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4화 (274/402)
  • 그게 가족이지.

    쏴아아아-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감자탕집에서 식사를 마친 강우와 두 분 할아버지가 입구에 서있었다. 할아버지가 쏟아지는 비를 보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이거 갑자기 비가 이렇게 오다니….”

    “형님, 우산도 없는데 잠깐 가게에 들어가 있을까요?”

    “그럴까?”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가 가게로 다시 들어가려 했다. 그때, 계산을 마치고 나온 강우가 두 분을 보며 물었다.

    “와…. 비 엄청나게 오네요.”

    “그러게 말이다. 가게에 들어가 있자꾸나.”

    강우가 씩 웃었다.

    “아니에요. 편의점 가서 우산 사 올게요.”

    “비가 너무….”

    할아버지가 말릴 사이도 없이 강우가 총알처럼 뛰어나갔다. 그 모습을 본 막내 할아버지가 탄성을 뱉어냈다.

    “형님, 강우는 참 달리기도 잘합니다.”

    “그럼, 운동도 얼마나 잘하는데.”

    막내 할아버지가 옛 기억을 떠올렸다. 한번 떠오르기 시작한 과거의 기억은 비가 온 뒤 죽순이 자라듯 마구 떠올랐다.

    “형님도 참 운동을 잘하셨는데요.”

    “그랬지.”

    할아버지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젊을 적을 기억해주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지금 옆에 있는 혈육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정정하신가 봅니다.”

    “정정하기는…. 이제 나도 늙었어. 몇 년 전에는 크게 아파서 수술까지 했고.”

    처음 듣는 할아버지의 수술 이야기에 막내 할아버지가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형님….”

    “괜찮아. 이제 아주 건강해.”

    막내 할아버지가 행여 걱정할까 수술 사실을 말하지 않았던 할아버지였다. 하지만 오늘 건강히 퇴원했으니 말을 할 수 있었다. 막내 할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형님, 나이 들면 아픈 게 제일 서럽다고 합니다. 우리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요.”

    “그래 막내야, 우리 헤어져 있었던 시간만큼 더 오래 살자꾸나.”

    할아버지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막내 할아버지를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나이가 얼마나 먹었던 할아버지에게 막내 할아버지는 어릴 적 동네는 뛰어놀던 개구쟁이의 기억만 있었다.

    쏴아아아-

    빗줄기는 점점 거세어졌다. 이제는 한 치 앞도 안 보일 만큼 굵어진 빗줄기였다. 막내 할아버지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우산을 사러 간 강우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형님, 강우가 안 오네요.”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막내 할아버지는 근심이 많았다. 할아버지가 그런 막내 할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쟁통에 피난을 가고 북한군을 피해 동굴에서 처참한 생활을 해야 했다. 그 와중에 머리를 심하게 다쳐 생사를 헤매기도 했다.

    ‘기구하구나. 기구해.’

    그뿐이던가. 전쟁이 끝나고는 고아나 다름없는 삶을 살아야 했다. 애육원의 초대 원장이 보살펴 줬다고는 하지만, 그 사람 역시 아픔이 있는 사람이었다. 서로를 따스하게 보듬기에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슬픔이 너무 컸다. 그런 삶 때문이었을까? 막내 할아버지에게서는 간혹 슬픔과 외로움이 진하게 느껴졌다.

    “으아!”

    그때, 멀리서 강우가 달려오고 있었다. 양손에 우산이 들려있었지만, 왜인지 쓰지는 않고 말이다. 강우가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 앞에 도착했다. 온몸이 젖어버린 강우를 보며 막내 할아버지가 물었다.

    “강우야, 우산을 쓰고 오지 그랬니.”

    “아…. 오래 기다리실까 봐요. 그리고 어차피 가는 길에 다 젖었어요.”

    강우가 밝은 미소를 지었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 보며 막내 할아버지가 울컥했다. 가족이라는 것은 이런 작은 희생 하나하나에도 감동을 주는 존재인가 싶었다.

    “여기 우산이요.”

    강우가 막내 할아버지에게 우산을 내밀었다. 막내 할아버지가 우산을 받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좋구나. 비가 올 때 우산이 없어도 가져다줄 누군가가 있다는 게. 세상에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게 말이야.”

    “그게 가족이지.”

    할아버지가 막내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리고 강우에게서 우산을 받았다. 할아버지가 우산을 힘차게 펼쳤다.

    “가자꾸나. 하늘을 보니 비가 멈출 거 같지도 않고.”

    “네, 형님.”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가 우산을 쓰고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강우가 자신의 몫인 우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미 다 젖었지만, 우산을 쓰기는 써야 했다.

    ‘다 젖은 몸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마르겠지.’

    강우가 막내 할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마 흠뻑 젖은 막내 할아버지의 외로움이 마르기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았다.

    “같이 가요.”

    강우가 어느새 멀어진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나란히 서서 집으로 향했다. 비가 오는 길을 걷는 것은 참 운치가 있었다. 강우는 비가 오는 날을 참 좋아했다.

    * * *

    덜컥.

    문이 열리고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가 들어왔다. 감자탕집에서 소주를 나누어 드신 두 분의 얼굴은 불그스름하게 올라와 있었다. 신발을 벗고 나란히 집으로 들어온 두 할아버지를 어머니가 반겼다.

    “어머, 두 분 많이 젖으셨어요.”

    “어멈아, 밖에 비가 엄청나게 와.”

    할아버지가 몸에 묻은 물기를 툭툭 털어냈다.

    “빨리 들어가서 씻으세요. 감기 걸리겠어요.”

    어머니의 재촉에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가 화장실로 향했다. 막내 할아버지는 안방의 화장실로 할아버지는 거실 쪽에 있는 화장실로 말이다.

    “어머, 아들! 왜 그렇게 젖었어?”

    “갑자기 비가 와서요.”

    어머니가 베란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엄청 많이 오네.”

    “네, 갑자기 쏟아지네요.”

    “미안, 엄마가 요리에 집중하느라 몰랐네. 우산이라도 가지고 마중 나가는 건데.”

    “아니에요. 제가 구해서 할아버지들은 많이 안 맞으셨어요.”

    “그래, 우리 아들 착해. 어서 가서 너도….”

    씻으라고 말하려던 어머니가 멈칫했다. 집에 화장실이 두 개였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조금 기다렸다가 씻으면 돼요.”

    강우는 일단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옷을 갈아입었다. 옷을 세탁기에 넣으러 강우가 방 밖으로 나왔다.

    “아들, 이것 좀 마셔.”

    어머니가 모락모락 연기가 나는 컵을 내밀었다. 강우가 컵을 받아 코로 가져갔다. 향긋한 약재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어? 쌍화탕이에요?”

    “응, 엄마가 할아버지들 드리려고 끓였어.”

    강우가 입을 살짝 벌리며 놀라워했다. 이제는 쌍화탕까지 직접 끓이시는 어머니였다.

    “와…. 이걸 직접 끓이셨어요?”

    “응, 이제 할아버지들 건강을 본격적으로 관리하려고.”

    어머니가 다짐하듯 눈을 빛냈다. 강우가 어머니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엄마, 진짜 대단하세요. 우리 엄마가 역시 슈퍼우먼이라니까요.”

    “그렇지? 네가 생각해도?”

    어머니가 싱긋 웃었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했다.

    “강우야, 빨리 씻어라.”

    거실 화장실로 들어가신 할아버지가 씻고 나오셨다. 젖은 강우를 위해 빨리 씻고 나오신 듯했다. 강우가 씻으러 들어갔다. 어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쌍화탕을 드렸다.

    “어이구, 어멈아. 이거 만들기 힘들 텐데.”

    “만드는데 재밌었어요. 드셔보세요.”

    “그래, 고맙다.”

    이윽고 막내 할아버지도 샤워를 마치고 나오셨다. 그리고 역시 어머니표 쌍화탕을 마셨다. 두 분 할아버지가 식탁에 앉아 쌍화탕을 음미했다.

    “허허…. 좋구나.”

    “네, 형님. 따듯하고 좋습니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쌍화탕의 따스함이 가슴까지 데워주는 듯했다. 이윽고 샤워를 끝낸 강우가 나왔다.

    “일단 백화점에서 물건이 오면 작은할아버지 방부터 정리할게요.”

    가족들이 오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있었다. 가장 빨리 집에 올 강용이도 학원을 마치고서 오니까 말이다. 세 남자가 식탁에 앉아 망중한을 즐겼다. 어머니는 주방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요리를 했다.

    딩동. 딩동.

    그때, 벨 소리가 울렸다.

    “백화점인가 봐요.”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터폰을 확인했다. 그리고 ‘어?’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화면 너머로 아름다운 한 명의 여인이 서있었다. 상대방을 확인한 강우의 입꼬리가 찢어질 듯 휘어져 올라갔다.

    “엄마! 나은이 왔어요!”

    “어? 그래? 오늘 바쁘다고 했는데?”

    강우가 현관문을 열었다. 이나은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미소에 강우가 헤벌쭉 웃었다.

    “나은아, 어떻게 된 거야? 오늘 바쁘다며?”

    “그랬는데 내가 오늘 스케줄 비울 수 있으면 비워 달라고했어.”

    “정말?”

    강우가 이나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는 집 안으로 살짝 끌어당겼다.

    “강우야, 이거.”

    이나은의 손에는 쇼핑백이 들려있었다. 막내 할아버지를 드릴 선물을 사 온 것이다. 강우가 흐뭇하게 웃었다.

    “고마워.”

    이나은이 싱긋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먼저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를 향해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 왔어요.”

    할아버지가 환하게 웃었다. 언제 보아도 기분이 좋아지는 이나은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의 짝이었으니 말이다.

    “그래, 우리 나은이 왔구나. 바쁠 텐데 어떻게 온 거야?”

    “오늘 작은할아버님 퇴원 날이시잖아요. 그리고 오늘 가족 파티도 있고요.”

    “그럼 그럼. 우리 나은이가 가족 모임에 빠져서는 안 되지.”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셨다. 이나은이 이번에는 막내 할아버지를 향해 인사했다.

    “작은할아버지, 퇴원 축하드려요.”

    “고맙구나.”

    막내 할아버지가 인자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했다. 강우가 이나은이 사 온 선물을 막내 할아버지에게 드렸다.

    “이거 나은이가 작은할아버지 드리려고 사 온 거예요.”

    “선물을? 이거 내가 오늘 복이 터졌구나.”

    막내 할아버지가 선물을 뜯어보았다. 이나은이 사 온 선물은 모시로 만든 옷이었다.

    “피부에 자극이 덜하다고 해서 사 왔어요. 집에 계실 때는 그거 입고 있으시면 좋대요.”

    “고맙구나.”

    이나은의 고운 마음씨에 막내 할아버지가 감동했다. 이나은이 싱긋 웃더니 주방으로 갔다.

    “어머니, 저 왔어요. 뭐부터 하면 돼요?”

    “아니야, 나 혼자 할 수 있어. 너는 가서 강우랑 있어. 오랜만에 보는 거잖아.”

    “아니에요. 오늘 계속 있을 건데요. 저도 도울게요.”

    어머니가 이나은을 보더니 부드럽게 웃었다. 참 착한 아이였다.

    “그래, 그러면 오랜만에 같이 요리해볼까?”

    “네, 잠시만요.”

    이나은이 강우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준비해온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화장까지 지우고 나온 이나은은 더욱더 예뻤다. 얼굴에서 빛이 날 정도였다. 강우는 또 그 모습이 좋다고 헤벌쭉 웃었다. 누구 여자친구인지 미모며 마음씨며 빠지는 게 없었다.

    “나은아, 배는 안 고파?”

    점심시간이 애매하게 지난 시간이었다. 평소 바쁜 스케줄로 끼니를 챙기는 시간이 부정확한 이나은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 배는 고파.”

    이나은이 배를 쓰다듬었다. 어머니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나은아, 이리 와 엄마가 닭죽이랑 전복죽 해놨어.”

    “진짜요?”

    이나은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응, 뭐 먹을래?”

    이나은이 망설임 없이 답했다.

    “둘 다요.”

    어머니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자신이 해준 음식을 가장 좋아하고 잘 먹는 것이 바로 이나은이었다.

    “그래, 어서 앉아.”

    “네.”

    이나은이 식탁에 앉았다.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가 편히 먹으라며 거실 소파로 가셨다. 할아버지가 뉴스를 틀었다.

    -돌아오는 광복절을 맞이해….-

    뉴스에서는 곧 있을 광복절 행사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막내 할아버지가 할아버지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리고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우리 형님이 참 대단한 분이셨지.’

    막내 할아버지가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마구 떠올렸다. 막내 할아버지의 시선에 할아버지가 나지막이 말했다.

    “막내야.”

    “네, 형님.”

    “형, 얼굴 뚫어지겠다.”

    할아버지의 민망한 듯한 말에 막내 할아버지가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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