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2화 (292/402)
  • 강용이, 다 컸네.

    주말은 늘 그렇듯 번개처럼 지나갔다. 월요일 아침. 한남동 강우 가족의 저택에서 승용차 한 대가 빠져나왔다.

    “어…. 엄마, 조심!”

    조수석에는 교복을 입은 강용이가 손잡이를 꽉 잡은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운전석에는 선글라스를 낀 어머니가 두 손으로 운전대를 부여잡고 있었다.

    “아…. 알았어. 강용아. 너무 그러지 마. 엄마 무서워.”

    “엄마가 운전하는데 무서우면 어떡해.”

    강용이의 얼굴이 한층 창백해졌다. 하지만 어머니는 굴하지 않고 운전을 했다. 승용차는 조심히 조심히 언덕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엄마, 자전거 지나간다 조심해.”

    “어? 으응.”

    느리게 언덕을 내려가는 승용차 옆으로 자전거 몇 대가 지나갔다. 어머니가 움찔하며 옆을 바라보았다.

    “어머? 무슨 자전거를 저렇게 빨리 타니.”

    강용이가 입을 틀어막으며 웃음을 참았다.

    “엄마, 자전거가 빠른 게 아니고 엄마가 느린 거거든요.”

    “그…. 그래?”

    어머니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승용차는 저택 단지를 벗어나 도로 위에 올라탔다. 월요일 출근길인 도로에는 차들이 많았다. 어머니가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본격적인 차량 행렬에 올라탔다. 강용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엄마, 나 지각 안 할 수 있을까?”

    오늘은 강용이가 새 학교에 처음 등교하는 날이었다. 강용이는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중학교로 전학을 했다.

    “아마도?”

    어머니의 불확실에 답에 강용이가 씩 웃었다.

    “엄마, 지각해도 좋으니까 조심히 운전해.”

    “그래, 알겠어.”

    어머니는 운전에 집중하느라 대답도 잘하지 못했다. 이윽고 승용차가 강용이가 전학한 학교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도 지각은 아니었다.

    “휴…. 강용아, 엄마 운전 계속할 수 있을까?”

    “그럼요. 오늘은 처음이나 다름없으니까. 앞으로 점점 더 잘해질 거야.”

    강용이가 어머니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사랑하는 막내아들의 응원에 어머니의 긴장했던 표정이 스르륵 풀렸다.

    “그럼 있다가 학교 끝나고 데리러 올게.”

    “어? 아니야. 나 오늘 약속 있어.”

    어머니가 고개를 갸웃했다.

    “약속?”

    “어어. 그 오늘 친구. 그래 맞아 전에 학교 다니던 친구들 만나기로 했어.”

    “아~ 그랬구나. 알겠어. 학원 안 간다고 너무 늦게 다니지 말고.”

    강용이는 전학을 하며 원래 다니던 학원을 모두 그만둔 상태였다. 새로 이사를 온 한남동 주변에는 학원가가 흔치 않았다. 그런 이유로 어머니는 강용이의 교육을 어찌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다.

    ‘강우 말대로 잘하는 걸 위주로 시켜야 하나….’

    우수한 성적을 거두던 강우와는 달리 강용이는 다른 부분에 재능이 있었다. 글을 쓰는 재능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고민이었다. 지금 시대에는 좋은 학벌은 성공의 보증수표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강우의 생각은 달랐다.

    ‘강용이가 잘하는 쪽으로 밀어주자고 하는데….’

    어머니가 학교로 들어가는 강용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도권 교육을 강요하는 자신이 조금 너무한가 싶었다. 강용이가 교문 안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후…. 조심히.’

    어쨌든 지금 순간은 운전에 집중해야만 했다.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려면 말이다. 어머니는 조심조심 운전해 집으로 돌아왔다.

    지이잉-

    버튼을 누르자 차고 문이 열렸다. 어머니가 올라가는 차고 문을 바라보며 옛 기억을 떠올렸다. 어머니는 어렸을 적에 참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에 못지않은 집에서 살았었다. 학교를 데려다주는 기사도 있었고, 그 시절에 외제 차도 있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 교복은 한 달에 한 번씩 새것으로 맞출 정도였다.

    ‘아버지는 잘 계시려나….’

    어머니가 문득 아버지를 떠올렸다. 어머니의 아버지 즉 강우의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신 지 한참 되셨다. 어머니가 한동안 찾아뵙지 못한 것에 죄송스러움을 느꼈다.

    ‘언제 한번 그이랑 애들 데리고 다녀와야겠어.’

    큰 저택에 이사 오고 나서 문득문득 생각나던 아버지였다. 외할아버지는 어머니를 유난히 예뻐하고 아꼈었다.

    부우웅.

    차고 문이 모두 열렸다. 어머니가 조심조심 차를 주차했다. 그리고 차에서 내려 계단을 통해 정원으로 올라왔다.

    “동서, 왔어?”

    별채에서 큰어머니가 어머니를 발견하고는 반색했다.

    “네 형님, 강용이 학교 데려다주고 왔어요.”

    “그래? 이제 매일 아침 데려다주려고?”

    “아니요. 당분간만요.”

    큰어머니가 어머니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나도 조만간 면허 딸까 봐. 이제 동서랑 자주 놀러 다니게.”

    “좋죠. 면허 따는 거 어렵지 않아요. 바로 학원 등록하세요.”

    큰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했다. 그리고 큰집 식구들의 첫차만큼은 돈을 모아 사겠다고 다짐했다. 강우가 차를 사겠다는 걸 알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으니 당분간 비밀로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동서, 들어가서 차 한잔하자.”

    “네, 형님.”

    큰어머니와 어머니가 큰집 식구들이 머무는 별채로 향했다. 큰집 식구가 머무는 별채는 사실 별채라고 부르기에는 컸다. 거실은 전에 살던 아파트보다 넓었고, 주방도 혼자 쓰기에는 컸다. 총 2층으로 이루어진 별채에는 방이 6개에 화장실도 3개나 있었다.

    “집이 너무 넓어서 가끔 어지러울 정도야.”

    큰어머니가 웃으며 어머니와 함께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 역시 이 시대에 보기 힘든 설비가 되어있었다. 어머니처럼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큰어머니는 주방을 특히 마음에 들어 했다.

    삐이이익-

    이윽고 불에 올렸던 주전자가 비명을 질렀다. 큰어머니가 찻잔에 커피 두 스푼 그리고 프리마 두 스푼 마지막으로 설탕 두 스푼을 덜었다. 그리고 주전자를 들어 물을 부었다.

    쪼르르.

    찻잔에 뜨거운 물이 담기며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큰어머니가 티스푼으로 몇 번 휘휘 저었다. 그리고 쟁반에 찻잔을 올려 주방에 있는 식탁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어머니를 보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아무리 좋은 차를 마셔도 이 커피만은 못하더라고.”

    어머니가 싱긋 웃었다. 큰어머니는 흔히 말하는 다방 커피 맛을 참 좋아했다. 그리고 커피 믹스도 참 좋아했다.

    “잘 마실게요. 형님.”

    후루룩.

    어머니가 찻잔을 들어 커피를 마셨다. 역시 2:2:2의 잘 알려진 비율이었지만, 큰어머니의 솜씨가 더해지니 맛이 있었다.

    “동서, 우리 이제 정말 남은 평생을 같이 살게 됐어.”

    “네, 형님.”

    큰어머니가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계속 같이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많겠지? 하지만 나랑 동서는 늘 한마음일 거야. 우리 앞으로 지금처럼 행복하게 잘 지내봐. 그리고 고마워.”

    “아니에요, 형님. 저도 형님이 있어서 참 좋아요.”

    어머니가 싱긋 웃으며 큰어머니의 손을 마주 잡았다.

    “흠흠….”

    그 순간, 물을 마시러 주방에 들어서던 큰아버지가 움찔하더니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어머니와 큰어머니가 서로를 보며 씩 웃었다.

    * * *

    딩동댕동.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평소와는 달리 자리를 지키는 학생들의 모습에 선생님의 표정이 아리송해졌다. 분명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경주마처럼 복도를 달려야 할 학생들이 아니던가.

    “너네, 급식실 안 가냐?”

    교실에 있던 학생들이 동시에 우렁차게 답했다.

    “네! 이제 갑니다!”

    선생님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교실을 나섰다. 그와 동시에 교실에 있는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맨 뒤쪽을 향했다. 교실의 4분단 맨 뒤쪽에는 강용이가 있었다. 학기 중에 전학을 왔기 때문에 강용이의 자리는 맨 뒷자리였다.

    “어…. 안녕?”

    반 친구들의 시선을 받은 강용이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와 동시에 학생들이 강용이를 향해 몰려들었다.

    “안녕? 난 김남일이라고 해.”

    “강용아, 안녕?”

    친구들이 강용이를 향해 자기소개하고 난리가 났다. 강용이가 씩 웃었다. 역시 이놈의 인기는 어디를 가나 변함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다들 반갑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

    강용이가 친구들을 향해 씩 웃었다. 강용이는 중학생들 사이에서 제법 유명했다. 일단 강우의 동생으로 유명했고, 온라인상에서 스페이스 크래프트의 고수로 유명했다. 무엇보다 강용이가 부르면 언제든지 나타난다는 존재가 있었다.

    “강용아, 너 진짜 요한이 형이랑 친해?”

    “진짜 우리 요한이 형 볼 수 있는 거야?”

    반 친구들이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물었다. 강용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하지. 나 전학 왔다고, 조만간 한번 학교 앞으로 온다고 했지.”

    교실이 떠나갈 듯 우렁찬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2002년인 지금 임요한의 인기는 여전히 최고였다. 그리고 또 떠오르는 신성이 있었다.

    “이운열은? 이운열도 볼 수 있어?”

    강용이가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운열이 형도 우리 팀이니까.”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멋지다. 우리 팀….”

    그렇게 한참이나 강용이는 친구들의 질문 공세를 받았다.

    “이러다가 우리 급식 놓치겠다.”

    누군가가 경고에 잊었던 십 대의 허기짐이 밀려들었다.

    “망했다. 빨리 가자!”

    강용이가 교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반 친구들이 우르르 강용이를 따라 나왔다. 강용이가 뒤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그런데 급식실이 어디냐?”

    * * *

    방과 후. 강용이가 교문을 벗어나고 있었다. 강용이의 주변에는 학생들이 많이 몰려있었다. 전학 첫날부터 인기스타가 돼버린 강용이었다. 그중 반 친구들이 피시방을 가자고 했지만, 강용이는 미안하다고 하며 거절했다.

    “미안, 오늘은 진짜 중요한 약속이 있거든.”

    친구들의 아쉬운 표정을 뒤로하고 강용이가 빠르게 버스 정류장으로 달렸다. 그리고 버스에 올라탔다. 맨 뒤쪽에 앉은 강용이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강용이는 영등포에 도착했다. 그리고 부천으로 향하는 버스로 한 번 더 갈아탔다. 버스는 다시 달리고 달렸다.

    삐이이-

    이윽고 강용이가 벨을 눌렀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뒷문 앞에 섰다. 버스가 정류장 쪽에 스르륵 멈춰 섰다. 그리고 강용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버스 뒷문에 달린 창문 너머로 이진아가 정류장에 앉아있었다. 교복을 입은 이진아의 단아한 모습에 강용이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치이이익-

    버스가 멈춰서고 뒷문이 열렸다. 강용이가 훌쩍 뛰어내렸다.

    “진아야!”

    정류장에 앉아 참고서를 보던 이진아가 고개를 들어 강용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환하게 웃었다.

    “강용아!”

    오랜만에 만나는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정말 반가워했다. 두 사람은 아직 학생이었고, 사는 곳도 멀었다. 이진아의 집은 부천이었다. 그것도 사단법인 광복의 주택 보급 사업을 통해 지방에서 올라온 것이었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 나도 방금 왔어.”

    강용이가 이진아를 향해 손을 ‘척’ 내밀었다. 이진아가 살짝 얼굴을 붉히더니 강용이의 손을 슬쩍 잡았다. 강용이가 헤벌쭉 웃었다.

    “배고프지?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응.”

    강용이와 이진아는 근처의 즉석 떡볶이집으로 향했다. 이진아는 즉석 떡볶이를 좋아했다. 두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사 잘했어?”

    “응. 잘했어.”

    이진아가 부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강용이가 이사한 집이 크고 넓은 것을 알고 있었다.

    “좋겠다. 엄청 큰집에 살고.”

    “음….”

    강용이가 잠시 멈칫했다. 생각해보면 어느 순간 당연히 여겨진 것들이었다. 부족함 없는 용돈과 넓은 집 그리고 마음껏 사고 싶은 것을 사는 것 등등 말이다. 문득 어렸을 적 고생을 했던 기억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 미안. 그냥 한 말이었는데.”

    강용이의 표정을 읽은 이진아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강용이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저었다.

    “아…. 아니야! 네가 왜 미안해.”

    “아니, 그냥 나는 부럽다고 잠깐 느꼈는데. 생각해보면 너도 고생 많이 했잖아.”

    이진아는 강용이에게 들어 지나온 박 씨 가족의 일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강용이가 콧잔등을 쓱 훔쳤다.

    “나야 뭐…. 고생도 아니었지. 우리 형이랑 아빠가 고생했지.”

    강용이의 말에 이진아가 킥하고 웃었다. 어떨 때 보면 막내의 느낌이 물씬 풍기다가도 이럴 때는 또 어른스럽기도 했다.

    “강용이, 다 컸네.”

    이진아가 짐짓 어른 흉내를 내며 강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강용이가 움찔하더니 헤벌쭉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뚜르르. 뚜르르.

    강용이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강용이가 핸드폰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누구야?”

    이진아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강용이가 씩 웃었다.

    “응, 우리 형.”

    강용이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이내 화들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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