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자는 만나신 겁니까?
대진 엔터 신사옥 회의실에 무거운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상석에 앉아있는 강우는 한 권의 대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방송국 쪽에서는 원작자를 찾아야 한다는 의견인 거죠?”
강우의 질문에 김성현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래도 부사장님의 개인사가 담긴 이야기이다 보니….”
“그 당사자인 제가 괜찮다고 하는데도요?”
“그렇긴 하지만 혹시 나중에 생길 잡음을 없애기 위해서 꼭 원작자를 찾았으면 한다고 합니다.”
강우가 짧게 침음성을 흘렸다. 강우가 선택한 가족 드라마는 현재 대진 엔터에서 판권을 사들인 상태였다. 강우가 이 드라마는 꼭 대진 엔터에서 제작하고 싶다고 해서였다. 제작사도 강우의 요청에 흔쾌히 판권을 내주었다. 물론, 적절한 대가를 지급했지만 말이다.
“음…. 곤란하네요. 벌써 오디션 일정도 잡아 놓았죠?”
“네, 더군다나 우리 회사에서 드라마 제작을 한다고 하니 유명 배우들이 오디션을 보겠다고 앞다투어 지원한 상황입니다.”
강우가 턱을 쓰다듬었다. 대진 엔터가 신사옥으로 독립하고 첫 번째 드라마 제작이었다. 그리고 대진 엔터의 주력 배우인 이나은과 한승규를 비롯해 김춘배와 권창식까지 출연하기로 해 스케줄을 맞춰놓은 상태였다.
“일단 가능한 방법을 찾아보죠. 제작사에 다시 연락해서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보는 겁니다.”
“네, 제가 이미 연락해서 단서가 될만한 것들을 받아 놓았습니다.”
김성현 부장의 일 처리는 역시 깔끔했다. 김성현 부장이 한 장의 메모지를 내밀었다. 강우가 메모지에 적힌 내용을 바라보았다.
“일단 발송된 날짜는 지난달이군요. 발송된 우체국은….”
강우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메모지에 적힌 발송 우체국은 바로 서울 현대아파트 우체국이었다. 강우가 살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혹시…. 제작사에서 원본을 받으셨습니까?”
“네, 받았습니다. 잠시만….”
김성현 부장이 회의실에 있는 인터폰을 들었다.
“어, 김성현 부장이야. 얼마 전에 받은 가족애 드라마 대본 있지? 어어. 그것 좀 회의실로 부탁해.”
이윽고 회의실 문이 열리고 채보라가 나타났다. 강우를 보고는 인사를 했다. 강우도 손을 들어 인사를 받아주었다. 회의실 안에 있던 직원들이 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 있습니다.”
김성현 부장이 강우에게 원고 뭉치를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공모전을 주최한 제작사에 보내진 원고 원본이었다. 강우가 원본의 첫 장을 보고는 입을 멍하니 벌렸다.
‘잠깐만…. 이 글씨체는….’
강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원고를 넘기기 시작했다. 한 장 한 장 원고가 넘어갈수록 강우가 피식피식 웃었다. 그런 강우의 모습에 김성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부사장님, 원고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김성현 부장은 조심스러웠다. 사실 드라마의 내용이 강우 가족사였으니 제작을 하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혹여 드라마를 잘못 만들어 강우에게 피해를 줄까 봐 걱정이었다.
“아닙니다. 이거 드라마 대본은 수정을 거친 거죠?”
“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각색이 조금 필요했으니까요.”
강우가 씩 웃었다.
“원작자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면 찾으면 되겠죠. 그리고 아마도 지금 찾은 거 같네요.”
김성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회의실 안의 직원들도 영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잠시만 전화 한 통만 하고 오겠습니다.”
강우가 회의실을 벗어나 한적한 휴게실로 향했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거침없이 단축번호 2번을 눌렀다.
뚜르르. 뚜르르.
몇 번의 신호가 가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형.-
강우가 픽 웃었다. 형이라고 하는 걸 보니 누구랑 같이 있는지도 단숨에 알 거 같았다.
“이야~ 이게 누구야? 드라마 대본도 술술 쓰시는 우리 동생님이시네?”
핸드폰 너머로 잠시 정적이 흘렀다.
* * *
강용이와 이진아가 근처의 공원을 걷고 있었다. 강용이는 조금 불안한 듯 안절부절못하였다.
“으아~ 어떡하냐. 형한테 혼나는 건 아니겠지?”
잔뜩 불안해하는 강용이를 보며 이진아가 싱긋 웃었다.
“왜 혼나? 강용이 네가 보낸 원고가 공모전 당선됐다며? 강우 오빠가 칭찬해 주겠지.”
“그래, 형은 몰라도 엄마한테 혼날 거 같아. 요즘 그렇지 않아도 공부 안 한다고 뭐라고 하셨었거든.”
“이사하면서 학원 옮기는 중이라며. 괜찮을 거야.”
이진아가 계속 강용이를 안심시켰다.
“그나저나 강용이 너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그 많은 어른을 제치고 당선될 수가 있지? 아니지 내가 읽어봤을 때 재미는 있었어.”
강용이는 강우가 알고 있는 미래의 기억대로 영화 제작에 관심이 많았다. 공부하는 틈틈이 영화와 관련된 서적들을 읽을 정도였다. 그리고 인터넷에 나오는 영화, 드라마 대본 작성법을 익혀 공모전에 응모했었다. 물론, 이렇게 당선까지 될 줄 몰랐지만 말이다.
“그래? 나도 놀랐어.”
강용이가 멋쩍게 웃었다.
“그나저나 강우 오빠는 언제쯤 오신대?”
괜히 설레하는 이진아의 모습에 강용이가 미간을 좁혔다.
“진아야, 너 집에 안 가도 돼?”
“집에 갑자기?”
이진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박강용.”
공원의 한쪽에서 강우가 나타났다. 이진아가 벌떡 일어났다.
“오빠! 안녕하세요!”
“어, 진아구나. 안녕.”
강우가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이진아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속으로 ‘자식 여자친구 앞이라고 무게 좀 잡았네.’라고 생각했다.
“형….”
강용이가 살짝 움찔했다. 강우가 씩 웃었다.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던 강우가 아차 하며 손을 내렸다. 그리고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여자친구 앞이니 체면 좀 살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너 언제 이런 걸 다 준비한 거야?”
강우의 손에는 강용이가 응모한 원고가 들려있었다. 강용이가 원고를 보고는 ‘역시 들켰군.’이라고 중얼거렸다.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아니 강용아, 이렇게 잘 쓴 원고를 왜 신원미상으로 발송한 거야?”
“아니, 나는 그냥 연습 삼아서 보낸 거거든. 혹시 내가 보낸 거 알면 공부 안 한다고 뭐라고 할까 봐….”
강용이가 머리를 긁적였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너 이거 이번에 공모전 당선돼서 드라마 제작되는 거 알아?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도 알아?”
“그렇게 대단한 거야?”
강우가 픽 웃었다. 중학생인 강용이는 아직 애는 애였다.
“그럼 대단하지. 무려 공모전 당선인데. 너 이거 상금도 있다?”
“맞다! 상금!”
강용이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소리쳤다. 이진아도 상금이라는 소리에 탄성을 뱉어냈다. 강우가 강용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래 기억 속에서도 강용이는 영화나 드라마 시나리오를 짜고 대본을 만드는데 엄청난 재능이 있었다.
‘몸이 좋지 않아 영화감독의 꿈은 접었고, 나중에는 결국 웹 소설 작가로 데뷔했었지.’
웹 소설 작가로도 매우 크게 성공했던 강용이였다. 강용이가 웹 소설 작가로 성공하며 강우 가족의 삶이 많이 좋아졌던 기억이 있었다. 역시 현재가 바뀌었어도 강용이가 가진 재능은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건강한 몸 덕분에 더욱 빛을 발할 수도 있었다.
“대단하다. 우리 동생. 중학생이 영화, 드라마 시나리오 공모전에 당선되다니. 가족들이 이 소식 들으면 엄청 좋아하겠다.”
“진짜? 나 공부 안 하고 딴 거 했다고 안 혼나?”
강우가 참지 못하고 강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강용이도 이번에는 순순히 강우의 손길을 허락했다.
“혼나기는 대단하다고 칭찬받지. 엄마랑 아버지도 특히 더 좋아하실걸?”
“와…. 난 그것도 모르고. 원고도 몰래몰래 쓰고, 우체국 갈 때는 막 길도 돌아서 가고. 아까 형한테 전화 왔을 때는 잔뜩 겁먹었다고.”
강용이가 넋두리를 늘어놓듯이 말했다. 강우가 말없이 웃어주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어쩌면 너무 이르다는 생각에 강용이의 재능을 썩히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네….’
강우가 이제라도 강용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내 입을 열었다.
“일단 이거 대진 엔터에서 드라마 대본 각색한 거야.”
강우가 각색된 대본을 강용이에게 내밀었다. 강용이가 대본의 겉표지를 보더니 중얼거렸다.
“지은이 신원미상….”
강우가 말했다.
“내용 확인해보고 원래 네가 썼던 의도와 다른 부분이 있으면 말해줘.”
“내…. 내가?”
강용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형이 대진 엔터에 있는 작가분들 연결해줄 테니까 정식으로 배우자. 시나리오는 잘 써도 연출법이나 지문 처리 방법 그리고 줄거리 가다듬는 것 같은 거는 배워야 아는 거니까.”
강용이의 원고가 각색된 이유는 강우가 말한 것들 때문이었다. 강용이가 인터넷에서 배우고 원고를 썼다고는 했지만, 이론과 실전은 다른 법이었다.
“정말? 진짜?”
강용이의 얼굴이 점점 상기되어 갔다. 자신이 가장 흥미를 느끼고 있는 분야였다.
“그럼, 이렇게 재능이 있는데 형아가 도와줘야지. 그리고 그동안 몰라봐서 미안했다. 박 작가님.”
“박 작가?”
강용이가 실실 웃기 시작했다. 작가라는 호칭이 어색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좋았다. 그리고 무언가 해냈다는 성취감도 들었다.
“자~ 그럼 이제 원작자분을 찾았으니까. 빨리빨리 검토를 해주셔야 촬영에 들어갑니다. 지금 대배우님들이 대기하고 있어요.”
“으으…. 형아, 갑자기 떨린다.”
강용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제야 실감이 되며 얼마나 엄청난 일이 벌어졌는지 알았다.
“형아, 그러면 나 촬영장에도 가볼 수 있어?”
“그럼 당연하지.”
강용이가 씩 웃었다.
“그 막막 배우분들도 미팅하고?”
“그건 빼자.”
강용이가 시무룩해졌다. 강우가 픽 웃으며 강용이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그런 두 형제의 모습을 이진아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강우 오빠랑 강용이는 참 보기 드문 형제 같아요.”
강우와 강용이가 동시에 이진아를 바라보았다.
“아…. 이거 진아 오랜만에 만나서 너무 우리 이야기만 했네.”
강우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진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강용이가 좋으면 저도 좋아요.”
* * *
그날 저녁. 강우와 강용이가 대진 엔터에 같이 나타났다. 교복을 입고 있는 강용이는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우와~ 여기 진짜 좋다.”
강우가 씩 웃으며 강용이를 엘리베이터로 데리고 갔다. 주변에서 강우를 알아본 직원들이 인사를 해왔다. 그리고 강용이를 알아보았다.
“강용이다.”
“어머, 귀여워.”
아직 중학생인 강용이는 인기 만점이었다. 강용이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대진 엔터에서 제작할 드라마의 원작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타자. 다들 기다려.”
“응, 형아.”
강우와 강용이가 엘리베이터에 탔다. 강용이가 강우를 힐끗 바라보았다. 조금 전 로비를 걸을 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정말 대단했다. 하나같이 강우를 보며 존경과 흠모의 눈빛을 보냈다. 오늘따라 형이 더 멋져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띵.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강우와 강용이가 내렸다. 강우는 곧장 사무실을 가로질러 회의실로 향했다. 몇 시간 전 회의실을 나섰고, 다시 돌아오며 연락을 해 놓은 상태였다. 강우가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부사장님!”
연락을 받고 기다리던 김성현 부장과 이나은과 한승규 그리고 권창식과 김춘배가 있었다. 김성현 부장이 말을 이어갔다.
“원작자는 만나신 겁니까?”
강우가 씩 웃었다. 그리고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소개합니다. 대진 엔터에서 제작할 가칭 가족애의 원작자입니다.”
강우의 뒤쪽에 숨어있던 강용이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가족애 원작자 박강용입니다.”
강용이의 말에 회의실 안으로 경악과 침묵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