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5화 (285/402)
  • 도대체 누구냐 넌.

    사라락. 사라락.

    회의실에 대본 넘어가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강우의 앞쪽에는 두 개의 대본이 놓여있었다. 강우는 차분히 대본을 확인하고 있었다. 대본을 확인하는 강우의 옆쪽으로는 이나은과 김성현 부장이 앉아있었다.

    “음….”

    대본을 모두 확인한 강우가 침음성을 뱉어냈다. 김성현 부장이 움찔하며 강우를 향해 물었다.

    “둘 다 별로이십니까?”

    “아니요. 둘 다 좋습니다.”

    강우가 대본을 내려다보았다. 이나은이 말해준 대로 로맨스 코미디 영화 대본 하나 그리고 가족 드라마 대본 하나였다. 영화 대본은 역시 강우의 기억이 말해준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내용도 같았고, 이미 캐스팅했다는 남자배우도 같았다.

    ‘그리고 미래의 기억과 똑같은 여배우에게도 이미 캐스팅 제안이 들어간 상태라고 했지.’

    다만 다른 것은 이나은에게도 출연 제의가 왔고, 영화감독은 이나은을 1순위 캐스팅 여주인공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바로 강우의 앞에 놓인 또 다른 정체불명의 대본이었다.

    ‘도대체 누구냐 넌.’

    대본을 읽으면 혹여 미래 기억이 떠오를까 했었다. 하지만 아무 기억이 안 떠올랐다. 그렇다는 것은 분명.

    ‘미래에도 없던 그런 작품이라는 거지.’

    강우가 다시 한번 대본을 확인했다. ‘가족애.’라는 가칭을 가진 작품이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어렵게 살던 가족이 서로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바탕으로 성공의 길에 들어선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 과정이나 내용이 왜 이렇게 익숙한 거냐고.’

    강우가 실소를 흘렸다. 대본에 적힌 내용은 바로 강우 가족의 이야기와 너무나 같았다. 강우가 손가락으로 대본을 툭툭 쳤다. 그리고는 김성현을 향해 물었다.

    “이 대본을 쓴 작가는 누구입니까?”

    “그게, 대본을 건네온 제작사에서 드라마 대본 공모전을 열었고, 거기에 대본을 보낸 신원미상의 작가라고 합니다.”

    “신원미상이요?”

    강우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공모전에 대본을 보내면서 신원미상이라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대본을 막 써도 되는 건가요? 원작자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요?”

    “일단 공모전 참여 요강에 기재해놓았다고 합니다. 당선작은 공모전 주최 측에서 드라마나 영화화하는 권리를 가진다고요.”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모전의 참여 요건에 흔한 일이기도 했다.

    “부장님도 대본을 읽어보셨으면 아시겠죠? 이게 어떤 내용인지.”

    “네, 모를 리가 없죠.”

    김성현 부장이 대본을 바라보았다. 사실 자신도 이 대본을 접했을 때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리고 세상에 잘 알려진 강우 가족의 이야기가 담겨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잘 알려진 강우 가족의 이야기를 대본화했다고 무조건 재밌다는 건 아니었다.

    ‘누군지 몰라도 그 내용을 각색하고 캐릭터를 설정하고 스토리를 각색한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제작사 쪽에서는 유명 작가가 정체를 감추고 원고를 투고한 게 아닌가 생각도 했었다고 했다. 하지만 주변에 수소문을 한 결과 원고를 쓴 작가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제작사에서는 이 대본을 대진 엔터에 보낸 거군요?”

    “맞습니다. 그리고 여주인공의 역할로 이나은 양을 꼭 캐스팅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강우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대본 속 여주인공은 남주인공의 여자친구 역할이었다. 즉 지금 강우와 이나은의 관계를 모티브로 만든 인물이었다.

    “일단 작품은 좋네요. 그런데…. 이걸 흥행의 기준으로 보자면….”

    김성현이 말끝을 흐렸다.

    “그러면 사업부에서는 로맨스 코미디 작품을 추천하고 있는 겁니까?”

    “네, 회의 결과 저희는 영화 쪽이 더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강우가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러자 김성현 부장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강우의 눈빛은 어떤 이유의 판단인지 묻고 있었다.

    “일단 가족 드라마는 지금 이나은 양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보통 방송국에서 가족 드라마를 편성하는 시간대도 메인 시간대는 아닙니다.”

    강우가 계속해서 묵묵히 김성현 부장을 바라보았다. 김성현 부장이 목이 타는지 앞에 놓인 컵을 들어 물을 벌컥 마셨다.

    “반면 지금 제의가 들어온 영화는 이나은 양의 나이대에 딱 맞는 배역이기도 하고 요즘 영화계에서 호평이 자자한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상대 남자주인공 역시 최근 크게 관심을 받는 배우입니다. 그리고 이나은 양이 영화를 더 선호한다는 것도 고려한 부분입니다.”

    “그렇군요.”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업부의 판단은 정확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강우는 드라마 대본에 끌렸다. 강우 자신과 가족의 이야기라서가 아니었다. 대본 자체도 잘 썼고, 이야기 자체도 정말 재미있어 보였다.

    “나은이는 어때?”

    강우가 이나은에게 물었다. 결국, 작품을 선택하는 것은 이나은의 몫이자 권리였다. 다른 기획사들과 다르게 대진 엔터는 이 부분에서는 소속 연예인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랐다. 이나은이 두 대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나는 드라마가 더 하고 싶어. 이 이야기라면 정말 내가 많은 이야기를 연기로 보여줄 수 있을 거 같아.”

    “하지만, 지금 나은이가 가진 이미지랑은 조금 달라. 그래도 괜찮겠어?”

    현재 이나은이 가진 이미지는 JG 소프트의 광고를 시작으로 쌓아 올려진 것이었다.

    -엘프 여신-

    엘프로 분장해 찍었던 그 광고 이후로 이나은은 신비의 영역에서 많은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지금껏 맡아온 배역이나 광고 역시 그 부분을 고려해 골라왔었다. 하지만 지금 이나은이 선택한 드라마는 기존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상반된 것이었다.

    “응, 상관없어. 이미지가 너무 한쪽으로만 쏠리는 것도 좋지 않다고 생각해.”

    “그래, 나은이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강우가 씩 웃으며 말했다. 이나은도 싱긋 웃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 배역 마음에 무척 들어. 나 잘할 수 있어.”

    이나은의 말이 끝나자 김성현도 더는 영화 대본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강우의 결정은 언제나 성공과 흥행으로 이어졌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럼 이나은 양의 다음 작품은 이 드라마로 결정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해주세요. 그리고 혹시 걱정하시지 말고요. 이 드라마 반드시 대박 날 겁니다.”

    강우의 말에 김성현이 안도의 빛을 떠올렸다. 흥행 보증수표나 다름없는 강우의 확인을 받았으니 말이다. 강우가 대본을 다시 뒤적거렸다.

    ‘미래의 기억 속에 있는 작품은 아니지만, 확신이 든다. 이 작품은 꼭 성공할 거야.’

    그렇게 이나은의 차기작 선정을 위한 회의가 끝났다. 강우가 힐끗 시계를 바라보니 점심시간이었다.

    “나은아, 배고프지?”

    “응, 우리 사내 식당 가서 밥 먹자.”

    역시 이나은도 신사옥 사내 식당의 열렬한 팬이었다. 이 정도 되자 강우도 사내 식당의 음식 맛이 궁금해졌다.

    “사람들 많을까?”

    “많을 거야. 오늘 메뉴가 진짜 맛있대.”

    이나은이 밝게 웃으며 즐거워했다. 강우와 함께 신사옥에서 점심도 먹고 차기작도 골랐으니 그럴만했다. 그렇게 밝아진 이나은을 보며 김성현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나은의 멘탈캐어를 위해 관리팀에서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는지 몰랐다. 하지만 강우의 존재 하나로 저렇게 밝아지는 이나은이었다.

    ‘다른 연예인들도 마찬가지고….’

    대표적으로 김춘배도 있었다. 그리고 대진 엔터에 소속된 연예인들은 모두 강우를 멘토로 삼을 정도였다. 강우는 바쁜 와중에도 어린 연습생은 물론이고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연예인들과도 소통을 자주 했었다.

    ‘신사옥으로 옮기고 나서는 한동안 뜸하셨지만, 오늘 이렇게 오셨으니 또 한바탕 들썩이겠구나.’

    김성현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자자 그럼 사내 식당으로 가시죠.”

    김성현이 앞장서서 회의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움찔하더니 이내 픽 웃었다.

    “춘배야, 너 부사장님 오신 거 듣고 온 거야?”

    “부장님, 당연하죠.”

    김춘배가 마침 회사에 나와 있었나 보다. 김춘배가 열린 문 사이로 고개를 쓱 내밀었다.

    “여~ 바빠서 얼굴도 보기 힘든 나의 베스트프렌드가 여기 계셨네?”

    “뭐래….”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이야~ 그거보다 더 보기 힘든 우리 슈퍼스타 이나은 양도….”

    “시끄럽다.”

    김성현 부장이 김춘배의 귀를 잡아 밖으로 끌어당겼다.

    “아아! 부장님! 아파요 아파!”

    “너는 어째 나이가 들어도 철이 안 드냐?”

    “예술인은 철들면 죽는다는 말 모르십니까?”

    “하아…. 말이나 못 하면.”

    김성현과 김춘배가 문밖에서 티격태격했다. 오랜만에 보는 두 사람의 익숙한 모습에 강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나은도 입을 가리고 웃었다. 강우와 이나은이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김성현과 김춘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점잖게 강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우야, 빨리 가야 해 오늘 메뉴 대박이라서 늦게 가면 줄 엄청 서야 한다.”

    “그래? 그럼 빨리 가야지.”

    김춘배가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김성현이 그런 김춘배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너 사정이고. 나랑 부사장님은 임직원 특별 배식으로 받아서 일찍 먹을 거다.”

    “아아! 권력의 남용을 하시는 겁니까?”

    김춘배가 정의를 부르짖는 기사처럼 비장하게 외쳤다. 순간, 주변의 시선이 김춘배에게 집중됐다. 하지만 나름 익숙한 듯 이내 고개를 돌렸다. 사정을 모르는 몇몇 신입사원들만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웃음을 참을 뿐이었다.

    “그래, 권력 남용이다. 왜? 이거 오늘 같이 배식받게 해주려고 했더니….”

    “죄…. 죄송합니다.”

    김춘배가 황급히 사과를 해왔다. 강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두 사람을 지나쳤다. 김성현이 움찔하며 김춘배에게 미간을 좁혔다. 김춘배와 있을 때면 꼭 이렇게 티격태격하게 됐다. 그렇게 회의실에서 나와 사무실을 벗어나던 강우가 한 곳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선배.”

    강우의 목소리가 닿은 곳에는 채보라가 있었다. 회의실에서 김성현과 김춘배가 나오는 순간부터 고개를 책상에 파묻듯 하고 있었다.

    “선배?”

    강우가 다시 채보라를 불렀다. 주변의 시선이 대번에 채보라를 향했다. 채보라가 고개를 파묻은 채 말했다.

    “그냥 가주면 안 될까?”

    강우가 픽 웃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밥이나 같이 먹어요.”

    “아아….”

    채보라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런 두 사람을 발견한 김춘배가 움찔하더니 이나은에게 물었다.

    “뭐야? 보라 누나 걸렸어?”

    “어, 걸렸어. 강우가 깜빡하고 선배라고 불렀거든.”

    김춘배가 씩 웃었다. 그리고는 위풍당당 채보라에게 다가갔다.

    “누나, 걸렸다며요? 축하해요. 그동안 이 악물고 우리 모르는 척하느라 힘들었죠?”

    “춘배야.”

    채보라가 나지막이 김춘배를 불렀다. 김춘배가 움찔하더니 이나은의 뒤로 숨었다. 이나은이 어색하게 웃으며 채보라를 향해 ‘척’ 손을 들었다.

    “언니….”

    “나은이 너마저….”

    결국, 채보라가 모든 것을 포기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은 호기심과 놀라움을 뛰어넘어 경악에 차 있었다.

    “그래, 먹으러 가자. 그 밥. 나도 오늘은 좀 편히 줄 좀 서보자.”

    결국, 채보라가 그동안 숨겨왔던 카리스마를 뿜어냈다. 몇몇 선배 사원들이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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