고받았다. 강우와 아버지는 뒷좌석에 나란히 나누어 탔다. 정 기사가 운전석에 탔다.

“오늘은 동양 무역으로 향하겠습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미리 언질 받은 대로 정 기사는 동양 무역이 있는 명동으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최 비서는 본사에서 대기하라고 강우가 말해 놓은 상태였다.

“아버지, 이제 해외 사업부 인원을 더 늘려야겠어요.”

“그래야겠지. 내가 황 부장에게 인원 충원을 지시하마.”

아버지 역시 어제 송진태 회장과 강우가 나눈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SJ 그룹과의 합작으로 중국 시장에 진출하는 것은 강우와 아버지가 한동안 의논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사무실에 여유 공간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동양 무역은 그동안 착실히 사업 영역을 넓혀왔다. 일본과 국내 그리고 중국과 동남아 시장을 공략하며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에 따라 직원의 숫자 역시 많이 늘어난 상태였다.

“신사옥이 건설에 들어갔으니까 당분간은 참아 봐야지.”

“일단 휴게실을 임시 사무실로 꾸며서 써야겠네요.”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했다. 현재 동양 무역의 신사옥 건물이 지어지고 있었다. 역시나 수주를 맡은 건설업체는 대진 건설이었다. 강우와 인연이 있다고 특혜를 준 것은 아니었다. 정당한 입찰 과정을 거쳐 뽑힌 것이었다.

‘물론, 특별히 신경을 써주겠다고 했지만.’

현재 대진 건설은 다시 이재중에게 경영을 맡긴 상황이었다. 한동안 강우와 이재원을 도와 업무능력을 키운 이재중은 이제 제법 경영자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이윽고 고급 세단이 동양 무역이 있는 명동에 도착했다. 강우와 아버지가 차에서 내렸다.

“오늘은 본사 들어갈 일은 없을 거 같네요. 바로 퇴근하세요.”

“감사합니다. 부사장님.”

바로 퇴근을 하라는 강우의 말에 정 기사가 밝게 웃었다. 일이 없어도 대기하라는 다른 임직원들과 달리 강우는 종종 이렇게 일찍 퇴근을 시켜주고는 했다. 그리고 차를 쓸 일이 없다고 하면 정말 그날은 한 번도 호출한 적이 없었다.

부우웅.

고급 세단이 떠나고 강우와 아버지가 동양 무역으로 들어갔다.

딸랑.

사무실 문이 열리고 강우와 아버지가 들어섰다. 이른 아침 출근 시간부터 동양 무역 사무실은 전쟁터였다. 곳곳에서 온갖 종류의 외국어가 들려오고, 직원들은 서류 뭉치를 들고 바쁘게 오고 갔다. 그 모습을 보며 강우가 씩 웃었다.

‘역시…. 여기가 내 집 같긴 해.’

대진 그룹과 비교해 작은 사무실이었지만, 강우 가족의 모든 것이 담겨있는 공간이었다. 강우가 대진 그룹과 SJ 그룹의 일로 한동안 자리를 비웠지만, 아버지와 마사토 그리고 직원들이 부지런히 키워온 곳이었다.

‘이제 동양 무역을 더 크게 키워야겠지.’

강우가 눈을 빛내며 의지를 다졌다. 이제 문화 산업의 세계화 기초를 완벽히 다져 놓았다. 이제 문화 산업과 함께 한국의 음식을 세계에 알리고자 했다.

‘문화와 그 나라의 음식은 따로 놓을 수 없는 관계니까.’

한 나라의 문화가 알려지면 그에 따라 그 나라의 음식에도 관심이 쏠린다. 강우는 문화 산업의 세계화에 발맞추어 한국 음식도 세계에 알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 첨병에 동양 무역이 자리할 수 있게 할 생각이었다.

‘이제 한동안 동양 무역에 집중한다.’

강우가 눈을 빛내며 의지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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