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4화 (284/402)
  • 이제 큰일 났네요.

    -로맨스 코미디 영화와 가족 드라마-

    이나은이 강우에게 설명해준 작품이었다. 강우는 잠시 미래의 기억을 떠올렸다. 로맨스 영화의 가제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영화가 있었다. 큰 흥행까지는 아니었지만, 충분한 성공을 거두는 영화였다. 무엇보다 원래 출연했던 여주인공이 가장 큰 주목을 받았던 영화였다.

    ‘이 영화에 출연한다면 나은이에게는 좋은 필모가 될 거야.’

    하지만 가족 드라마의 가제는 아무리 연관을 지어봐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강우가 드라마에 크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일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능력이 점점 강해지면서 이제 어지간한 미래의 기억은 원하면 떠올릴 수 있는 강우였다.

    ‘능력을 얻었던 초반에는 극히 제한된 내 경험이나 정보를 검색해서만 얻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관련된 키워드만 있다면 충분히 미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럴 때마다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게 됐다. 지금껏 점점 강해진 신체 능력도 그리고 엄청나게 먹을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소모된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지금 나은이가 말하는 드라마는 아무런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데….’

    강우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정리하고 이나은을 바라보았다. 이나은은 애정이 듬뿍 담긴 시선으로 강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은이는 뭐가 더 끌려?”

    “음…. 대본을 받아봐야 정확히 알 수 있을 거 같기는 한데 아무래도 가족 드라마가 더 끌리기는 해.”

    “그래 그러면 내일 대진 엔터에 내가 한번 들러볼게. 대본 같이 확인해보자.”

    “정말?”

    이나은이 대번에 밝은 표정을 지었다. 강우의 작품 고르는 안목이야 이미 유명했다. 대진 엔터의 소속 연예인들은 전부 강우가 한 번이라도 작품을 골라주길 바란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응, 아침 일찍 바로 넘어갈게.”

    “그래, 그럼 나도 내일 회사 들어가 있을게.”

    강우와 이나은이 서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참 든든한 존재였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늦었다. 부모님 기다리시겠어.”

    “안 기다리실걸?”

    이나은의 짓궂은 농담에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이나은이 입을 가리며 킥하고 웃었다. 이나은이 멍해 있는 강우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고마워.”

    “어어….”

    강우가 헤벌쭉 웃었다. 두 사람이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공원을 벗어나 대로변에 나온 두 사람이 이나은의 집 방향을 걷기 시작했다. 차도 위 차들의 헤드라이트가 마치 조명처럼 두 사람에게 쏟아졌다. 이윽고 강우와 이나은이 집 앞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이렇게 걸으니까 너무 좋다. 고마워 강우야. 나 내일부터 또 힘내서 열심히 달려볼게.”

    “그래, 우리 나은이는 잘할 수 있어.”

    강우와 이나은이 살짝 포옹했다. 이나은이 아쉬움이 진한 눈빛으로 강우와 아파트 현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언젠가 강우와 함께 집으로 들어서는 날을 기대하고 기대했다. 그때까지 강우가 하는 일에 도움이 되고 어울리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럼 조심히 가.”

    “응, 조심히 들어가.”

    이나은이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에서 강우가 진한 아쉬움을 느꼈다. 강우가 이나은이 들어간 자리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 * *

    대진 엔터의 신사옥은 정말 크고 아름답게 지어졌다. 연예기획사답게 외관 디자인에 특별히 신경을 쓴 건물이었다. 그 건물의 앞쪽으로 강우를 태운 고급 세단이 멈춰 섰다.

    스르륵.

    반대편 문이 열리고 최 비서가 내렸다. 그리고 황급히 강우가 앉은 쪽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강우는 이미 문을 열고 내리고 있었다. 최 비서가 ‘아…. 오늘도 늦었네.’라고 속으로 되뇌며 강우의 옆에 섰다. 강우가 최 비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럼 들어가시죠.”

    “아…. 네네! 부사장님.”

    강우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대진 엔터 사옥의 입구에 있던 임직원들이 우르르 마중을 나왔다. 대진 엔터가 신사옥을 옮긴 이후 강우의 첫 방문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부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임직원들이 일제히 인사를 해왔다. 강우가 움찔하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안녕들 하세요. 그런데 다들 왜 이렇게 나오신 겁니까?”

    강우의 질문에 임직원들이 살짝 당황했다. 그러자 김성현 부장이 앞으로 나섰다.

    “부사장님, 신사옥에 처음 방문하시는 날이라고 직원들이 준비를 많이 했습니다. 다들 환영의 의미로 이렇게 마중을 나온 겁니다.”

    “하하. 알고 있습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강우의 장난스러운 미소에 임원들의 굳었던 얼굴이 스르륵 풀렸다. 강우가 주변을 한 차례 돌아보고는 신사옥의 입구로 들어섰다. 신사옥에 들어서자 양면으로 커다란 디스플레이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곳에서는 대진 엔터 소속 연예인들의 소개와 함께 출연작들 혹은 앨범에 실린 노래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옥이 아주 멋지게 지어졌네요?”

    강우가 만족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강우는 미래 기억을 통해서 신사옥의 디자인에 많은 아이디어를 냈다. 강우가 내놓은 아이디어를 들은 건축디자이너가 멍한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네, 사원들은 물론이고 소속 연예인들도 아주 좋다고 난리들입니다. 특히 사내 식당이….”

    김성현 부장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아직 식전이라 그런지 사내 식당의 음식을 떠올리니 입맛이 돌았다.

    “사내 식당의 밥이 너무 맛있어서 연예인들이 스케줄을 하다가도 밥을 먹으러 올 정도입니다. 그리고 사원들이 하도 밖을 안 나가서 주변 상인들이 뭐 하는 곳인가 찾아오기도 한답니다.”

    “그래요?”

    강우가 씩 웃으며 물었다.

    “네, 그래서 요즘은 주변 상인분들을 위해서 일주일에 한두 번은 밖에서 사 먹을 것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대진 엔터 사옥이 들어서며 주변 상인분들 기대감도 컸을 텐데 상생해야죠.”

    김성현 부장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에게 들은 잘했다는 말 한마디가 그 어떤 격려보다 좋았다. 김성현 부장이 힐끗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리고 청춘을 바쳤던 기획사에서 버림을 받고 정말 방황하던 날도 떠올랐다.

    ‘회사를 잘리고 나서는 쓸데없는 정의감에 나선 걸 후회하기도 했었지.’

    연예계가 다 그런 거라고 더럽고 치사한 술수가 난무하고 믿을 놈 하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자신이 강우를 만났다. 강우를 만나 대진 엔터에서 일하게 됐고, 정말 신세계를 만나게 됐다.

    ‘연예인을 대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와 정직함이라고 했지. 그리고 연예인을 돈을 버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으로 대해줄 것을 강조했고.’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정말 일치하는 강우의 생각이었다. 김성현은 대진 엔터에서 일하는 하루하루가 정말 즐거웠다.

    “아…. 그리고 지시하신 굿즈 샵도 이번에 오픈했습니다.”

    “그래요?”

    강우가 크게 호기심을 드러냈다. 문화 산업의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팬들과의 소통이었다. 강우는 굿즈 사업으로 팬들에게 보답하는 것도 소통의 창구라고 생각했다.

    “그럼 한번 들러보죠.”

    강우가 굿즈 샵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 뒤를 김성현 부장과 임직원들이 따르기 시작했다. 굿즈 샵은 아직 팬들에게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90년대 후반부터 아이돌이 유행하며 팬들 사이에서 굿즈를 만들어 공유하거나 팬클럽 중심으로 만들어 공유하는 것 정도였다.

    “지금 굿즈 샵에는 이번에 데뷔한 남자 아이돌 그룹의 굿즈가 처음으로 판매되고 있습니다. 아직 실적은 미미하지만, 팬들 사이에서는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대진 엔터는 얼마 전 신인 보이그룹을 데뷔시켰다. 모두 강우가 가진 미래 기억에서 인기를 끌었던 멤버들로 이루어진 그룹이었다. 데뷔 전 강우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탄생한 그룹이었다. 강우가 심사하던 당시 그 꼼꼼하고 디테일한 지적에 연예 관계자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반응이 좋으면 아이돌뿐만이 아니라 점점 다른 소속 연예인들의 굿즈 사업으로도 확장해 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강우는 한동안 굿즈 샵을 둘러보았다. 강우는 대진 엔터를 대한민국 문화 산업의 메카로 만들 준비를 모두 끝냈다. 이제 본격적으로 문화 세계정복의 시작을 할 차례였다. 같은 분야를 두고 경쟁하던 경쟁사 SJ 그룹도 이제 곧 든든한 아군이 될 것이었다.

    “좋네요. 그럼 이제 회의실로 가보죠. 이나은 배우님은 도착해 있죠?”

    강우가 이나은의 호칭을 평소와는 다르게 불렀다. 아무리 여자친구라 하지만 주변에 보는 눈이 많았으니까 말이다.

    “네, 지금 연습실에서 연기 연습 중입니다.”

    “그래요?”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지난밤 강우와의 대화 이후로 다시 원동력을 얻은 이나은이었다.

    “역시 부사장님은 대단하십니다. 저희가 그렇게 설득해도 묵묵부답이던 이나은 씨였는데 말입니다.”

    “뭐…. 개인적인 관계도 있으니까요.”

    강우와 김성현이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다. 뒤를 따라오던 임직원들이 경쟁하듯 두 사람의 뒤쪽으로 섰다. 강우가 슬쩍 뒤를 돌아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면 다들 업무 복귀해주세요. 저는 부장님이랑 회의에 좀 들어가겠습니다.”

    임직원들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현재 대진 엔터가 독립사업부로 개편되면서 많은 인원보충이 있었다. 기존의 전문성을 갖춘 인력들도 많았지만, 본사에서 발령 난 임원들도 있었다.

    “네, 부사장님.”

    임직원들이 아쉬움에 꾸벅 인사를 했다. 하지만 강우가 앞으로 신사옥에 자주 방문할 것을 알기에 아쉬움을 삼켰다. 강우와 김성현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안도 정말 잘 꾸몄네요.”

    “네, 부사장님 지시대로 정말 신경 많이 썼습니다.”

    강우가 김성현을 바라보았다.

    “제가 왜 입구에서부터 사무실까지 이르는 공간을 이렇게 신경 썼는지 아세요?”

    “음…. 아무래도 첫인상이 중요하니까 그런 게 아닐까요?”

    강우가 씩 웃었다. 역시 김성현은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맞아요. 우리 기획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미팅이나 계약을 위해 사무실까지 이르는 길이 바로 지금 우리 동선이죠. 문화라는 건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첫인상만 중요시해서 과대 포장하는 게 좋은 건 아니니까요.”

    “역시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성현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의 말에 십분 공감할 수 있었다.

    띵.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바쁘게 돌아가는 사무실의 모습이 나타났다. 나날이 늘어가는 사업 영역에 대진 엔터도 사원을 대폭 보강한 상태였다.

    “가시죠. 회의실에 준비가 끝났습니다.”

    김성현 부장이 회의실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첫 방문인 강우는 사무실을 두리번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지이잉-

    자동문이 열리자 안쪽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사원들은 정말이지 정신없이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강우가 회의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네네! 지금 바로….”

    그때, 사원 한 명이 한 손에는 잔뜩 쌓아 올린 서류철을 그리고 한 손으로는 핸드폰으로 전화를 받으며 강우에게 다가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강우가 미처 반응을 못 했다.

    쿵.

    두 사람이 살짝 부딪혔다. 역시 힘이 강한 강우는 멀쩡했고, 상대방이 ‘꺅!’ 하는 비명과 함께 뒤로 넘어졌다. 순간, 사무실에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강우와 사원을 향해 시선이 집중됐다.

    “아…. 죄…. 어? 보라 선배였어요?”

    강우가 넘어진 사원 채보라를 보며 픽 웃었다. 황급히 서류를 정리하던 채보라가 익숙한 목소리에 멈칫했다. 그리고는 강우를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가리켰다.

    “어? 강우다.”

    그 말과 동시에 사무실의 사원들이 경악에 찬 표정을 지었다. 강우와 채보라가 선후배 사이라는 사실이 오늘 처음 밝혀진 것이다. 강우가 주변을 쓱 보고는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는 채보라를 향해 낮게 말했다.

    “선배, 비밀 지켜달라고 하더니 이제 큰일 났네요.”

    “하아….”

    채보라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평범한 회사생활을 위해 지금껏 극비로 유지한 강우와의 친분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벌써 호기심과 의혹 그리고 부러움의 시선이 맹렬히 뒤엉키고 있었다. 채보라가 한숨을 푹 쉬었다.

    “망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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