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9화 (289/402)

다음 질문 있으십니까?

강우의 입이 열리고 질문에 대한 답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강우는 차분히 오늘 있었던 협약식에 대해 먼저 이야기했다.

-오늘 협약식으로 문화 산업계에 큰 변화가 생길 겁니다.-

강우의 말에 기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앞서 기자가 물었듯이 두 거대 기업이 손을 잡으며 문화산업이 독과점 형태로 가는 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기자들은 강우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아까 기자님이 물으신 것처럼 독과점의 형태가 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희 대진 그룹과 SJ 그룹이 업무협약을 맺은 것은 문화산업 시장을 독점해 나누어 먹겠다는 의도가 아닙니다. 저희 두 그룹은 과도한 경쟁으로 인한 예산 낭비를 막고 그 예산을 문화계 발전에 온전히 투자하기로 했습니다. 이를 위해 두 기업이 공동으로 컨소시엄을 만들어 어느 분야에 투자할 것인지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문화계에 종사하시는 문화인 여러분의 의견을 귀담아들을 예정입니다.-

강우의 말에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강우는 문화계에 아낌없는 투자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문화인들의 말을 듣는다고 했다. 다른 경제인들이 이런 말을 했다면, 입바른 소리라 치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강우는 자신이 뱉은 말은 꼭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사단법인 광복에서 진행하고 있는 일들에 관한 질문은 오늘 답변을 드리는 게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대진 그룹과 SJ 그룹의 업무협약에 관한 질문만을 받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강우의 말에 질문을 던졌던 기자들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강우가 씩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오늘이 아니면 또 언제 여러분을 만나겠습니까?-

기자들이 화들짝 놀라며 다시 강우에게 집중했다. 강우의 말처럼 평소 언론에 노출을 꺼리는 강우였다. 그런 이유로 기자들이 온갖 질문을 쏟아내기도 한 것이다.

-먼저 일제 강점기 시절 피해를 본 강제 징용자분들의 명단과 위안부 할머님들의 명단을 관련 단체의 협조를 받아 모두 확보했습니다. 그리고 기존에 진행 중이던 소송들을 저희 사단법인 광복에서 이어가기로 한 것도 맞습니다.-

강우의 말에 장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문화산업을 하는 대진 그룹의 입장에서 일본과 껄끄러운 관계는 위험할 수도 있었다. 현재까지도 문화산업의 많은 부분을 일본이 앞서가고 있는 것이 많았다.

“대진 그룹의 이미지에 타격이 가는 건 아닙니까? 그리고 이제 파트너가 된 SJ 그룹의 생각은 어떤지도 궁금합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기자 한 명이 크게 소리쳐 물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명백한 사실을 가지고 소송을 한다고 실추될 이미지가 있겠습니까? 잘못한 놈이 성낸다는 말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SJ 그룹에서도 사단법인 광복이 진행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장내가 더욱더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지금 강우가 한 말의 무게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 문화 산업계의 두 거목이 사업적으로 손을 잡은 것뿐만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기자들의 손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머릿속에는 온통 엄청난 특종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친일명부 업데이트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업데이트하는 친일명부로 사회적 파장을 우려하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사실을 밝힐 뿐이니까요. 만약 이 명부를 가지고 파장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면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이 딱 어울리겠군요.-

강우의 워딩은 유난히 강했다. 기자들도 멍한 표정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강우는 이제 더는 웅크리고 있지 않겠다고 다짐한 상태였다. SJ 그룹이라는 강력한 아군도 생겼으니 더욱 그럴만했다.

-저희는 계속해서 역사의 진실을 밝힐 뿐입니다.-

강우가 눈을 빛냈다. 강우의 날카로운 눈빛에 기자들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역사의 진실을 밝힐 뿐이라고 하지만, 분명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질 거라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강우는 그럴만한 힘이 충분하다고도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이건 제 가족의 개인사이니 기사를 쓸 때 정말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강우의 말에 기자들이 살짝 긴장했다. 강우가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강우의 입에서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 후의 이야기들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겪었던 할아버지의 가족사에 기자들이 숙연해졌다. 그 이야기는 수많은 사람이 겪어야 했던 슬픔과 아픔을 담고 있었다.

-그렇게 저희는 막내 할아버지를 찾았습니다.-

기자들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영화와 같은 파란만장한 삶에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강우 할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그리고 강우의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 가문인지도 알았다. 그런 가문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알려지지 않았던 것에 관한 생각도 깊어졌다.

-그리고 오늘 제 가족은 특별한 인연을 다시 만나게 됐습니다. 바로 SJ 그룹의 송진태 회장님입니다.-

강우의 말에 기자들이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희 증조할아버지와 송진태 회장님은 서로 인연이 있던 사이였다고 합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송진태 회장님을 위해 남겨 놓겠습니다.-

강우가 송진태 회장을 떠올리며 씩 웃었다. 아마 당분간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이 쏟아질 것이다. 그렇게 언론의 화제가 집중된다는 것은 그룹 차원에서도 좋은 일일 것이다.

-그리고 좋은 소식도 있습니다. SJ 그룹과 동양 무역은 식품사업부에서 협력관계를 맺어나가기로 오늘 결정했습니다.-

기자들이 더 크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이해하기 시작했다. 대진 그룹과 SJ 그룹의 결속이 누구의 작품이었는지 말이다. 기자들은 조금씩 깨달았다. 대진 그룹과 SJ 그룹의 결속을 맺은 강우의 다음 목표가 무엇인지 말이다.

-동양 무역.-

이미 아는 사람들은 알고 있는 기업이었다. 한국 내 식품 무역보다는 중국과 일본 그리고 동남아 쪽에서 큰 성과를 거두고 있는 기업이었다. 그리고 동양 무역이 소유한 중국 내 법인의 규모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말이다.

-다음 질문 있으십니까?-

기자들이 침묵했다. 아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지금 강우 입에서 쏟아져 나온 기삿거리들을 단순히 정리하기에도 벅찰 정도였다. 기자들은 정신없이 기사를 적어 내려갔고, 방송사들은 카메라에 강우를 다방면으로 담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그럼 오늘 있은 대진 그룹과 SJ 그룹의 업무 협약식 기자회견을 이상으로 마칩니다.-

기자회견을 준비한 대진 그룹 관계자가 기자회견이 끝났음을 알렸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기자회견장을 벗어났다.

펑. 퍼펑.

사라져가는 강우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 위해 다시 카메라가 불을 뿜었다. 강우는 유유히 기자회견장을 빠져나갔다.

“강우야, 고생했다.”

기자회견장을 나오자 이재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밝은 표정의 송경식도 함께였다.

“기자회견을 자주 하지 않은 거로 알고 있는데 아주 기자들을 들었다 놓았다 하더군?”

송경식도 강우를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있는 그대로만 말하니까 어려울 게 없죠.”

이재원과 송경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진실만큼 강력한 무기는 없다고 생각했다. 강우가 두 사람을 보며 씩 웃었다.

“출출하지 않으세요? 우리 밥이나 먹으러 가죠?”

이재원과 송경식이 좋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이 호텔 밖으로 나왔다. 한 대의 고급 세단에 같이 탄 세 사람은 근처의 삼겹살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정말 나눌 이야기가 많았다.

* * *

저녁이 되어 형광등 불빛이 밝혀진 거실에 텔레비전이 틀어져 있었다. 텔레비전 앞에는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 그리고 강우와 아버지, 어머니 마지막으로 강용이가 둘러 앉아있었다. 거실에 모인 가족들 앞에 있는 테이블에는 온갖 종류의 과일들이 간택을 바라며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이죠. 박재봉 유공자님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이 땅의 근현대사를 관통한다고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이건 역사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유명한 역사학자가 시사프로그램에 나와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마구 늘어놓았다. 텔레비전을 보고 계시던 할아버지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셨다.

“강우야, 다른 곳 좀 보자꾸나.”

“네, 할아버지.”

강우가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는 채널을 돌렸다. 바뀐 채널에서는 마침 저녁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대진 그룹과 SJ 그룹의 업무협약이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이날 협약식이 끝난 기자회견에서는 동양 무역 박강우 부사장과 SJ 그룹 송진태 회장의 특별한 인연이 알려졌습니다.-

뉴스에서 강우 가족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송진태 회장의 인터뷰 화면으로 바뀌었다.

-제 은인이신 고 박진식 사장님께서는 저에게는 사업의 스승님과 다름없습니다. 그분께 배운….-

송진태 회장이 그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증조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강우의 가문이 얼마나 명문이고 이런 가문이 대한민국의 기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가…. 강우야.”

할아버지가 또 헛기침하시며 강우를 불렀다. 강우가 씩 웃으며 채널을 돌렸다. 텔레비전에서는 온통 대진 그룹과 SJ 그룹의 소식이 흘러나왔다. 뉴스도 그리고 시사프로그램도 심지어 문화공연 프로그램에서도 두 기업에 대해 다루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화제를 모은 것은 할아버지의 이야기였다.

“허허…. 형님, 이러다가 저희 산책도 못 나가는 거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얼마 전 두 분의 이야기가 사단법인 광복에 의해 기사화됐었다. 그 이후로도 거리를 나가면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져 인사를 나누느라 시간을 다 보내신다던 두 분이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공중파에까지 알려졌으니 앞으로 더욱더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었다.

“그래도 이사를 하면 거기는 한적한 곳이라 산책하시기 좋을 거예요.”

강우 가족은 곧 이사를 하기로 했다. 이사할 집이 비어있으니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현재 사는 집은 전세를 놓기로 했다. 강우네 집이 전세로 나오자 엄청난 관심이 쏠렸다. 전세로 들어오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섰고, 심지어 매물로 내놓을 생각이 없냐는 문의도 쏟아졌다.

‘이 집에 좋은 기운이 있다나….’

부동산 중개인의 말을 떠올린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하지만 강우는 이 집을 매물로 내놓을 생각은 없었다. 많은 추억이 깃든 곳이었고, 이곳에 와서 좋은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 회장이 그렇다고 하더구나.”

“아…. 회장님이랑 통화하셨어요?”

이철금 회장은 할아버지를 종종 만나 술을 마시거나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이철금 회장은 할아버지를 정말 좋아하고 잘 따랐다. 아니 강우 가족 전부를 참 좋아했다. 그래서 이번 이사도 엄청 신경을 써주었다. 물론, 강우 가족을 가까이 두고 싶은 마음이 큰 이유였지만 말이다.

“이사 오면 자기랑 할 게 너무 많다며 벌써 스케줄을 다 짜놓았다고 하더구나.”

할아버지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강우가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가족들 모두가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는 것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좋네….’

강우가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제 강우 가족의 인생 3막이 시작되려는 순간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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