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0화 (270/402)
  • 기억합니다.

    어둠 속에서 드러난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경악과 의문이 가득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강우야,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야?”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가 말을 더듬었다.

    “아버지, 그게 지금 강우가….”

    “정식아, 가만히 있어 보아라. 나는 강우에게 들어야겠다. 지금 재민이를 찾았다고 한 게 맞지?”

    할아버지가 떨리는 눈빛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당황하던 강우가 심호흡했다. 이렇게 된 이상 사실대로 모두 말해야 했다.

    “이번에 제가 친구 친부모님을 찾아주러 광주에 갔었어요.”

    “그래, 아범한테 들었다. 지용이 친부모님을 찾으러 애육원 원장을 만나러 갔다고.”

    “네, 맞아요.”

    강우가 차분히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광주에 갔던 과정과 강중후의 집에서 겪었던 일들이었다. 강우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할아버지의 얼굴이 조금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강중후라는 애육원 원장이 동림동에서 피난을 떠난 사람이라 이거야? 그리고 머리를 심하게 다쳐서 기억을 잃었고?”

    “네, 맞아요. 그리고 애육원을 세웠던 분이 성을 따서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해요.”

    할아버지가 소파로 걸어와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잃어버린 막냇동생을 찾기 위해 정말 해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 장의 사진도 남아있지 않기에 인상착의를 떠올려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 그림을 인쇄해 광주 전역에 뿌렸다.

    “고아원이라….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할아버지가 침음성을 뱉어냈다. 막내 할아버지가 기억을 잃었을 것이라는 가정은 해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어디서인가 가족을 찾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

    “기억을 잃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그리고 아직 확실하지 않아요. 정말 아무것도 기억 못 하시거든요. 다만 제가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해보았을 때 막내 할아버지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생각해서요. 그래서 일단 할아버지하고 강중후 할아버지하고 유전자 검사부터 하려고 했어요. 그러고 나서 확실해지면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데….”

    강우가 할아버지를 힐끗 바라보았다. 평생 마지막 남은 혈육을 찾아 헤매던 할아버지가 받은 상처가 얼마나 많았겠는가. 최준의 가족을 찾으며 강우는 그 아픔을 옆에서 똑똑히 경험했었다. 그리고 결국, 가족을 찾지 못한 최준이 얼마나 상심했었는지도 말이다.

    “이럴 게 아니다. 지금 당장 만나보러 가야겠어.”

    할아버지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강우와 아버지가 깜짝 놀라 할아버지를 말렸다.

    “일단 주무시고 내일 가시는 게 어떠세요? 아직 응급실에 계시고요 내일 아침이면 병실로 올라가 계실 거예요. 지금은 시간도 너무 늦었고요.”

    “아버지, 강우 말대로 하세요. 너무 늦었어요.”

    할아버지가 긴 숨을 뱉어냈다.

    “그래, 그러자꾸나. 내가 기다려온 세월이 얼마인데 하룻밤을 못 참을 건 없지.”

    할아버지가 방으로 들어가셨다. 강우와 아버지가 서로를 바라보며 동시에 긴 숨을 뱉어냈다.

    “하아…. 일이 생각과는 달라졌네요.”

    “세상일이 다 마음먹은 대로만 흘러가는 건 아니지.”

    아버지가 강우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혹시 제가 잘못 생각한 거라면 할아버지가 크게 상처를 받으실 텐데 어쩌죠?”

    “음…. 지금까지 아빠가 지켜본 너라면 이번에도 반드시 맞을 거다.”

    아버지의 말에 마지막 남아있던 근심이 사라졌다. 강우가 씩 웃었다.

    “그럼 주무세요.”

    “그래, 너도 잘 자라.”

    강우와 아버지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 * *

    똑똑.

    “강우야, 자니?”

    새벽 일찍 할아버지가 강우의 방문을 노크했다. 밤새 뜬눈으로 생각에 잠겨있던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일어났어요.”

    강우가 방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할아버지는 벌써 나갈 채비를 마친 상태였다.

    “미안하구나. 할애비가 잠이 통 오지 않아서 말이야. 지금 나갈 수 있을까?”

    “네, 바로 준비할게요.”

    강우가 곧장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거실 소파에 앉아 두 눈을 감은 채 강우를 기다렸다.

    “아버님, 진지 잡수고 가세요.”

    안방 문이 열리고 어머니가 나왔다. 어머니는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아침 일찍 아버지에게 소식을 듣고는 어머니도 많이 놀란 상태였다.

    “아니다. 밥 생각이 없어.”

    “그래도, 간단히 요기라도 하셔야 해요.”

    어머니가 주방으로 다가가 간단한 요깃거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뒤이어 아버지도 나갈 준비를 마치고 나왔다. 오늘은 회사를 늦게 출근하고 할아버지를 따라나설 생각이었다.

    “아버지, 저도 가겠습니다.”

    “그래, 너도 가야지.”

    할아버지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강우가 모든 준비를 끝냈다. 강우는 정 기사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은 오지 않아도 된다고 전했다. 강우와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가 식탁에 앉았다. 어머니가 부쳐주신 달걀부침과 우유를 후루룩 먹은 할아버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가자.”

    세 남자가 현관문으로 다가갔다. 어머니가 뒤를 따라 나오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아버님, 잘 다녀오세요.”

    “그래, 어멈아.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있거라.”

    어머니의 걱정하는 마음을 잘 아는 할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었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눈을 맞추며 걱정하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덜컥.

    문이 열리고 세 남자가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승용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 * *

    부우웅-

    달리는 차 안에서 할아버지가 초조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아버지가 뒤를 돌아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 너무 애끓지 마세요.”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담담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걱정하는 거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도 다 생각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정말 잃어버린 재민이라면 나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으니까.”

    이윽고 차량이 병원에 도착했다. 주차장에서 내린 세 사람은 곧장 병원 안으로 향했다. 강중후는 지금 1인실로 옮겨진 상태였다. 병실에는 이재원과 이지용이 같이 있다고 했다.

    띵-

    병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내렸다. 사람들이 대부분 내리고 이제 엘리베이터 안에는 강우와 아버지 그리고 잔뜩 긴장한 할아버지가 있었다.

    “내리자꾸나.”

    “네.”

    할아버지가 마음이 급한지 앞장서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곧장 강중후가 있는 1인실로 향했다. 1인실 앞에 도착한 할아버지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얇은 병실 문 사이로 길고 긴 세월이 흐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똑똑.

    할아버지가 병실 문을 노크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손잡이를 잡았다. 할아버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강우가 그런 할아버지의 손을 잡아주었다.

    드르륵.

    할아버지가 문을 열었다. 안쪽에는 강중후가 병상을 반쯤 세운 채 기대어 앉아있었다.

    “할아버지!”

    이재원이 할아버지를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할아버지가 괜찮다며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할아버지가 조심스럽게 강중후를 불렀다. 강중후의 고개가 할아버지를 향해 스르륵 돌아갔다.

    “아…. 안녕하십니까?”

    잠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이재원을 통해 할아버지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강중후였다.

    “손자분 덕분에 제가 말년에 이런 호강을 다 해봅니다.”

    “착한 아이이죠. 우리 손자….”

    할아버지가 강중후에게 다가가 옆쪽에 앉았다. 그리고는 지긋이 강중후를 살폈다. 강중후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바로 옆에 앉아 자신을 살피는 시선이 불편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익숙한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마치 잃었던 기억의 파편이 살아나듯 강중후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잠시 확인하고픈 게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강중후의 환자복을 살짝 들쳤다. 강중후의 옆구리에는 불에 덴 자국이 선명히 나 있었다. 할아버지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물었다.

    “어렸을 적 동림동에 살았다 했소?”

    “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저를 구해주신 분이 동림동에서부터 제가 피난 행렬에 나타났다 했습니다.”

    할아버지가 긴 숨을 뱉어냈다.

    “혹시 박재민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오?”

    강중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침음성을 뱉어내며 머리를 붙잡았다. 할아버지가 다시 물었다.

    “박선영을 박지영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오?”

    “아아…. 지영 누이!”

    강중후가 탄성을 뱉어냈다. 그리고 자신을 끝까지 지키려던 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강중후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기억합니다. 나를 아껴주던 지영 누이를 기억합니다.”

    “재민아…. 많이 아픈게야?”

    할아버지가 돌연 말을 놓았다. 주변의 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재민…. 그래…. 맞아요. 박재민….”

    할아버지를 마주하는 순간부터였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잃었던 옛 기억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불렸을 때 비로소 강중후는 박재민이 되었다.

    “재봉이 형님?”

    알려준 적 없던 할아버지의 이름이 강중후 아니 박재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할아버지가 이제는 이름을 되찾은 막냇동생의 손을 꽉 부여잡았다. 그리고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을 이렇게 살아있는 것을 내가 부족해서 이렇게 긴 세월이 흘렀구나. 이 못난 형을 용서해다오.”

    할아버지가 목 놓아 울었다. 강중후가 그런 할아버지의 손을 나머지 한 손으로 감싸듯 덮었다. 그리고 흐느끼듯 말했다.

    “괜찮아요. 형님. 이제라도 만났으니 저는 하늘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제 아무런 여한이 없어요.”

    “이놈아…. 그게 무슨 말이야. 이제 시작이야. 그동안 너에게 못 해준 것들 내가 다 해줄게.”

    박재민이 고개를 푹 떨구었다. 긴 세월 사무쳤던 그리움과 외로움이 일시에 밀려 나왔다.

    “형님, 아버지는 어머니는 다른 형님들과 누님들은요?”

    “.....”

    할아버지가 말을 잊지 못했다. 그러자 박재민의 눈동자에 슬픔이 더욱더 깊어졌다. 그날 마을을 벗어나며 들었던 총소리. 그리고 밀려들었던 불안감과 공포. 그 모든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박재민은 알 것 같았다.

    “형님도 매우 힘드셨겠군요. 많이 외로우셨군요. 죄송합니다. 못난 동생이 왜 형님을 기억하지 못했는지 그 이름 석 자 떠올리는 게 왜 이리 오래 걸리고 어려웠을까요.”

    “재민아….”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가 서로를 끌어안았다. 아버지가 그 장면을 보며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 싫은지 병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병실 밖에서 아버지가 대성통곡했다. 눈시울을 붉히던 이재원이 황급히 병실 밖으로 나갔다.

    “강우야, 나도 나가 있을게.”

    이지용도 눈물을 줄줄 흘렸다. 강우 가족의 일이었지만, 잃어버린 가족을 찾는 모습에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용이 강우의 어깨를 두들겨 준 후 병실 밖으로 나갔다. 강우는 가만히 서서 두 할아버지의 해후를 지켜보았다. 아니 그 모습을 두 눈에 담았다.

    ‘어쩌면…. 내게 주어진 능력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을 수도….’

    추운 겨울잠에서 깨어나 얻은 능력이었다. 강우는 그 능력으로 가족을 행복하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이루어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행복은 단지 돈과 명예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강우야, 이리 오거라.”

    한동안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울던 할아버지가 강우를 불렀다. 강우가 병상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

    “재민아, 이 아이가 바로 네 손자다. 우리 집 안의 대들보고 보물이다.”

    강우가 박재민을 바라보았다. 박재민이 강우의 손을 잡았다.

    “그래, 처음 보는 순간부터 어쩌면 우리의 핏줄이 서로를 끌어당겼는지 모르겠구나. 정말 고맙다 강우야.”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신 걸 축하드려요.”

    강우가 막내 할아버지를 꼭 안아드렸다. 병실 창가로 뜨거운 여름 햇살이 그런 두 사람을 비춰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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