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원래 내 이름이었거든.
끼이익.
버스가 급하게 멈춰 섰다. 어젯밤의 잔치 덕분에 잠들어있던 가족들의 몸이 출렁거렸다. 그리고 한두 명씩 잠에서 깨어났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는 차가 못 들어가겠는데요?”
막내 할아버지가 지내던 동네는 길이 좁은 골목길이 많았다. 양쪽으로 늘어선 차들 덕분에 미니버스가 진입하기가 힘들었다.
“그럼 일단 근처에서 기다려 주세요. 빨리 갔다가 올게요.”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막내 할아버지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막내 할아버지가 사시던 광주 집에 온 것이었다.
“강우야, 나도 같이 가자꾸나.”
“네, 작은할아버지.”
막내 할아버지야 당연히 같이 가야 했다. 광주집을 떠나던 날 집에 놓고 온 중요한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강우와 막내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할아버지도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나도 가자꾸나.”
“형님….”
막내 할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보며 망설이듯 말했다. 할아버지에게 어렵게 살던 자신의 흔적을 보여주기가 싫었다. 부끄러움보다는 할아버지가 속상해하실까 봐서였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단호했다.
“괜찮다. 네가 어찌 살았던 그것 또한 너의 삶이었다. 나는 그걸로 더는 가슴 아파하지 않기로 했다.”
“네, 형님….”
결국, 강우와 할아버지 그리고 막내 할아버지가 차에서 내렸다.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따라나서려 했지만, 할아버지가 말렸다. 강우와 함께 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하셨다.
“제가 안내할게요.”
강우가 앞장서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길눈이 밝았던 강우였다. 거기다가 엄청난 기억력까지 얻었으니 내비게이션 저리 가라였다. 두 분 할아버지가 강우를 따라 길을 걸었다.
“이 동네에서 수십 년을 산 거야?”
“네, 형님. 애육원을 운영할 때는 저 아래쪽에 살았고요. 애육원을 닫고 나서는 지금 가는 곳에 살았습니다.”
할아버지는 막내 할아버지가 살던 동네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막내 할아버지가 살아온 흔적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고 싶어 했다. 이윽고 강우와 두 분 할아버지가 언덕의 초입에 도착했다. 언덕의 초입에는 예의 그 슈퍼가 있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슈퍼 앞 평상에 나와 있던 가게 주인이 강우와 막내 할아버지를 알아보았다. 특히 막내 할아버지를 보고는 크게 반가워했다.
“잘 지냈는가?”
막내 할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었다. 가게 주인이 막내 할아버지를 보며 감격스러워했다. 예전과는 너무 달라진 막내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울긋불긋했던 피부병은 몰라보게 좋아져 있었고, 늘 허름하게 입었던 옷도 깔끔해져 있었다. 적당히 살이 올라 보기 좋은 얼굴에는 편안함이 엿보였다.
“사람이 이리 달라질 수 있단 말이야? 정말 보기가 좋군.”
“허허…. 그런가?”
막내 할아버지가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가게 주인이 슬쩍 옆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안녕하십니까? 전 중후의 동네 친구인 황규범이라고 합니다. 텔레비전에서 많이 뵈었습니다. 평소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반갑습니다. 박재봉이라 합니다.”
가게 주인 황규범이 할아버지를 보며 정말 존경의 눈빛을 마구 뿜어냈다. 할아버지가 멋쩍게 웃었다. 황규범이 이번에는 강우를 바라보며 반가워했다.
“지난번에 왔을 때 이런 일이 생길 줄 정말 몰랐는데…. 중후의 가족이었을 줄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저도 작은할아버지를 찾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그때, 친절히 집을 알려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황규범이 뿌듯하게 웃었다. 단지 집을 알려준 것뿐이었지만, 친구의 가족을 찾는 데 무언가 보탬이 된 거 같았다.
“이보게 중후.”
“이제는 재민이라고 불러주게. 그게 원래 내 이름이었거든.”
막내 할아버지의 말에 황규범이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잃어버렸던 친구의 진짜 이름을 처음 불러보았다.
“그래, 재민. 오늘 집에 있는 물건을 정리하러 온 거야?”
“맞아. 집을 정리하러 왔지.”
황규범의 얼굴에 잘됐다는 표정과 조금의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럼 이제 서울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겠군?”
“아마도 당분간은 그러지 않겠는가?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 내 자네를 어찌 잊고 살겠는가. 종종 내려와 술친구 해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막내 할아버지의 어려움 삶 속에서 몇몇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삶을 이어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작은 슈퍼의 주인인 황규범은 특별한 사람이었다. 늘 외상을 하는 것을 투덜거렸지만, 단 한 번도 외상값을 청구하지 않았다. 때로는 외상값을 받으러 왔다며 두 손에는 먹을 것을 들고 오기도 했다.
“그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를 잊고 살면 안 되지. 암 그렇고말고.”
황규범의 사뭇 진지한 표정에 막내 할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내려오는 길에 또 들르겠네.”
“얼른 올라가 봐. 아…. 잠깐.”
황규범이 급히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비타민 음료 세 병을 들고나왔다.
“날이 더우니 시원하게 한 병씩 마시면서 올라가게.”
“고맙네.”
막내 할아버지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려 했다. 그러자 황규범이 정색을 하며 막내 할아버지의 손을 밀어 넣었다.
“어허! 내가 언제 돈 받자고 이러는가. 그럴 거였으면 진작에….”
“알겠네. 알겠어.”
막내 할아버지가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그리고는 황규범의 손을 꽉 잡았다.
“고맙네.”
“다녀와. 형님 기다리신다.”
막내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와 할아버지 그리고 막내 할아버지가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형님, 안 힘드세요?”
언덕의 중간쯤 도착했을 때 막내 할아버지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가 막내 할아버지를 보며 씩 웃었다.
“막내야, 형님이 아직 이 정도는 문제없다.”
할아버지가 ‘영차.’하는 소리를 내시며 다시 언덕을 오르셨다. 강우와 막내 할아버지가 빠르게 뒤를 따랐다. 이윽고 세 사람이 막내 할아버지가 지내던 집에 도착했다.
끼이익-
낡은 대문이 열리고 적막이 흐르는 마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나마 온기를 채우던 막내 할아버지가 오래 자리를 비운 탓에 마치 폐가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으음….”
막내 할아버지가 살던 집을 확인한 할아버지가 침음성을 흘렸다. 막냇동생이 이런 환경에서 살았다고 하니 정말 속상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바꾸셨다. 지금 보고 있는 곳은 과거였으니까 말이다.
“그래, 일단 챙겨야 할 짐을 정리하자꾸나. 강우야, 네가 좀 도와주거라.”
“네, 할아버지는 앉아 계세요. 제가 작은할아버지 도와서 빨리 끝낼게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시고는 마당에 있는 평상에 앉으셨다. 그리고 마당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드르륵.
방문이 열리고 작은 주방이 보였다. 자리를 오래 비웠지만, 이상하리만큼 깨끗했다. 막내 할아버지는 그 이유를 알고 계셨다.
“복지사 아가씨가 다녀갔나 보구만.”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를 돕던 사회복지사 직원을 말하는 것이었다.
“지난번에 통화한 그분이요?”
“그래, 맞다.”
막내 할아버지와 함께 서울로 가고 나서 연락이 한 통 왔었다. 연락해온 사람은 할아버지를 돕던 사회복지사였다. 막내 할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지고 한동안 돌아오지 않아 연락처를 수소문했고, 강우와 연락이 닿은 것이다.
“고마우신 분이네요.”
“아주 심성이 착하고 부지런한 아이야.”
막내 할아버지가 사회복지사를 떠올리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강우와 막내 할아버지는 빠르게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난번 급히 떠나느라 정리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이제 대충 된 거 같아요.”
“그래, 이거면 충분하겠구나.”
막내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집 안을 둘러보았다. 이제 이 집은 한동안 아니 영원히 비어있을 것이었다. 애육원을 정리하고 남은 재산으로 샀던 집이었다. 가격도 얼마 하지 않았기에 팔거나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임대를 하기도 애매했다. 그래서 그냥 놔두기로 한 것이다.
드르륵.
강우와 막내 할아버지가 다시 마당으로 나왔다. 할아버지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멀리 보이는 시내를 바라보고 계셨다.
“막내야.”
“네, 형님.”
할아버지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말을 이어가셨다.
“애육원이 있던 자리가 어디쯤이더냐?”
“저기 보이는 시내 외곽에 있었습니다.”
막내 할아버지가 시내의 한쪽을 손을 들어 가리켰다.
“그래, 어쩌면 네가 나를 다시 만나게 된 것도 그리 좋은 일을 하고 살아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구나.”
“아닙니다. 그냥 저는….”
막내 할아버지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애육원은 자신의 젊은 날을 모두 쏟아부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막내 할아버지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아이들을 돌보고 성장시켰다. 그런 아이들이 좋은 곳에 입양을 갈 때면 걱정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마음을 졸였다. 입양 가지 못한 아이들이 나이가 되어 애육원을 나갈 때면 걱정을 금치 못했다.
“어찌 보면 애육원은 제게도 울타리였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곳에 있을 때면 꼭 가족이 날 찾아와 줄 거 같기도 했습니다. 아이들과 하루하루를 보내며 마음의 위안을 얻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 욕심만 너무 앞섰는지 모르겠습니다. 애육원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해 이렇게 사라지게 만들었으니 말입니다.”
막내 할아버지가 긴 숨을 뱉어냈다. 애육원을 뿌리라고 생각하고 의지하던 아이들이 많았다. 그곳이 자신을 버린 혹은 잃어버린 가족들과의 유일한 연결고리라고 생각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막내 할아버지는 그런 애육원을 끝까지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은 냉정했고, 돈은 냉혈한처럼 차가웠다.
“막내야, 그럼 다시 한번 애육원을 만들자꾸나.”
할아버지가 막내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막내 할아버지가 놀라움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형님….”
“물론, 나는 너를 다시 이곳에 살게 할 생각은 없다. 너는 남은 삶을 내 옆에서 보내야지. 다만 애육원을 다시 세우고 적당한 사람에게 운영을 맡기면 되겠지.”
말을 마친 할아버지가 강우를 바라보았다. 역시 이런 일은 강우가 나서야 하는 것을 알았다. 할아버지의 믿음이 가득 담긴 시선에 강우가 씩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이미 알아봤어요. 애육원 건물은 지금 개인이 사들여서 리모델링을 했다고 해요. 지금은 일반 가정집으로 사용 중이고요.”
막내 할아버지가 감탄성을 뱉어냈다. 어찌 저리도 영특하고 현명한지 참 대단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벌써 건물 주인한테 매입 의사를 밝혀놓은 상태에요. 우리 쪽 사정을 들은 건물주인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고요. 좋은 일에 쓴다고 하니까요. 아마 조만간 건물을 다시 사들일 수 있을 거 같아요.”
“역시 내 손자다.”
할아버지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강우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강우가 씩 웃었다.
“건물 매입이 끝나면 가능한 한 옛날 모습 그대로 복원해 보려고 해요. 이름도 다시 애육원으로 하고요. 그리고 애육원을 운영할 분은 따로 찾아볼 생각이에요.”
막내 할아버지가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기억을 찾아 가족을 찾았다고는 하지만, 자신을 구해준 그리고 길러준 분의 고마움은 평생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분이 피땀 흘려 이루어낸 애육원을 지키지 못한 것이 늘 죄송스러웠다.
“고맙다. 강우야.”
막내 할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고마워했다. 마지막 남았던 가슴속의 응어리가 지금 이 순간 실타래 풀리듯 풀려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