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7화 (277/402)
  • 아버지…. 어머니…. 막내가 왔습니다.

    부우웅.

    온 가족이 미니버스 안에 오순도순 타고 있었다. 검은색 계통의 정장과 옷으로 통일한 가족의 분위기는 차분했다. 그럴 만도 했다. 오랜만에 찾아가는 광주는 강우 가족에게는 뿌리나 다름없었다. 다만 할아버지가 언급을 잘 하지 않으셨기에 아버지도 큰아버지도 한 번도 와보지 않았다고 했다.

    “아버님, 피곤하지 않으세요?”

    어머니가 앞자리에 앉아계신 할아버지를 향해 물었다. 할아버지는 두 눈을 감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할아버지가 두 눈을 뜨셨다.

    “아니다. 괜찮다.”

    말은 그렇게 하셨지만, 할아버지의 두 눈에는 피곤함이 가득했다. 오랜만에 내려가는 귀향길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탓이다. 어머니가 준비해 온 보온병에서 쌍화차를 따라 할아버지께 드렸다.

    “이것 좀 드세요. 훨씬 괜찮아지실 거예요.”

    할아버지가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의 심정을 눈치채고 참 살뜰히도 챙기는 며느리였다. 그리고 둘째이자 사실상 막내며느리였지만, 집안의 윤활유 같은 존재였다.

    “고맙다.”

    할아버지가 쌍화차를 받아서 단숨에 마셨다. 보온병에 있던 쌍화차는 딱 적당히 뜨거웠다. 쌍화차가 식도를 타고 넘어가며 온몸에 따듯한 온기가 들었다. 더운 여름이라 차 안에는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져 있었다. 할아버지가 다시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 어머니….’

    이렇게 늦게나마 찾아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동안의 불효에 가슴 깊이 죄송함을 느꼈다. 할아버지가 슬쩍 옆을 바라보았다. 막내 할아버지는 쌍화차를 훌쩍 마시며 설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었다.

    부우웅.

    차량은 달리고 달려 광주시에 들어섰다. 시내로 들어선 차량은 곧장 동림동의 외곽으로 향했다. 이윽고 차량이 한적한 시골길에 들어섰다.

    “으음….”

    막내 할아버지가 엉덩이를 들썩거리셨다. 오래전 기억이었고, 달라진 건물들이었다. 하지만 익숙한 지형이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형님….”

    “그래, 여기가 예전에 우리가 살던 곳이다.”

    막내 할아버지가 긴 숨을 뱉어냈다. 동림동이라는 말만 들었을 뿐 정확한 위치를 알 수는 없었다. 막연히 동림동을 헤매도 보았지만. 이곳을 찾을 수는 없었다. 아니 빠듯한 생활에 치여 더 찾는 것을 포기하기도 했었다.

    “기억납니다. 저 산에서 뛰어놀다가 해가 져서 헤맨 적이 있었죠. 그때도 형님이 직접 찾으러 와주셨어요.”

    “맞아. 그때 내가 너를 좀 엄하게 혼냈었지.”

    할아버지가 옛 기억을 떠올리며 씩 웃으셨다. 어렸을 적 막내 할아버지는 참 개구쟁이였다. 이윽고 차량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바로 박씨 가문의 선묘가 있는 곳이었다.

    삐이이익-

    미니버스의 뒷문이 열리고 강우가 먼저 내렸다. 그리고 한 명씩 한 명씩 가족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강우가 미니버스의 뒤쪽으로 다가갔다.

    덜컹.

    트렁크 문이 열리자 안쪽에는 아이스박스가 여러 개 들어있었다. 모두 오늘 선묘에 가지고 갈 음식들이었다. 어제 종일 어머니와 큰어머니가 정성을 들여 만든 음식들이었다. 온 가족이 먹어야 하기에 양도 대단히 많았다. 강우가 아이스박스를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형아, 내가 도와줄게.”

    강용이가 다가와 강우를 거들겠다고 했다.

    “그래, 그러면 가벼운 것만 좀 들어줘.”

    “응.”

    강용이가 강우를 도와 자잘한 짐들을 내렸다. 박선영과 박지영도 어느새 다가와 짐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에서 이나은이 내렸다. 검은색 투피스 정장을 입은 이나은이 내리자 주변이 밝아지는 듯했다.

    “강우야, 나도 도울게.”

    이나은도 짐을 내리는 것을 돕기 시작했다. 이윽고 트렁크에서 짐을 모두 내렸다. 강우가 오늘 운전을 맡아준 버스 기사에게 다가갔다.

    “점심 식사하고 오세요. 연락드릴게요.”

    강우가 품에서 지갑을 꺼내 현금을 건네주었다. 버스 기사가 환하게 웃었다.

    “아이쿠…. 점심값은 안 주셔도 되는데.”

    “아니에요. 오늘 안전하게 운전해주셔서 정말 편하게 왔어요.”

    “감사합니다.”

    버스 기사가 역시 강우라는 생각을 했다. 알려진 대로 배려심이 깊고 참 겸손했다.

    부우웅.

    버스가 잠시 자리를 떠났다. 강우의 말대로 시내로 향해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다 돌아올 것이다.

    “자자. 올라가자꾸나.”

    할아버지의 말이 끝나자 강우 가족들이 일제히 선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강우 가족의 앞으로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할아버지가 걸음을 멈추셨다.

    “......”

    그리고 물끄러미 마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몇 가구가 남지 않은 마을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극히 적었다. 마을에는 나이가 든 사람들만이 고향을 지키며 살고 있었다.

    “형님….”

    막내 할아버지가 마을을 바라보며 탄성을 뱉어냈다. 어릴 적 살던 곳에 오니 기억들이 더 떠오른 것이다. 이곳에서 살며 수많은 추억이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전쟁의 공포와 참상에 막내 할아버지는 무거운 마음이었다.

    “가자꾸나.”

    할아버지가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할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선묘는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뒤쪽 산 쪽에 있다고 했다. 그렇게 마을 안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아니! 이게 누구야? 재봉인가?”

    마을 한쪽에서 열심히 농사하던 어르신 한 명이 할아버지를 알아보았다. 세월이 지났어도 범같이 생긴 그 느낌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할아버지가 자신을 부른 남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경선인가?”

    “맞아. 나 경산일세. 박경선.”

    박경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르신이 논에서 몸을 빼냈다. 그리고 할아버지 앞에 섰다.

    “오랜만이군. 자네가 고향을 지키고 있을 줄 몰랐네.”

    “아닐세. 나도 타지 생활을 하다가 이곳에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으이.”

    할아버지와 박경선은 제법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박경선의 시선이 할아버지 옆쪽에 있는 막내 할아버지를 향했다. 그리고 짧게 신음성을 흘렸다.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는 닮아있었다.

    “서…. 설마?”

    “맞네. 내 동생 재민이.”

    박경선이 깜짝 놀라며 입을 벌렸다. 그리고 막내 할아버지를 자세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막내 할아버지가 민망한 듯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제가 기억을 잃었다가 찾아서 누구이신지 기억을 잘하지는 못합니다.”

    “아….”

    박경선이 탄식을 뱉어냈다. 오랜 세월 막내 할아버지를 찾지 못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랬구나. 그랬어. 재민아, 나는 네 형인 재봉이와는 동향 친구다. 너도 나와 같이 동네에서 같이 자랐으니 기억이 전혀 없지는 않을 거야.”

    “형님의 친우분이셨군요.”

    막내 할아버지가 조금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와 가족에 대한 기억을 대부분 돌아왔지만, 자신의 어렸을 적 기억이 모두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아니다. 이렇게 재봉과 다시 만난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기억은 지나간 날일 뿐이니까.”

    “.....”

    박경선이 막내 할아버지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리고는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래, 이렇게 막내를 찾아서 선묘에 인사를 드리러 온 게구만?”

    “그렇네…. 그동안 내 부모님께 불효가 컸지.”

    할아버지의 얼굴에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그 표정을 읽은 박경선이 부드럽게 웃었다.

    “걱정하지 말게. 부모님의 묘는 마을에서 잘 관리를 해오고 있었으니까.”

    “고맙네…. 정말….”

    할아버지가 박경선의 손을 잡고 고마움을 표했다. 오랜 세월 방치되었을지도 모르는 선묘였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따듯한 손길로 잘 관리가 되고 있다고 했다.

    “아닐세. 자네 부모님이 우리 마을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베푸셨는가? 자네 부모님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지 않던가. 그런 말 하지 말게. 그분들에게 우리 마을 사람들이 진 빚도 있으니….”

    박경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북한군이 마을의 유지라며 박씨 가문의 일원을 모두 총살하던 날이 떠올랐다. 그 광경을 보며 느꼈던 슬픔과 충격이 정말 너무나 컸다. 그리고 총부리 앞에 굴복해 지켜주지 못했던 것을 마을 사람들은 평생의 죄책감으로 안고 있었다.

    “그런 말 하지 말게. 그때는 다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

    할아버지가 박경선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죽음의 공포를 맞서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할아버지만큼 잘 아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래, 선묘로 바로 올라갈 건가?”

    “그래야지.”

    박경선이 할아버지 뒤쪽에 있는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많은 수의 가족들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따듯해졌다.

    “아…. 우리 가족들일세.”

    할아버지의 말이 끝나자 강우를 비롯한 가족들이 일제히 인사를 했다. 박경선이 부드럽게 웃으며 마주 인사를 했다.

    “반갑네. 재봉의 가족들이면 우리 마을 사람들이나 진배없지.”

    “반겨주어서 고맙군.”

    “이런 내가 너무 가족들을 오래 붙잡고 있었군. 어서 올라가 보게나.”

    “알겠네. 선묘에 들렸다가 마을 회관에 잠시 들르도록 하지.”

    박경선이 알겠다고 하며 다시 논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막내 할아버지와 가족들도 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을을 지나쳐 뒷산에 오른 가족들 앞에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아….”

    공터에 깔끔히 정리되어 있는 봉분을 발견한 할아버지가 탄성을 뱉어냈다. 햇빛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에 여러 개의 봉분이 있었다. 바로 할아버지의 부모님과 누이들이 잠든 곳이었다.

    “형님, 이곳입니까?”

    “그래, 이곳이다.”

    막내 할아버지가 떨리는 눈빛으로 봉분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조심히 발걸음을 옮겼다.

    “박진식…. 조민숙….”

    막내 할아버지가 두 이름을 되뇌었다. 그리고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꿈에도 그리던 부모님의 이름이었다. 막내 할아버지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버지…. 어머니…. 막내가 왔습니다.”

    그 숙연함에 가족들 모두의 분위기가 낮게 가라앉았다. 할아버지가 막내 할아버지의 옆에 다가가 같이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어머니. 제가 막내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 불효자가 이제야 왔습니다.”

    “형님….”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가 부모님의 묘비를 쓰다듬었다. 이윽고 막내 할아버지의 시선이 옆쪽을 향했다. 그곳에는 두 개의 봉분이 더 있었다.

    “누이들….”

    바로 돌아가신 고모할머니인 박선영과 박지영의 봉분이었다. 막내 할아버지가 그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목 놓아 울었다. 마지막 순간 자신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지영 누이를 떠올렸다. 그리고 친누나 이상으로 자신을 돌봐주었던 선영 누이도 떠올렸다.

    “어찌 그리 황망히 가신 겁니까.”

    막내 할아버지가 깊은 슬픔에 잠겼다. 할아버지도 누이들의 봉분을 보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나서 두 할아버지를 위로했다.

    “아버지….”

    아버지와 큰아버지의 위로에 두 할아버지의 슬픔이 진정됐다. 그러자 어머니와 큰어머니가 가지고 온 음식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나은과 박선영 그리고 박지영이 어머니와 큰어머니를 도왔다.

    “다들 이리로 와서 서거라.”

    이윽고 모든 준비가 끝났다. 할아버지가 가족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강우와 가족들이 할아버지의 뒤쪽으로 나란히 섰다. 이나은은 강우 옆에 바짝 붙었다.

    “아버지, 어머니. 여기 모인 모두가 우리 박씨 가문의 자손들입니다. 참 보기 좋지요?”

    할아버지가 먼저 큰아버지의 등에 손을 올렸다.

    “이 아이가 제 장남입니다. 말수는 적고 무뚝뚝해 보이지만 참 정이 많고 배려심이 깊은 아이입니다. 그리고 여기는 우리 집 큰며느리입니다. 어찌나 부지런하고 묵묵한지 집안의 큰며느리로 손색이 없습니다. 여기는 큰아이의 장녀 선영이 여기는 차녀 지영이입니다. 두 아이의 이름은 제 누이들을 본떠 지었습니다.”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그리고 박선영과 박지영이 봉분을 향해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드렸다. 할아버지가 그다음으로는 아버지에게 손을 올렸다.

    “이 아이가 제 차남입니다. 셈에 밝고 사업적 기질이 강한 건 딱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여기는 우리 둘째 며느리입니다. 집안에 없으면 안 될 윤활유 같은 아이입니다. 참 착하고 심성이 고와요. 여기는 우리 집 막둥이 강용이입니다. 제가 요즘 이놈 때문에 웃습니다.”

    할아버지가 씩 미소를 지었다. 강용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참 기분이 좋았다.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이 아이가 저희 가문의 장손 강우입니다. 저희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가족 모두를 화목하게 하고 막내를 찾아준 아이입니다. 저희 가문의 대들보이자 보물입니다.”

    할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뿌듯해했다. 다른 가족들 모두가 강우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지금 모인 가족들 모두가 강우가 해낸 것들을 다 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아이는 참 예쁘죠?”

    할아버지가 이나은을 바라보았다. 이나은이 깜짝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이나은이 부끄러운지 강우의 옆에 더욱 바싹 붙었다. 할아버지 그 모습을 보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 아이가 우리 장손의 짝입니다. 언제 인연을 맺을지 모르겠지만, 증손주까지 보고 갈 수 있게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다 가겠습니다.”

    할아버지의 말이 끝나자 강용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어? 할아버지, 나 장가갈 때까지도 오래오래 우리랑 살아야죠.”

    강용이의 말에 가족들이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강용이는 분위기메이커가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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