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1화 (281/402)

형이 얼마나 단단해졌는데.

서울로 돌아온 강우는 어머니와 함께 이재원을 만났다. 이재원은 강우네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일요일인 오늘은 강우네 가족이 이사할 집을 보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다녀오셨어요.”

이재원이 미니버스에서 내리는 가족들을 일일이 반겼다.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가 이재원을 보고는 크게 반가워했다. 이재원이 같이 가지 못한 것을 크게 아쉬워했던 두 분이었다.

“그래, 재원이구나.”

“오늘 집을 보러 간다고 했지?”

이재원이 씩 웃었다.

“네, 강우랑 어머니 모시고 다녀올까 합니다.”

“그래, 잘 부탁한다.”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가 이재원의 어깨를 두들겨 주고는 집으로 향하셨다. 긴 여정에 피로감을 느끼실만했다. 뒤이어 아버지도 이재원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아들, 잘 부탁한다. 그리고 다음에는 꼭 같이 내려가 보자.”

“네, 아버지.”

사실 아버지는 선묘에 이재원도 데리고 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재원은 며칠 후 있을 협약식 때문에 정신없이 바쁜 상태였다. 한동안 대진 그룹에서 금지하던 주말 출근까지 해야 했을 정도로 말이다.

“어머니, 타세요. 오늘은 제가 운전할게요.”

이재원이 자신이 몰고 온 차의 조수석을 열었다. 어머니가 싱긋 웃으며 차에 올라탔다.

“어머니, 저도 갈래요.”

오늘까지 스케줄을 비워놓은 이나은이 어머니 옆에 탔다. 강우는 조수석에 앉았고, 이재원이 운전대를 잡았다.

“그럼 출발합니다.”

이재원이 부드럽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이재원이 모는 차가 곧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올림픽 대로에 올라섰다. 한남동에 가기 위해서는 한강 다리를 건너야 했다.

“어머니, 잘 다녀오셨어요?”

이재원이 룸미러로 힐끗 뒤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나은과 대화를 나누던 어머니가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응, 아주 좋았어. 다음에는 꼭 같이 가보자.”

“네, 이번 추석에는 같이 내려가 봐요.”

“그래? 재원이는 성묘하러 안가?”

이재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저희는 추석 전에 미리 갔다 올 거 같아요. 아무래도 보는 눈들이 많아서요.”

“아…. 그랬구나.”

이재원의 출생 비밀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대진 그룹에서 아직 정식적으로 어떤 입장을 내놓지는 않은 상태였다. 그동안 이재원은 친할아버지의 산소를 찾아간 적이 없었다. 군대에 가 있는 동안도 있었고, 그전에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참여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번에는 내려갈 결심을 했네요?”

강우가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철금 회장의 고향은 공주였다. 공주 출신의 이철금 회장이 서울로 올라와 자수성가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뭐…. 말했다시피 보는 눈들도 있고. 그리고 회장님이랑 이야기가 좀 진전된 것도 있다.”

“정말요?”

강우가 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재원과 이철금 회장이 논의하는 것은 바로 김세아에 관한 것이었다. 이재원은 김세아의 존재를 정확히 세상에 드러내고 싶어 했다. 물론, 위에 언급했듯이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말이다.

“어, 생각해보면 회장님이 외도를 한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우리 엄마가 잘못한 거 아니잖아.”

“그렇죠.”

이철금 회장이 공주에 있을 적 만나 결혼했던 첫 번째 아내는 알려진 대로 이재진과 이재중을 낳고는 병으로 죽었다. 그 후 이철금 회장은 한동안 혼자 몸으로 지냈다. 그때, 김세아를 만나 사랑했고, 결혼까지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철금 회장과 김세아는 각자의 이유로 틀어졌다. 이철금 회장은 사업을 위해 다른 재벌가의 여식과 김세아는 연기를 위해 자신의 길을 가기로 했지.’

하지만 헤어지고 얼마 후 김세아가 임신한 사실이 밝혀졌다. 주변에서는 아이를 없앨 것을 권유했다. 김세아는 그런 사람들을 피해 숨었다. 그렇게 한동안 김세아는 숨어 지냈고, 건강하게 이재원을 낳았다. 세월이 흘렀고, 이재원의 존재를 알게 된 이철금은 크게 당황했다.

‘상황이 다르다지만 어쨌든 혼외자는 혼외자였으니까.’

그 후에 벌어진 일들은 지금껏 강우와 이재원의 만남을 통해 모두 밝혀진 대로였다. 현재 이재원은 이철금 회장과 김세아의 존재에 대해 발표하는 것을 논의 중이었다. 김세아는 현재 연예계에서 점점 이름을 알리고 있었고, 더 활발한 활동을 위해서는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재원이 형을 위해서도 꼭 해결하고 넘어가야 하는 일이지.’

대진 그룹은 그 사실을 밝히기 위해 서서히 언론에 분위기를 조성 중이었다. 현재까지 드러난 사실들을 접한 사람들은 이재원의 기구한 사연에 공감했고, 마음 아파했다. 물론, 그 와중에 이철금 회장이 욕을 먹기도 했지만, 이철금 회장은 그 정도 욕은 감수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라도 재원이 형한테 사죄하고 싶다고도 했고.’

이재원이 생각에 잠긴 강우를 보며 씩 웃었다.

“걱정하지 마. 이제는 네 형 주변에서 이 일로 뭐라고 한다고 해서 흔들릴 사람 아니니까.”

“그럼요. 형이 얼마나 단단해졌는데.”

“그게 다 너 덕분 아니겠냐?”

강우가 씩 웃었다. 처음 이재원의 사연을 접했던 날이 떠올랐다. 모든 것을 포기하듯 ‘나보고 어쩌라고?’라던 이재원이 떠올랐다. 그때는 정말이지 나약해 보이기도 했고, 그냥 하루하루를 막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당당한 그룹의 후계자이자 강우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당연하죠. 형이 나 아니었으면….”

“야!”

강우의 말에 이재원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뒷좌석에 있던 어머니가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은 이동하는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사업 이야기도 나누었고, 근황 이야기도 나누었다.

“어머니, 다 와 갑니다.”

이윽고 차량이 한남동 고급 주택 단지에 도착했다. 이재원이 낮은 언덕을 올라 목적지로 향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높은 담벼락들을 보며 짧게 탄성을 뱉어냈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장소를 직접 오니 기분이 이상했다.

“우와~ 어머니 집들이 정말 커요.”

이나은도 눈을 빛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는 길 곳곳에 높은 담벼락에 둘러싸인 저택들이 있었다.

“우리가 보러 갈 집은 조금 더 위로 올라가야 해요.”

이재원이 능숙하게 차를 몰아 올라갔다. 목적지에 다다르자 강우가 피식 웃었다. 이재원이 보여준다는 집은 이철금 회장의 집 바로 맞은편에 있는 곳이었다.

“왜? 맞잖아. 회장님 집 근처.”

이재원도 민망한지 슬쩍 웃었다. 이윽고 이재원이 목적지에 차를 세웠다. 커다란 저택 앞에는 부동산 관계자가 나와 있었다.

탁.

이재원과 강우 그리고 어머니와 이나은이 차에서 내렸다. 기다리고 있던 부동산 관계자가 반색하며 다가왔다.

“사장님, 부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로얄공인중개사의 김성한 부장입니다.”

오늘 중개를 담당한 중개사가 명함을 내밀어 강우와 이재원에게 주었다. 강우와 이재원이 품에서 명함을 꺼내 교환했다. 김성한이 강우를 보며 감탄을 했다.

“부사장님을 실물로 보니 텔레비전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훤칠하고 잘생기셨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김성한이 강우 뒤쪽에 있는 어머니와 이나은을 보고는 또 화들짝 놀랐다. 이나은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 어머니 역시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강우 엄마예요.”

“어머님이셨습니까? 저는 부사장님이 누님이랑 같이 왔는지 알았습니다.”

흔한 영업멘트였지만, 어머니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이재원이 김성한을 보며 말했다.

“오늘 준비된 매물이 여기죠?”

“네, 맞습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김성한이 저택의 입구로 향했다. 그리고 복잡한 보안단계를 거쳐 대문을 열었다.

“이곳에 있는 집들의 장점 중 하나가 바로 치안입니다. 저택마다 보안장치도 잘 설치되어 있고요. 저택 안의 프라이버시가 정말 잘 보장됩니다.”

대문이 열리자 어머니와 이나은이 감탄성을 터트렸다. 대문 너머로 몇 개의 계단 위로 보이는 널찍한 마당 때문이었다.

“이 집이 근처 저택 중에서 마당은 가장 넓습니다. 전에 이곳에 사시던 회장님께서 손주들을 위해 특별히 마당을 크게 지으셨거든요. 들어오시죠.”

강우와 이재원이 먼저 문으로 들어섰다. 그 뒤를 어머니와 이나은이 뒤따랐다. 계단 몇 개를 올라가자 넓은 마당이 더 훤히 보였다.

“여기는 강용이가 정말 좋아하겠다.”

“그러니까요. 강용이가 평소에 강아지도 엄청나게 키우고 싶어 했는데 잘됐어요.”

강용이는 동물을 참 좋아했다. 미래의 기억 속에서도 고양이를 몇 마리나 기를 정도였다. 원래는 대형견을 특히 좋아했는데 미래 기억 속에서는 대형견을 키울만한 여건이 되지 못했었다.

“하하. 마당 조경도 아주 신경 써서 되어 있습니다. 이곳에 심은 나무들 하나하나까지 전 회장님이 선택하셨을 정도니까요. 자자 이제 자택 건물을 좀 보시죠.”

김성한이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총 2층으로 지어진 커다란 저택이 있었다. 2000년대에는 보기 힘든 모던한 스타일의 2층 저택은 총 두 채로 이루어져 있었다. 강우가 바라보는 시점을 기준으로 왼쪽이 커다란 본채, 오른쪽이 별채였다.

“전 주인이신 회장님이 연세는 있으셔도 건축에 대한 조예가 아주 깊으셨습니다. 유럽의 유명 건축 디자이너에게 의뢰해서 건물을 지으셨을 정도니까요. 그리고 당연한 거겠지만, 건축에 들어간 자재들 역시 최고급으로 사용했습니다.”

김성한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이 저택은 매물로 나올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전 소유자가 급히 외국으로 나갔다. 그것도 가족들과 함께 말이다. 그렇게 급매물로 나오게 된 것이다.

“급매물로 나오는 바람에 가격도 시세보다 저렴하게 나왔습니다. 매물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부사장님이 처음으로 방문하시는 겁니다.”

“그렇군요.”

강우가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재원이 씩 웃었다.

“회장님이 이거 매물로 나왔다고 듣는 순간 네 생각났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특별히 중개사에 연락해서 네가 보기 전까지는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말라고 했단다.”

“감사하네요.”

이재원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 가족을 위해서 무언가 해주었다는 게 참 좋았다.

“고마우면 여기로 이사 와서 자주 놀러 오라고 하시더라.”

“아…. 그래요?”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김성한이 두 사람을 보며 감탄했다.

“역시 듣던 대로 정말 우애가 깊으십니다. 그럼 안쪽으로 들어가시죠.”

김성한이 저택의 문을 열었다. 저택으로 들어가는 문 역시 보안장치가 철저히 되어 있었다. 강우와 이재원이 먼저 집 안으로 들어섰다. 강우가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이 저택의 대지면적은 총 532평입니다. 저택은 지하 1층과 지상 2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주 널찍해서 많은 가족이 살기에도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김성한의 말대로였다. 눈앞에 펼쳐진 저택은 이철금 회장의 저택보다 훨씬 컸다.

“어머….”

뒤를 이어 집에 들어온 어머니가 입을 막으며 깜짝 놀랐다. 생각보다 크고 깔끔한 내부에 놀란 것이다. 이나은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니, 집이 정말 좋아요.”

“그래, 나은아. 정말 좋아.”

강우가 김성한을 바라보며 물었다.

“집을 좀 자세히 둘러봐도 되겠죠?”

“당연합니다. 둘러보시고 궁금한 부분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물어봐 주십시오.”

사실 구석구석 안내를 하려 했던 김성한이었다. 하지만 고객이 천천히 둘러보기를 원하니 당연히 그에 맞췄다. 강우는 이재원과 함께 이 층으로 향했다.

“오…. 여기도 좋네요.”

“그러게 방도 많고.”

강우가 이곳에서 생활하게 될 그림을 그려보았다.

‘본채에는 할아버지랑 작은할아버지 그리고 우리 가족이 살고. 옆에 별채에는 큰집 가족들이 살면 딱 맞기는 할 텐데.’

강우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강우와 이재원은 한참이나 집을 둘러보았다. 어머니와 이나은도 꼼꼼히 집을 살펴보았다.

“완벽해.”

집을 모두 둘러본 어머니의 감상평이었다. 어머니는 정말, 이 저택이 마음에 드시나 보다. 강우가 어머니를 향해 물었다.

“그렇게 마음에 드세요?”

“응, 무엇보다 다 같이 모여서 살 수 있는 게 참 좋아.”

어머니가 부드럽게 웃었다. 떨어져 있던 시간만큼 더 똘똘 뭉쳐서 살고 싶은 게 어머니 마음이었다.

“좋아요. 그러면 여기로 결정하죠.”

강우의 말에 김성한이 화들짝 놀랐다. 집을 보러온다고 했으니 몇 개의 매물을 더 보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제가 매물 몇 개를 더 준비하기는 했지만 여기만 한 곳은 없다고 자신합니다.”

“오늘 바로 계약하겠습니다.”

김성한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듣던 대로 화끈한 면이 있는 강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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