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2화 (272/402)
  • 막내야, 가자 우리 집으로.

    매앰- 매앰-

    여름의 한복판이 되자 찌는듯한 더위가 찾아왔다. 월드컵은 역시나 미래의 기억대로 흘러갔다. 한국은 4위로 월드컵을 마무리했다. 한국을 뒤흔든 축제가 끝나고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지이잉- 지이잉-

    잠이 들었던 강우가 핸드폰 소리에 눈을 떴다. 선풍기 한 대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강우에게 바람을 열심히 불어넣고 있었다.

    “여보세요?”

    강우가 나른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강우야! 결과가 나왔다!-

    이재원의 잔뜩 흥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요새 들어 더 상기되어있는 이재원이었다.

    “어떤 결과요? SJ 그룹이랑 업무협약 결과요? 아니면 유전자 검사 결과요?”

    -어, 둘 다.-

    두 사람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맞죠?”

    -당연하지. 99.999999% 형제 관계 성립이다.-

    “역시 당연한 결과네요.”

    -그래, 검사 결과지는 병원에서도 바로 확인하셨을 거야.-

    “네, 고마워요. 형.”

    -고맙기는 우리 사이에 무슨….-

    강우와 이재원은 SJ 업무협약 건에 대해서도 한참이나 대화를 나누었다. 문화 산업계를 주무르는 두 거대 기업이 협업한다는 이야기에 세간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집중된 상태였다.

    “협약식은 언제예요?”

    -네 일정에 맞추려고 한다. 송 선배도 그러자고 하고.-

    송경식과 강우 그리고 이재원은 정말 격식 없는 사이가 되어있었다. 송경식 역시 서울대를 나왔고, 두 사람에게 선배 혹은 형이라 부르라 했다.

    “일단 오늘 막내 할아버지 퇴원하시니까요. 내일 회사로 들어갈게요. 만나서 정하죠.”

    -오케이. 알겠다.-

    강우와 이재원의 통화가 끝났다. 강우가 방문을 열고 나가자 구수한 닭죽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강우가 먼저 화장실에 들어가 샤워를 끝내고 나왔다. 온몸에 묻어있던 한여름의 찝찝함이 샤워기에서 나오는 냉수에 말끔히 씻겨 내려갔다.

    덜컥.

    옷장을 열은 강우가 가장 멋있는 정장을 꺼내 입었다. 오늘은 정말이지 기쁨이 두 배인 날이었다. 긴 병원 생활을 끝내고 막내 할아버지가 집으로 오시는 날이었다. 그리고 유전자 검사 결과까지 나왔으니 말이다.

    “아들, 일어났어?”

    “네, 엄마. 뭐를 그렇게 하세요?”

    강우가 주방 쪽으로 다가갔다. 어머니 어깨너머로는 맛있는 음식들이 열심히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응, 오늘 막내 할아버지 오시면 드리려고 닭죽이랑 전복죽.”

    “와…. 진짜 맛있겠네요.”

    역시나 요리에는 큰손인 어머니였다. 음식을 만드는 스케일이 정말 남달랐다. 하지만 그럴 만도 했다. 오늘 강우 집은 가족들로 가득 찰 예정이었으니까 말이다.

    “자리에 앉아. 엄마가 밥도 해놨어.”

    닭죽과 전복죽이 끓는 커다란 냄비 옆에는 작은 뚝배기도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역시나 어머니표 된장찌개가 끓고 있었다.

    “으아아아! 늦었어요!”

    방문이 벌컥 열리고 교복까지 챙겨 입은 강용이가 뛰쳐나왔다. 강용이는 곧장 현관을 향해 달려갔다.

    “막내야! 밥은 먹고 가야지!”

    어머니가 강용이를 불렀다. 다른 건 몰라도 아침은 꼭 챙겨야 한다는 게 어머니의 지론이었다. 하지만 강용이는 정말 급했다.

    “엄마! 나 오늘 늦게 가면 주번 연장이에요!”

    그 말을 끝으로 강용이가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마치 치타를 연상시키는 날렵함에 강우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하…. 박강용. 누굴 닮아서 저리 잠이 많은지.”

    안방에서 아버지가 눈을 비비고 나왔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보며 살짝 눈을 흘겼다.

    “누구긴 누구예요.”

    “하하….”

    아버지가 멋쩍게 웃으며 화장실로 쓱 들어갔다.

    쏴아아아-

    화장실에서 물줄기 소리가 나오고 아버지의 콧노래 소리가 섞여 나왔다. 잔뜩 흥이 난 아버지는 오래된 팝송을 불렀다. 중후한 목소리가 물줄기를 뚫고, 또 화장실 문을 뚫고 강우의 귀를 간지럽혔다. 아버지의 기분이 정말 좋았나 보다.

    “아들, 오늘도 고생 좀 해야겠어. 할아버지들 잘 모시고 와.”

    어머니가 자리에 앉은 강우 앞에 밥과 된장찌개를 놓아주었다. 강우가 수저를 들며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이 처음도 아니니까요.”

    어머니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강우가 최준을 집으로 모시고 온 경력을 자랑한 것이다. 강우가 열심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이 오늘따라 유독 맛이 있었다.

    “여보, 나도 부탁해요.”

    역시 출근 준비를 마친 아버지가 식탁에 앉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먹을 밥도 챙겨 주었다.

    “으어~ 좋다.”

    아버지가 된장국을 먹으며 탄성을 뱉어냈다. 아침 일찍 먹는 어머니의 된장찌개는 열심히 일하는 원동력이 되어주고는 했다.

    “강우야, 아빠가 오늘 최대한 일찍 퇴근해 볼 테니까. 부탁 좀 하자.”

    “네,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든든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의 표현처럼 집안의 기둥이고 보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여보 다녀올게요.”

    아버지가 주방에 있는 어머니에게 슬쩍 다가갔다. 어머니가 설거지하며 싱긋 웃었다.

    “네, 다녀오세요.”

    “흠흠….”

    아버지가 어머니를 보며 헛기침을 했다. 어머니가 슬쩍 고개를 돌리더니 강우를 힐끗 바라보았다.

    “여보.”

    “뭐 어때.”

    아버지가 어머니를 향해 입술을 쭉 내밀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슬쩍 밀어냈다. 강우가 헛기침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먼저 나가요.”

    현관에 도착한 강우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서로에 대한 애정이 듬뿍 느껴졌다. 강우가 씩 웃고는 이나은을 떠올렸다.

    ‘아…. 보고 싶네.’

    요새 들어 더욱더 바빠진 이나은이었다. 미래의 기억 그대로 톱스타의 길로 쉼 없이 달리고 있었다. 그만큼 두 사람이 만나는 시간은 한정적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의 애정전선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못 보는 시간만큼 서로를 그리워하고 애틋해진 두 사람이었다.

    스르륵.

    고급 세단이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오늘 막내 할아버지를 모시러 같이 갈 것이었다.

    “부사장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오늘은 정 기사만이 차 안에 있었다.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를 편히 모시기 위해 최 비서는 본사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강우가 차에 올라탔다.

    “병원으로 모시겠습니다.”

    “네, 오늘 잘 부탁드려요.”

    강우의 부탁에 정 기사가 환하게 웃었다. 평소 이런 부탁을 하지 않던 강우였다. 늘 받기만 해서 미안했는데 오늘 드디어 활약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세상에서 제일 편하게 모시겠습니다.”

    정 기사가 의지를 불태웠다. 오늘만큼은 정말 운전에 신경을 쓰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했다. 이윽고 강우를 태운 고급 세단이 병원에 도착했다.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네.”

    강우가 차에서 내려 병원 안으로 향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병원이 오늘은 활기차게 느껴졌다. 강우는 먼저 원무과로 향했다. 원무과에 들른 강우는 병원비를 모두 수납했다. 강우의 등장에 원무과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강우가 인사를 하고 원무과를 나왔다. 그리고 곧장 병실로 향했다.

    드르륵.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가 계셨다. 막내 할아버지는 환자복을 벗고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계셨다.

    “작은할아버지.”

    강우가 부르자 막내 할아버지가 스르륵 고개를 돌렸다. 피부병이 많이 좋아진 막내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부기가 빠져있었다. 그 모습이 정말 할아버지와 닮아있었다.

    ‘진짜 우연히라도 마주쳤다면 알아봤을 수도 있을 만큼 말이지….’

    강우가 나타나자 막내 할아버지가 환하게 웃었다.

    “우리 손자 왔구나. 일단 옷들이랑 소지품들은 정리를 다 끝내놓았다.”

    “제가 와서 하려고 했는데 조금 기다리시지 그러셨어요.”

    강우의 말이 끝나자 병실 안에 있는 화장실에서 할아버지가 나오셨다.

    “짐이 얼마나 된다고. 그보다 강우야 병원비는?”

    “수납하고 오는 길이에요.”

    막내 할아버지가 미안한듯한 표정을 지었다. 한 달이 훌쩍 넘어가는 입원 기간이었다. 입원하는 동안 1인실은 물론이고 온갖 종류의 치료를 다 받았다. 이렇게 마음이 편하고 돈 걱정 없이 지내본 게 얼마 만인지 알 수 없었다.

    “강우야, 병원비가 많이 나왔을 텐데….”

    막내 할아버지의 그런 마음을 강우는 단번에 이해했다. 그리고 그런 막내 할아버지의 모습이 참 안타까웠다. 강우는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앞으로 남은 막내 할아버지의 인생을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말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다 처리했어요. 그리고 돈을 버는 이유가 다 뭐겠어요. 가족을 위해서 쓰려고 버는 거죠.”

    “......”

    막내 할아버지가 입을 꾹 깨물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가족이라는 존재가 주는 감동과 감격은 시도 때도 없이 눈물샘을 자극했다. 막내 할아버지가 병실을 둘러보았다. 곳곳에 먹을 것과 선물들이 잔뜩 놓여있었다. 강우와 큰집 가족들이 병실을 매일 방문한 결과물들이었다. 그렇게 병실이 채워져 갈수록 막내 할아버지의 지나간 세월의 아픔이 병실 밖으로 흩어져 갔다.

    “그럼 나머지는 제가마저 정리할게요.”

    강우가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리고 가족들의 정성이 담긴 선물들을 하나씩 하나씩 포장했다. 그렇게 정리를 하다 보니 짐이 제법 나왔다.

    “생각보다 짐이 많아졌구나.”

    할아버지가 짐들을 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병원은 참 신기한 곳이었다. 입원할 때는 몸 하나 들어가더라도 퇴원을 할 때는 짐이 잔뜩 불어있고는 했다.

    “혼자 들고 가면 되죠. 뭐.”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한 서너 번 왔다 갔다 하면 다 나를 수 있을 거 같았다. 강우가 먼저 내릴 짐을 잔뜩 들었다.

    “어이쿠~ 우리 강우가 힘도 참 장사구나.”

    막내 할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흐뭇해했다. 강우가 병실 문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드르륵.

    병실 문이 열리고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강우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상대방을 황급히 살폈다. 곰 같은 덩치에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이지용이 서 있었다.

    “짐이 많아 보이네. 내가 좀 도와줄까?”

    “당연하지. 뭐 하고 있어 빨리 들자.”

    강우의 말에 이지용이 씩 웃었다. 그리고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원장님,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이지용이 막내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두 분 할아버지가 이지용을 보며 반가워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매일같이 찾아온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이지용이었다.

    “그래, 지용이 왔구나.”

    막내 할아버지가 이지용을 따듯이 반겨 주었다. 기억을 찾았지만 그렇다고 지나온 과거가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박재민이었지만, 과거에는 애육원 원장이었던 강중후였다. 막내 할아버지는 애육원 출신들에 대한 애정은 그대로였다.

    “원장님, 오늘 퇴원 축하드려요.”

    이지용이 덩치에 안 어울리게 꽃을 내밀었다. 막내 할아버지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산만 한 덩치의 이지용이 꽃을 들고 오는 모습을 떠올리느라 그랬다.

    “그런데 정말 이제 멀쩡해지신 거 맞아요? 정말 안 아프세요?”

    “그럼 멀쩡해.”

    막내 할아버지가 슬쩍 옷을 들쳤다. 울긋불긋하던 피부가 굉장히 호전되어 있었다. 곳곳에 피어있던 반점이 사라진 상태였다.

    “와…. 원장님, 진짜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렇지? 확실히 치료를 제대로 받고 약도 열심히 먹었더니 좋아지는구나. 요즘 같아서는 정말 살만해.”

    평생을 괴롭히던 피부병이 거짓말처럼 좋아지고 있었다. 집중 치료 덕분인지 아니면 찾아온 마음의 평화와 행복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막내 할아버지는 후자가 더 큰 이유라고 생각했다.

    “지용이가 아주 자상하구나.”

    할아버지도 이지용을 보며 웃었다. 이지용이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는 한쪽에 놓인 짐을 들었다.

    “자자! 빨리 가시죠! 오늘 참 좋은 날입니다.”

    강우와 이지용이 짐을 나누어 들고 병실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지나가자 복도가 꽉 찬 듯했다. 뒤이어 병실에서 나온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가 두 사람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세상 어디를 가도 안전할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막내야, 가자 우리 집으로.”

    “네, 형님. 가시죠 우리 집으로.”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가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한쪽에 나란히 늘어서 있는 창가에서 빛이 복도를 비추고 있었다. 마치 막내 할아버지의 앞날을 축복하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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