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7화 (287/402)

바로 그분이십니다.

강우의 눈앞으로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마치 옛날 영화에서나 볼법한 거리의 모습이었다. 곳곳에는 목제 건물과 석조 건물이 뒤섞여 있었다. 북적이는 사람들은 한복을 입고 다니고 있었다. 간혹 돌아다니는 낡은 트럭과 마차들은 진흙탕이나 진배없는 도로를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다니고 있었다.

‘음….’

순간 강우의 머리에 통증이 심해지며 강우의 시야가 돌변했다. 그리고 커다란 목조 창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창고 건물의 상단에는 커다란 하얀색 간판이 달려있었다.

-대한 미곡상회-

멋들어진 한글과 한자가 혼용되어 적힌 간판이었다. 이윽고 강우의 시야가 가게의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목조 건물로 지어진 창고에 쌀이 잔뜩 쌓여있었다. 창고의 한쪽에는 비단옷을 입은 한 명의 남성이 앉아있었다. 이제 50대가 조금 넘어 보이는 남성이었다.

‘음….’

강우는 단번에 중년남성을 알아보았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할아버지와 강우의 얼굴과 너무 닮아있었다.

“사장님, 미곡 재고량 정리가 끝났습니다.”

그때, 미곡 창고의 안쪽에서 한 명의 젊은 남성이 나타났다. 강우의 시야가 남성을 향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떠오를 듯했다. 하지만 이내 머리가 지끈거렸다. 사장이라 불린 중년남성이 시선을 돌려 남성을 바라보았다.

“그래, 수고했다.”

“저…. 사장님.”

남성이 미곡점 사장을 불렀다. 미곡 상점의 사장이 물끄러미 남성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느냐?”

“이번 달 월급을 가불받을 수 있을까요?”

“그래? 집에 무슨 일이 있더냐?”

사장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남성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아내가 병원에 더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큰일이구나. 이제 곧 출산일 텐데.”

사장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눈앞의 남성은 미곡 상점의 사장이 정말 아끼는 직원이었다. 성실함은 물론이고 똑똑하기도 했다. 처음 미곡상회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까막눈이던 남성이었다. 하지만 사장의 도움으로 금세 한글을 깨우치고 이제는 장부도 제법 다룰 줄 알았다.

“.....”

남성이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에게 한없이 잘해주는 사장님이었다. 이렇게 가불을 해달라고 하니 죄송스러울 따름이었다.

“알겠다. 내 가불을 해줄 테니 안사람 데리고 어서 병원에 가보도록 해.”

“감사합니다.”

남성이 꾸벅 인사를 했다. 사장이 미곡 상회의 금고를 열어 가불을 해주었다. 가불을 받은 남성이 황급히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한 남성은 곧 아내를 데리고 근처의 병원으로 향했다.

“보호자 이름을 적어 주셔야 합니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가 남성을 향해 말했다. 하지만 이내 남성의 행색을 보고는 말을 다시 꺼냈다.

“이름을 알려 주시면 제가 적어드릴게요.”

“아닙니다. 글씨를 쓸 줄 압니다.”

남성의 말에 간호사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남루한 행색의 남성이 글을 안다니 그럴 만도 했다. 남성이 펜을 들어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송진태.-

악필에 가까운 글씨였지만, 분명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억을 영화 보듯 확인하던 강우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내가 출혈기가 조금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접수했습니다. 앉아서 대기해 주세요.”

송진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의자 쪽으로 다가갔다. 송진태의 아내는 창백한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여보, 조금만 참으면 의사 선생님을 만날 수 있을 거 같아.”

그 말과 동시에 강우의 시야가 어두워졌다. 그리고 다시 송진태와 아내의 모습이 나타났다.

“으애앵!”

낡은 방 안의 한쪽에는 이제 돌이나 지났을까 싶은 아기가 울고 있었다. 송진태는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송진태의 앞쪽으로는 대한 미곡상회의 사장이자 강우의 증조할아버지가 앉아있었다.

“사장님….”

“인석아, 형편이 이리 어려우면 말을 하지 그랬어. 일단 이걸로 안사람 고깃국이나 끓여 먹여.”

강우의 증조할아버지인 박진식의 손에는 기름종이에 쌓인 고기가 들려있었다.

“사장님, 이렇게 귀한 걸….”

이 시대에 고기라니 송진태의 형편으로는 상상도 못 할 음식이었다. 송진태가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떨궜다.

“안사람이 뭐라도 먹어야 아기 젖이라도 물릴 게 아니더냐.”

“감사합니다.”

박진식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분명 눈앞의 송진태는 성실하고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타고난 출신의 가난으로 이리 어렵게 살고 있으니 그럴만했다. 이윽고 송진태가 고기를 소중히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덜그럭. 덜그럭.

이윽고 밖에서 송진태가 국을 끓이는 소음이 들려왔다. 박진식이 송진태의 아내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래, 아기 이름은 지었고?”

“아니요. 사장님. 아직….”

송진태의 아내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박진식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돌이나 돼버린 아기였지만, 이름이 없었다. 이 시기에는 흔한 일이었다. 가난과 배고픔 그리고 온갖 질병으로 인해 아기가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이의 이름을 지어줄까 하는데 어찌 생각하는가?”

박진식의 말에 송진태 아내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박진식이 누구던가. 광주 시내의 대표 미곡상회인 대한 미곡상회의 주인이자 엄청난 땅을 가진 만석호였다. 그리고 대대로 양반 집안에 벼슬을 지낸 관리도 많이 배출한 집안이었다. 또한, 독립운동에 온몸을 던진 자식들도 있는 그야말로 명문가 중의 명문가였다. 그런 박진식이 아기의 이름을 지어준다고 하니 정말 기분이 좋았다.

“그래 주시면 정말 감사합니다.”

“음…. 어디 보자….”

박진식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경호. 경호가 어떤가?”

“경호…. 경호…. 정말 좋아요. 사장님.”

송진태 아내가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드르륵.

그때, 방문이 열리고 송진태가 돌아왔다.

“사장님, 불을 올려놓고 왔습니다. 여보, 이제 조금만 기다려 곧 맛있는 고깃국 가져다줄게.”

“여보, 사장님께서 아기 이름을 지어주셨어요.”

송진태가 깜짝 놀라며 박진식을 바라보았다. 박진식이 부드럽게 웃었다.

“경호라고 지었다. 호랑이도 놀랄 만큼 담대하고 크게 자라라는 뜻이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송진태가 고마움에 몸 둘 바를 모르며 좋아했다. 박진식이 그런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 * *

살짝 좁혀졌던 강우의 미간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흐려졌던 시야가 돌아오고 눈앞에 송진태 회장의 모습이 보였다.

“자네 어디 안 좋기라도 한 건가?”

“아닙니다. 잠시 두통이 나서. 초면에 실례를 범했습니다.”

강우가 송진태를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송진태가 부드럽게 웃었다.

“아닐세. 요새 박 부사장만큼 바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당연히 체력적으로 힘들 만하지. 너무 일만 하지 말고 쉬엄쉬엄하게.”

“감사합니다.”

송진태가 강우를 보며 호의적인 시선을 보냈다. 그 호의가 듬뿍 담긴 시선의 이유를 강우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시….”

강우가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송진태가 강우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들겨 주었다.

“일단 협약식부터 끝나고 따로 이야기하지.”

“네, 회장님.”

송진태가 다시 한번 부드럽게 웃더니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러자 주변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재원이 다가왔다.

“강우야, 협약식 바로 시작한다.”

“네, 형.”

강우와 이재원이 단상 위에 준비된 테이블로 향했다. 그곳에는 송경식 부사장과 나이가 더 든듯한 한 명의 남성이 있었다.

“반갑습니다. SJ 그룹 사장 송경호입니다.”

“아….”

강우가 탄성을 뱉어냈다. 기억 속 울음을 터트리던 그 아기가 지금 장성한 중년의 모습으로 강우의 앞에 있었다. 강우가 탄성을 뱉어내자 송경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박강우 부사장입니다.”

강우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손을 내밀었다. 혹시 악수하는 순간 무슨 기억이라도 밀려들까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손을 마주 잡았음에도 아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대진 그룹에서 정말 화끈하게 양보를 해주셨습니다. 오늘 있을 협약식을 바탕으로 두 기업이 앞으로도 좋은 협력관계를 이어갔으면 합니다.”

송경호가 강우와 이재원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사실 대진 그룹과의 문화산업 전쟁에서 처참한 성적을 내던 SJ 그룹이었다.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대진 그룹이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리고 국내에서의 출혈 경쟁을 멈추고 함께 세계로 뻗어나가고 했다.

“두 기업이 가진 잠재력이라면 분명 좋은 시너지가 날 것입니다.”

이재원이 부드럽게 웃으며 송경호 사장의 말에 동의했다.

“저희의 목표는 케이컬쳐의 글로벌화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강우도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송경호가 강우를 호감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럼 협약식을 시작하시죠.”

강우의 말과 함께 업무 협약식이 이어졌다. 먼저 서명을 하기 전 두 기업의 소개가 이어졌다. 협약식이 벌어지는 연회장에는 두 기업 관계자들이 가득 자리하고 있었다. 영상이 끝나자 먼저 SJ 그룹 송경호 사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대진 그룹과 SJ 그룹이 역사적인 협력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저희 SJ 그룹은 대진 그룹의 대승적인 협력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앞으로 두 기업이 힘을 합쳐 좋은 결과물을 내놓았으면 합니다.-

간단하지만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다음으로는 대진 그룹의 차례였다. 이재원이 강우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러자 강우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물론, 지금 두 기업의 협력을 끌어내고 완성한 것은 강우였다. 하지만, 이재원이 사장이었으니 발언을 하는 게 맞았다.

-대진 그룹 이재원 사장입니다. 먼저 SJ 그룹에서 참여해주신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 말씀드립니다. 송경호 사장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무의미한 경쟁을 종식하고 이제 협력의 단계로 나아갑니다. 저는 한국 문화가 경쟁력이 있다고 믿습니다. 이제 두 시업은 한국을 넘어 세계로 나아갈 것입니다.-

두 사장의 발언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재원이 씩 웃으며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가 마주 웃어주며 엄지를 척 들어주었다. 이윽고 이재원과 송경호가 단상 위에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두 시업의 관계자들이 화려한 겉표지를 가진 서류철을 가지고 왔다.

펑. 퍼펑.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언론들의 사진기가 불을 뿜었다. 오늘 있는 업무 협약식의 화제성을 증명하듯 방송국 카메라도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이재원과 송경호가 사인하고 서류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다시 사인했다.

-이로써 대진 그룹과 SJ 그룹의 업무 협약식을 마칩니다. 이어서….-

업무 협약식 자체는 정말 간단하고 간결했다. 사실 지금 연회장에 있는 언론들에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나 다름없었다. 오늘 협약식으로 인해 두 기업의 주식은 미친듯한 움직임을 보여줄 것이었다. 협약식이 끝나고 식후행사가 시작됐다. 모이기 힘든 두 기업의 중요 인물들과 관계자들이었다.

“부사장님.”

한쪽에서 이재원과 함께 대화를 나누던 강우에게 송경호가 다가왔다. 그리고 그 옆에는 송진태 회장도 있었다.

“자네의 증조부의 성함이 박 진 자 식 자가 맞는가?”

송진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했다.

“네, 맞습니다. 대한 미곡상회를 운영하시던 바로 그분이십니다.”

강우의 말에 송진태의 얼굴이 크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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