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5화 (295/402)
  • 참 보기 좋다. 그렇지?

    강우가 거실 창가에 서있었다. 한 손에 들린 컵에서는 뜨거운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후루룩.

    강우가 컵을 들어 따듯한 쌍화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막내 할아버지가 집에 오신 이후 늘 집에는 쌍화차가 있었다. 더군다나 날씨까지 추워지니 쌍화탕은 가족들 모두에게 인기였다. 거실 밖으로 보이는 넓은 정원에는 하얀 눈이 쌓여있었다.

    시간은 항상 그렇듯 행복한 순간에는 빛살처럼 빨리 흐르고는 했다. 강우가 쌍화차를 다 마셨다. 그리고 거실의 한쪽 정원이 훤히 보이게 설계된 유리창으로 다가갔다.

    드르륵.

    강우가 창문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밀려들어 와 강우의 얼굴을 강하게 할퀴고 지나갔다. 몸 안에 들어간 쌍화차의 따듯함 덕분일까 강우는 그리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강우가 정원을 두리번거렸다. 하얗게 내린 눈 위로 몇 개의 발자국이 있었다.

    “강용아! 감기 걸린다! 빨리 들어와!”

    강우가 정원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정원의 어디서인가 강우의 목소리를 반기는 소리가 있었다.

    멍! 멍!

    멀리서 거대한 강아지가 눈을 밟으며 달려왔다. 금색의 털을 자랑하는 강아지의 종은 골든레트리버였다. 그 뒤로는 강용이가 웃음을 터트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루피야! 루피야!”

    루피의 이름을 계속해서 불렀지만, 루피는 멈추지 않았다. 눈 위를 미친 듯이 달린 루피가 창가로 다가와 강우에게로 훌쩍 뛰어올랐다.

    “어어어! 루피야!”

    강우가 화들짝 놀라 루피를 향해 손을 뻗었다. 묵직한 무게가 느껴지고 루피의 몸에 묻어있던 눈이 창문을 타고 거실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멍! 멍!

    루피는 뭐가 그리 좋은지 꼬리를 흔들며 강우의 얼굴을 마구 핥아주었다. 강우가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뒤로 뺐다.

    “야야! 간지러워.”

    강우가 루피를 다시 정원으로 내려놓았다. 루피가 깡충깡충 뛰며 좋아 어쩔 줄을 몰랐다.

    “뭐야! 루피는 형아만 좋아해!”

    강용이가 루피에게 삐진 듯 양 볼을 부풀렸다. 그런 강용이의 투정을 들었는지 루피가 몸을 돌려 강용이를 덮쳤다. 커다란 골든레트리버의 무게에 강용이가 버티지 못하고 털썩 엉덩방아를 찧었다. 강우가 픽하고 웃으며 물었다.

    “강용아, 괜찮아?”

    “어어, 눈 때문에 하나도 안 아파.”

    강용이가 몸 위에 있는 루피를 끙끙대며 밀어냈다. 루피는 또 잔뜩 신이 나서는 정원을 뛰어다녔다. 강우가 강용이를 보며 말했다.

    “빨리 들어와 엄마가 감기 걸린다고 그만 놀래.”

    “어? 아직 눈사람 못 만들었단 말이야.”

    강용이가 강우를 보며 ‘제발!’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동생 바보 강우가 그런 표정을 보고 냉혹해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강우가 씩 웃었다.

    “그래, 그러면 형아랑 빨리 만들고 들어오자.”

    “아싸!”

    강우가 겉옷을 챙겨입고 정원으로 나갔다. 본격적인 겨울을 맞이한 12월의 날씨는 몸이 움츠러든 만큼 추웠다. 강우가 챙겨나온 장갑을 손에 꼈다. 강용이는 벌써 작은 눈 뭉치를 열심히 굴리고 있었다. 강우가 쓱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참 빠르네.’

    한남동 저택으로 이사를 온 지도 벌써 수개월이 흘렀다. 그동안 강우 가족은 저택에 모여 사는 생활에 완벽하게 적응했다. 강우 가족은 모두 모여 살며 행복하고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여름 강우 가족에게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루피, 이리 와.”

    강우의 말을 들은 루피가 후다닥 달려와 강우에게 안겼다. 강우가 루피의 털을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루피는 강용이가 입양한 새 가족이었다. 공모전에 당선된 강용이는 그 상금을 모두 부모님께 드렸다. 강우는 그런 강용이가 기특해서 선물을 사준다고 했다. 한참이나 고민하던 강용이는 ‘그럼 나 동생이 갖고 싶어요.’라는 폭탄 발언을 했었다.

    ‘아버지랑 어머니 얼굴이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터질 듯 붉어졌었지.’

    강우가 그때 기억을 떠올리며 픽 웃었다. 하지만 강용이가 원한 것은 진짜 동생이 아니었다. 강용이는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미래 기억 속에서도 강용이는 참 동물을 좋아했다. 그렇게 새롭게 맞이한 강우 가족의 일원이 바로 루피였다.

    멍! 멍!

    루피가 강우의 상념을 깨웠다. 강우가 강용이에게 합류해 눈사람을 만들었다. 강우가 나서자 눈사람의 크기가 엄청나게 커졌다.

    “우와! 대박.”

    강우만 한 눈사람의 크기에 강용이가 감탄을 터트렸다. 그리고 순간, 감성에 젖었다.

    “형아, 눈돌이 생각난다.”

    “눈돌이?”

    눈돌이는 장미 여관에서 만들었던 강용이의 눈사람이었다.

    “응, 눈돌이. 이제는 하늘나라에서 잘살고 있겠지.”

    강우가 강용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난 공모전 이후로 강용이는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걷고 있었다. 학업에 대한 부담감을 던 강용이는 나날이 성장하고 있었다. 요즘은 강용이가 이렇게 감성적인 아이였나 싶을 때도 있었다.

    ‘미래 기억 속 강용이는 조금 까칠한 아이였는데 말이지.’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미래 기억 속 강용이는 신장 문제로 늘 제한받는 삶을 살아야 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건강한 강용이었다. 강우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강용이의 앞날을 서포터 해줄 생각이었다.

    “강 작가님한테 배우는 건 재밌어?”

    “응, 선생님이 나 정말 재능있다고 칭찬 많이 해주셔.”

    대진 엔터 소속 강 작가와 강용이의 인연은 벌써 수개월을 이어오고 있었다. 맨 처음 중학생을 가르쳐 달라는 말에 난색을 보였던 강 작가였다. 하지만 강용이가 쓴 대본을 보고는 호기심을 드러냈다.

    “강 작가님한테 잘 배워. 진짜 유명한 분이야.”

    “응, 열심히 배우고 있어.”

    강우가 강용이를 쓰다듬어 주었다.

    멍! 멍!

    루피가 그런 두 형제의 틈을 파고들며 애교를 부렸다. 강우와 강용이가 루피를 쓰다듬어 주었다.

    “인제 그만 들어가자. 곧 손님들 오시겠다.”

    “응.”

    강우와 강용이가 집으로 들어갔다. 따듯한 집 안의 공기가 얼었던 두 사람의 몸을 녹여주었다.

    멍! 멍!

    물론 강우 가족의 새로운 막둥이 루피도 함께였다.

    “형아, 나 루피 씻기고 나올게!”

    “그래.”

    강용이가 루피를 데리고 욕실로 향했다. 강용이는 루피와 함께 목욕하는 것을 참 좋아했다. 루피 역시 강용이와의 물놀이가 좋았나 보다. 욕실로 들어가는 강용이의 뒤를 따라 들어가며 꼬리를 마구 흔들었다.

    “들어왔니?”

    주방에서 어머니가 나오셨다. 익숙하게 앞치마를 두른 모습이었다. 저택으로 이사 오며 강우는 도우미 아주머니를 쓰자고 했었다. 집이 넓어졌기 때문에 혼자서 집을 관리하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처음 어머니는 강하게 반대를 하셨다. 가족이 사는 집은 혼자 가꾸고 싶다고 하셨다. 결국, 강우는 청소 도우미만 일주일에 두 번씩 부르는 것으로 어머니를 설득했다.

    “네, 요리하고 계셨어요?”

    “응, 송 회장님이 엄마가 만든 요리를 그렇게 좋아하시잖니. 특히 토란국.”

    지금처럼 가족을 위한 요리는 여전히 어머니의 몫이었다. 어머니는 요리하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오늘은 송진태 회장과 아내가 집으로 방문하기로 한 날이었다. 강우 가족이 한남동으로 이사를 한 이후 송진태 회장은 강우 가족의 집에 놀러 오는 것을 낙으로 삼을 정도였다. 송진태 회장의 저택 역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강우가 특별한 이유로 송진태 회장을 기다리고도 있었다.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큰어머니는 오늘 사단법인 광복의 배식 행사로 나가신 상태였다. 주방에 가득한 음식 재료들 사이에서 어머니는 혼자 요리 중이셨다. 물론, 어머니의 손에 걸렸으니 순식간에 맛있는 음식으로 변할 테지만 말이다.

    “그래 줄래? 그러면 더 금세 끝나겠다.”

    “네.”

    강우가 어머니를 도와 음식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샤워를 마친 강용이와 루피가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주방 입구로 슬쩍 다가왔다.

    “루피야, 참 보기 좋다. 그렇지?”

    강용이의 물음에 루피가 작게 ‘멍멍’하고 대답했다. 강용이가 루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고~ 들릴까 봐 작게 말한 거야? 역시 내 동생 똑똑해.”

    루피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렇게 강용이와 루피가 강우와 어머니가 나란히 서서 요리하는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리고 집 안으로 구수한 음식 냄새가 점점 가득 차올랐다.

    * * *

    딩동. 딩동.

    초저녁쯤 되자 벨이 울렸다. 거실에 앉아있던 강용이가 벌떡 일어나 인터폰으로 달려갔다. 그 뒤를 새로운 초인종 담당 루피가 따랐다.

    멍! 멍!

    인터폰을 확인한 강용이가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

    “엄마! 형아! 오셨어!”

    강용이가 인터폰에 달린 대문 열림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현관을 벗어나 밖으로 나갔다. 루피도 이에 질세라 뒤를 따라 나갔다. 이윽고 현관문 밖이 시끌시끌해졌다.

    “안녕하세요. 회장 할아버지!”

    “어이쿠~ 강용아.”

    밖에서 송진태 회장의 너털웃음이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오늘 더 젊어 보이세요.”

    “아이고 인석아.”

    송진태 회장 부인의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루피도 두 사람을 반기는지 기분이 좋게 짖어댔다. 이윽고 주방에서 앞치마를 두른 강우가 현관으로 마중을 나왔다. 현관으로 들어서던 송진태 회장이 강우를 보고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강우야, 앞치마가 아주 잘 어울리는구나?”

    “네? 아….”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송진태 회장이 강우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래, 사업에 바빠도 이렇게 가정적인 모습을 보니 참 좋구나. 나는 젊어서 기업을 일구느라 이런 적이 없었어.”

    “그래도, 이렇게 일가를 이루셨으니 정말 대단하신 거예요.”

    송진태 회장이 부드럽게 웃었다. 정말 이상하게도 강우의 말에는 늘 위로를 주는 힘이 있었다. 강우가 이번에는 송진태 회장의 부인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할머니, 오셨어요.”

    “그래, 강우 잘 지냈지?”

    송진태 회장의 부인 김정숙은 강우가 기억에서 보았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이제는 나이가 지긋이 들어 다른 모습이었지만, 강우는 느낄 수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참 부드러운 심성의 소유자였다.

    “네, 밖이 추워요. 안으로 들어오세요.”

    송진태 회장과 김정숙이 거실 안으로 들어왔다. 주방에는 이미 근사한 한상차림이 완성되어 있었다. 어느새 앞치마를 푸르고 옷도 깔끔히 갈아입은 어머니가 주방에서 나왔다.

    “회장님, 사모님, 안녕하세요. 식사 준비됐어요.”

    송진태 회장이 군침을 삼켰다. 재벌 회장이 되면서 별미라는 별미는 다 먹어보았다. 자신이 사는 저택에 일류 요리사는 물론이고 손맛 좋다는 주방 도우미들도 고용해 보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식탁에 차려진 음식 맛만은 못했다.

    “고맙네. 강우 엄마.”

    “매일 이렇게 와서 얻어만 먹고 미안해서 어떡해요.”

    김정숙도 미안함이 담긴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가 싱긋 웃었다.

    “아니에요. 회장님께서 저희 챙겨 주시는 게 얼마나 많은데요.”

    어머니의 말대로 송진태 회장은 강우 가족을 정말 많이 챙겼다. SJ 그룹이 운영하는 프랜차이즈는 전부 공짜로 이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식품 사업부에 이야기해 늘 싱싱한 음식 재료들도 보내주었다. 그렇게 큰 거부터 작은 것까지 정말 세세하게 강우 가족을 챙겼다.

    “형님, 오셨습니까?”

    본채 일 층의 가장 큰 방에서 할아버지가 나오셨다. 송진태 회장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웃었다.

    “재봉아, 오늘도 밥 얻어먹으러 왔다. 이러다가 여기서 눌러살게 되는 거 아닌지 몰라?”

    “형님, 농담이시죠?”

    할아버지와 송진태 회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막내 할아버지도 나오셨다.

    “형님, 오셨습니까?”

    “그래, 막내야.”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 그리고 송진태 회장은 오래된 형제처럼 친해진 상태였다. 세 분이 식탁에 자리 잡고 앉았다.

    “아…. 오늘도 토란국이구나.”

    식탁에 앉은 송진태 회장이 탄성을 뱉어냈다. 힘들고 배고프던 그 시절. 자신을 아껴준 은인의 사모님이 해주시던 바로 그 국이었다. 송진태 회장이 수저를 들어 토란국을 한 입 먹었다. 그리고 깊은 침음성을 뱉어냈다. 세월이 흘러 지나가 버린 젊은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는 그런 맛이었다.

    “강우 엄마, 정말 잘 먹었어.”

    식사가 끝나고 송진태 회장의 얼굴에는 만족감이 가득했다. 어머니가 싱긋 웃었다.

    “자주 오세요. 매일 만들어 드릴게요.”

    “허허…. 이러면 정말 매일 오고 싶어지는데.”

    식사를 마친 강우와 송진태 회장은 자리를 옮겼다. 서재로 쓰이고 있는 방이었다.

    “그래, 오늘 나한테 제안할 게 있다고 했지?”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재의 한쪽 서랍에서 두툼한 서류 파일을 꺼냈다. 강우가 서류 파일을 송진태 회장에게 내밀었다.

    -동양 무역과 SJ 그룹의 중국 식품 시장 진출 협력 계획서.-

    겉면에 적힌 제목을 확인한 송진태 회장이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지난여름 강우가 슬쩍 언급했던 중국 시장 진출 건에 대한 사업 계획서가 완성된 것이다.

    “오…. 이게 바로 네가 말했던….”

    “네, 회장님.”

    송진태 회장이 서류 내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윽고 서류를 모두 검토한 송진태 회장이 강우를 보며 감탄성을 뱉어냈다.

    “정말 너는 사장님께서 보내주신 우리 그룹의 구세주가 분명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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