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6화 (286/402)

부장님은 왜 나만 가지고 그래요.

강우와 이나은, 채보라가 기다란 줄 끝에 서있었다. 그 뒤로는 김성현과 김춘배가 있었다. 김춘배가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아니, 임직원 특별 배식 있다면서요?”

“그걸 믿었냐? 그런 게 있겠냐?”

김성현이 김춘배의 등을 팡팡 쳤다. 대진 엔터가 어떤 회사인가? 강우가 강조하는 정직함과 공평함을 좌우명으로 하는 그런 곳이었다. 임직원 우선 배식이라니 그런 시스템이 존재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자율배식대가 많아서 금세 빠질 거야. 좀 기다려봐.”

채보라가 김춘배를 보며 말했다. 하여간 성질 급한 건 알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 누나 연기 연습하느라 너무 배가 고파서 그래요.”

“나도 일하느라 배고프거든? 그리고 오늘은 진짜….”

채보라가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들이 황급히 사방으로 흩어져버렸다. 다만 몇몇 사람이 채보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채보라가 속한 사업 5팀의 팀원들이었다. 채보라가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러자 팀원들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들어 채보라에게 인사했다.

‘하아….’

채보라는 특유의 싹싹함과 부지런함으로 사업 5팀에서 인정받고 있었다. 아직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막내였기에 더 사랑을 받았다. 채보라는 그런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열심히 일하고 인정받고, 그런 이유로 강우나 이나은 그리고 김춘배와의 친분을 숨겼었다.

‘비밀은 오늘로 끝났지만, 어쩔 수 없지.’

앞으로 조금 귀찮아질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속이 시원했다. 비밀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으니 말이다.

“배식 시작한다!”

김춘배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이윽고 배식이 시작됐다. 사내 식당 안으로 맛있는 냄새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와…. 냄새부터 심상치 않은데?”

강우가 향긋한 냄새에 침을 꿀꺽 삼켰다. 채보라 말대로 줄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많은 직원이 식사하는 만큼 자율 배식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었다. 이윽고 강우의 배식 차례가 되었다.

“아이고~ 강우야.”

누군가가 강우를 반갑게 불렀다. 강우가 뒤를 돌아보니 위생복에다 위생모자 그리고 위생 마스크를 낀 아주머니가 있었다.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온몸을 가리고 있으니 잘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이내 상대방을 알아보았다.

“어? 숙자 아주머니죠? 여기에서 일하세요?”

환하게 웃고 있는 익숙한 얼굴은 바로 독립유공자 후손 중 한 분이었다. 강우가 자신을 알아보자 아주머니가 대번에 환한 표정을 지었다.

“응, 얼마 전에 재단에서 연락이 왔어. 대진 엔터 신사옥에 사내 식당을 맡아서 운영해볼 생각이 없냐고.”

“아…. 맞다. 아주머니 식당 운영하신다고 했었던 거 기억나요.”

강우의 기가 막힌 기억력에 아주머니가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많은 후손 한 명 한 명의 신상을 자세히 알고 있다는 강우의 소문은 사실이었다.

“맞아.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는데. 재단에서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해주겠다고 해서 이번에 시작하게 됐어.”

강우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재단에서 시행하고 있는 독립유공자 지원 시스템은 정말 잘 돌아가고 있었다.

“잘됐네요.”

“이게 다 강우 덕분이야. 정말 고마워.”

아주머니가 강우의 팔을 붙잡으며 고마워했다. 운영하던 식당이 어려워져 생계에 큰 난관에 봉착해있던 상태였었다. 사단법인 광복의 제안은 정말 구원과도 같았다.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재단에서 하는 거죠.”

“재단에서 하는 일이 다 강우가 하는 일이지.”

아주머니가 강우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비단 자신의 경우뿐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후손이 재단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사원들이 음식 맛이 엄청 좋다고 난리던데. 아주머니 손맛이었나 봐요.”

“내가 신경을 많이 썼지. 내가 잘해야 우리 강우가 욕 안 먹을 거 아니야.”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음식들을 쓱 둘러보았다.

“잘 먹을게요.”

“그래, 많이 먹어.”

강우가 배식판에 음식을 담기 시작했다. 정말 신경을 많이 쓴 듯 음식들은 보기만 해도 맛있어 보였다. 이윽고 음식을 모두 담은 강우가 일행이 잡아 놓은 자리로 돌아왔다.

“와…. 박강우. 이게 음식이야 산이야?”

김춘배가 식판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 많이 먹는 거 알면서 그래.”

“그래도 볼 때마다 새롭다. 그 많은 음식을 너무 평온하게 다 먹잖아.”

강우가 픽 웃었다. 주변의 사원들은 온통 강우에게 관심이 집중된 상태였다. 대식가라는 강우가 얼마나 많이 먹는지 궁금들 했나 보다. 강우는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강우가 수저를 들었다. 그리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와….”

한 입 먹은 강우가 탄성을 뱉어냈다. 보통 사내 식당의 대량 배식이라면 특유의 맛이 있었다. 대량으로 조리를 해야 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먹은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맛있지?”

이나은이 강우의 입에 묻은 음식을 닦아주며 물었다. 그런 이나은의 행동에 주변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강우를 바라보는 남자 사원들의 얼굴에는 부러움이 가득했다.

“어어…. 진짜 맛있네. 메뉴도 다양하고.”

배식대에 있는 음식들은 메뉴도 정말 다양했다. 순간, 강우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해서 남는 게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여기 운영하시는 숙자 아주머니가 얼마나 정성을 들여 음식을 하시는지 모릅니다. 부사장님 얼굴에 먹칠할 수 없다면서요.”

“아…. 그렇군요.”

강우의 걱정스러운 표정에 김성현이 씩 웃었다.

“그래도,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듣기로는 계약단가가 높아서 충분히 수익을 올리실 수 있을 거라고 들었습니다.”

“그럼 다행이네요.”

강우가 안심하고 본격적인 식사를 시작했다. 순식간에 한 그릇을 비운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의 사원들이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배식판에 음식을 더 담기 시작하자 몇몇 사원들은 멍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우리 강우 잘 먹는다.”

강우가 자리로 돌아오자 이나은이 흐뭇하게 웃었다. 김춘배가 실소를 흘렸다.

“저건 잘 먹는 정도가 아니지.”

“잘 먹으면 좋은 거지.”

채보라도 거들고 나섰다. 수세에 몰린 김춘배가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나은이 차기작 결정했다며?”

“응, 드라마.”

이나은이 씩 웃으며 답했다. 그러자 김춘배가 관심을 드러냈다.

“그 드라마 스토리가 강우네 가족 이야기라며?”

“어, 비슷한데 각색을 좀 많이 하긴 했더라.”

강우의 대답에 김춘배가 혀를 내둘렀다.

“당연하지. 아무리 드라마라지만, 너 같은 괴물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가는 판타지 소설 이야기 듣지.”

“내가 뭐?”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와~! 이 뻔뻔함 보소. 네가 가슴에 손을 얹고 너를 돌아봐라. 너 같은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겠어?”

“여기 있잖냐.”

강우가 뭔 소리냐는 듯 말했다. 김춘배가 움찔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네.”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밥이나 먹어.”

김성현이 김춘배를 향해 일격을 날렸다. 김춘배가 발끈했다.

“아! 형은….”

“부장님.”

“아! 부장님은 왜 나만 가지고 그래요.”

“좋아서.”

두 사람의 만담 같은 대화에 강우와 이나은이 웃음을 터트렸다. 다만 채보라는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친분이 있다지만, 김성현은 대진 엔터의 수장이 아니던가.

“강우야, 나도 그 드라마 오디션 보고 싶은데.”

김춘배가 오디션 의사를 밝혔다. 김성현이 김춘배를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대본 내용대로면 네가 몰입할 만하기는 하겠네.”

“그렇죠? 강우 가족 이야기라면 주변 인물 중에 나도 있을 거 아니에요.”

대본을 자세히 읽어보았던 강우가 잠시 생각을 떠올렸다. 확실히 작중 주인공의 주변 인물 중에는 김춘배와 닮은 등장인물이 있었다.

“어, 있긴 있다.”

“됐네. 그럼 오리지널이 오디션을 보는데 누가 이길 수 있겠어?”

김춘배가 씩 웃었다. 강우 가족의 이야기를 드라마화한다고 하니 출연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컸다.

“그러면 오디션 시작하면 내가 알려줄게.”

김성현도 김춘배의 출연 의사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강우가 문득 생각했다.

‘도대체 누굴까?’

대본에 적혀있는 강우 가족의 이야기. 각색을 많이 했다고는 하지만 분명 세세한 이야기였다. 문득 강우가 원작자를 한번 수소문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먹자.’

물론, 맛있는 밥을 잔뜩 먹는 것이 먼저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지 않던가.

* * *

스르륵.

유명 호텔 앞에 고급 세단이 멈춰 섰다. 호텔 주변으로는 이미 수많은 취재진이 둘러싸고 있었다. 고급 세간이 나타나자 누군가가 소리쳤다.

“박강우 부사장이다!”

그 외침과 동시에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펑- 퍼펑-

카메라 플래시가 정신없이 터지기 시작했다. 차에서 내리기도 전부터 뭐를 그리 찍는지 알 수는 없었다. 이윽고 적당한 위치에 멈춰선 고급 세단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깔끔하게 차려입은 강우가 내렸다.

“박강우 부사장님! 이번 업무 협약으로 한국 문화계가 독과점의 형태로 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사장님, 대진 그룹이 SJ 그룹에 사업영역을 양보한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항간에는 대기업끼리의 사업영역 나누어 먹기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질문이 폭풍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최 비서는 물론이고 오늘의 사태를 대비해 따라나선 경호원이 필사적으로 기자들을 막았다.

“기자회견은 협약식 이후 따로 진행하겠습니다.”

최 비서와 경호원이 사력을 다해 길을 트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많은 인파를 막기에 두 명의 힘은 너무 약했다. 순식간에 뒤로 밀려났다.

“어어….”

“부사장님.”

그 모습에 강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것들을 뭐가 그리 급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가장 먼저 특종으로 내보낼 요량이겠지.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말씀드린 대로 기자회견은 협약식 이후에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강우가 슬쩍 기자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어?”

강우를 둘러싸던 기자들이 마치 바다가 갈라지듯 양쪽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강우가 가진 엄청난 힘에 버티지 못하고 한 명씩 한 명씩 뒷걸음질을 친 것이다.

“자자! 잠시만 비켜주세요.”

강우의 도움을 등에 업은 경호원이 본격적으로 길을 트기 시작했다. 강우 일행은 기자들의 방어벽을 뚫고 결국 호텔의 입구에 도착했다.

“고생들 하셨어요.”

강우가 약간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말했다. 그때, 호텔 입구에서 먼저 대기하고 있던 대진 그룹 직원들이 달려 나왔다.

“부사장님, 죄송합니다. 기자들이 도착 소식을 듣고 갑자기 몰려나가는 바람에 막지를 못했습니다.”

“괜찮습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기자들은 이제 인터뷰를 포기했는지, 열심히 사진을 찍기만 할 뿐이었다.

“사장님은 도착하셨나요?”

강우가 이재원의 도착 여부를 물었다.

“네, 지금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SJ 측은요?”

강우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호텔 안으로 들어서자 긴장된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다. 그만큼 오늘 있을 협약식은 앞으로 대한민국 문화 산업계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었다.

“지금 송 부사장님을 비롯한 모두가 도착해 있다고 합니다.”

이번 협약식을 성공적으로 이끈 송경식은 본부장에서 부사장으로 승진한 상태였다. 즉, 후계경쟁 구도에서 확실한 우위에 섰다는 뜻이었다.

“좋네요.”

강우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든든한 지원군의 승진은 더할 나위 없이 호재였다. 이윽고 강우가 협약식이 있을 연회장에 도착했다.

덜컥.

연회장의 문이 열리고 안쪽의 모습이 나타났다. 안쪽에는 대진 그룹과 SJ 그룹의 관계자들이 모여있었다. 그중 눈에 띄는 한 명의 존재를 발견한 강우가 놀라움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저 사람은….’

SJ 그룹의 회장인 송진태가 협약식장의 한쪽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송진태의 시선이 스르륵 강우를 향했다. 송진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강우를 향해 다가왔다.

“자네가 바로 박강우 군이군.”

송진태가 손을 내밀었다. 강우가 손을 마주 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박강우입니다.”

강우가 송진태 회장의 손을 잡는 순간이었다. 강우의 머리가 지끈 아파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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